내가 새벽 일찍 떠난 날, 그 숙소에 머물렀던 친구 사이인 A군과 B군도 다른 나라로 떠났고 남아있던 C군은 혼자 관광을 하러 정오쯤 숙소를 나왔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 남자는 잠들어 있었고 관광을 마친 C군이 저녁에 숙소로 돌아왔을 때까지 그 남자는 홀로 숙소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술이 깬 그 남자는 다시 멀쩡해졌고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인사 없이 떠난 나와 AB군에게 섭섭하다는 말까지 했다.
C군은 어젯밤 일을 말할까 고민하다가 괜히 골치 아플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둘이서 서로의 한국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남자는 C군에게 내일의 일정에 대해 물었다. 왠지 같이 관광을 하자는 뉘앙스로 물어본 남자의 의도에, C군은 피곤해서 하루종일 숙소에 있을 거라 대답하고는 각자 잠이 들었다고 한다.
다음날, C군은 그 남자에게 말한 대로 숙소에 머물러야 했고, 오후쯤 그 남자는 관광을 하겠다고 숙소를 나섰다. C군도 조금 뒤 (몰래) 나갈 심산으로 숙소에서 관광책자를 보고 있는데 숙소 주인아저씨가 숙소로 왔고, 그 남자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C군은 그날 밤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주자 주인아저씨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 남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주인아저씨 말인즉, 그 남자의 아버지가 아저씨한테 한국번호로 전화가 왔고, 본인이 독일 숙소에 도착할 동안만이라도 그 남자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고 한다. (사실 오래된 기억이라 정확히 이 부분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 남자에게는 약혼녀가 있었는데 둘이 차사고로 여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고, 남자는 많이 다쳐 며칠 입원해 있었다. 정신이 돌아올 때쯤, 약혼녀를 찾았고 그녀의 사망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정신과 치료도 꽤나 오래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약에 의지하며 살아가다가 결국 술에 손을 댔고, 술만 마시면 그날의일이 떠오르는지 우울증과 공격적인 성향이 동시에 나와 알콜 치료도 받았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 주변의 도움으로 그 남자는 다시 살아보려고 치료도 열심히 받고, 정상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많이 보여 부모님이 안심을 했다. 남자는 마음을 다질 겸 해서 세계 여행을 계획했고, 넓은 세상을 보고 나면 나아질 거라 판단한 그 남자의 부모님이 여행을 허락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심 불안했던 그 남자의 아버지는 그 남자의 곁을 지키고자 하루 차이로 (아마 직장 때문) 독일행 비행기를 끊었고 혹시나 해서 숙소주인께 본인 도착 전까지 잘 봐달라고 했다. 사실 이 부분은 그 남자 도착 전에 주인아저씨가 그 남자의 아버지께 전화를 받았는지, 도착 후에 사정을 들었는지 알 수 없다.
그 남자의 사정을 들은 C군은 어차피 다음날 숙소를 떠날 예정이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하지만 늦은 밤이 돼서도 그 남자가 숙소에 도착하지 않자 주인아저씨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걱정을 했다. 그 숙소에는 그날 새로 들어온 한국인 여자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렇게 주인아저씨, C군, 새로운 여자 이렇게 3명이서 그 남자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결국 그 남자는 숙소로 복귀하지 않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인아저씨가 숙소사람들에게 부탁해 그 남자를 찾으러 숙소 근처를 돌아다녔다. 어디서 또 술 마시고 널브러져 있을까 싶어 그렇게 세 사람은 근처 술집, 마트 등 열어있는 가게마다 들어가서 물어봤지만 (이미 늦은 시간이라 열려있는 가게가 많지 않았음) 그 남자를 끝내 찾지 못했다. 날이 밝아 예정대로 C군은 다음 여행지로 떠났고, 궁금한 마음에 남아있던 한국인 여자애에게 그 남자가 어떻게 됐는지 알려달라 메일주소를 주고 떠났다고 한다.
C군이 그 남자를 잊어버릴 때쯤, 그 여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남자의 아버지가 곧 독일로 도착했고, 주인아저씨와 그 남자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했는지는 잘 모르겠음) 다행히 그 남자는 여권 및 본인의 짐을 숙소에 그대로 두고가 일단은 다른 나라로 건너갈 수 없어 다들 안심했다. 그리고 피 말리는 며칠이 지나서야그 남자는 결국 경찰에 의해 발견됐다.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가 술에 취해 독일인과 시비가 붙었고, 화가 났는지 겉옷을 몽땅 다 벗고 알몸난동을 부리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독일말을 못 하는 그 남자의 변호를 위해 경찰은 한국인 통역가/대사관을 불렀고 그들의 도움으로 아버지께 그 남자를 인도했다고 했다.
나도 오래된 기억이라, 마지막 내용은 순서가 조금 뒤죽박죽이고 정확하지 않아상황을 짐작해서 덧붙인 부분도 있지만, 내가 겪었던 그 날밤의 공포와 그 남자의 실종 및 발견된 이야기만큼은 정확하고 어제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 남자의 과거를 듣고 나니 무서웠던 그 남자가 괜스레 안타까웠다. 그 날밤 나를 쳐다보던 그 넋 나간 눈빛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약혼녀를 지키지 못한 그날의 죄책감으로 잠든 나를 빤히 쳐다봤을까. 나를 뭔가로부터 지키고 싶었을까 아님 본인에 의해 나를 무너뜨리고 싶었을까. 물론 그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그 남자에대해 글을 쓰고 동정심이 드는 거겠지만 나는 그 남자의 삶이 짠하다.
그 남자가 아픈 과거를 다 잊고 잘 살고 있길 바란다. 덕분에 난 악몽을 얻었지만 혼자 살아남은 그 남자의 악몽 같은 현실보다는 덜 끔찍하니 좋은 마음으로 그 사람의 안녕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