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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분주 Feb 28. 2023

나는 효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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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 지 6개월 그리고 자취방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지 3주가 지났다.

내가 선택한 퇴사지만 나이 먹고 백수인게 눈치 보여 매일 방에서 글 쓰는 척 키보드를 두드린다. 가끔은 타자게임을 하면서 베토벤 운명교향곡처럼 열정적으로 타자를 두드리고 있으면 분명 거실에서 격정적인 나의 타자소리를 들은 우리 아빠는,

우리 딸 스.. 고이...


역대급 대작이 나올 것이라 은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안해요 아빠 흑흑.


우리 엄마는 백수가 된 채 고향에 내려온 나를 '작가지망생'이라는 포장지로 한껏 멋있게 포장한 뒤 나의 안부를 묻는 지인들에게 딸이 글을 쓰고 있는데 나중에 테레비에서 나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 허언을 하고 다닌다.


아 그 정도 아닌듸.

생각난 김에 오늘밤 꺼진 컴퓨터의 자판을 더욱더 실컷 두드려야겠다. 미안해요 엄마 흑흑.


글을 쓰는 백수 딸을 부모님이 믿어주는 이유가 있다. 4년 전, 잠시 회사를 쉬게 되면서 하루 열몇 시간씩 라디오를 들으며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라디오 DJ들이 읽어주는 사연을 들으면서 '음 내 이야기보다 재미없는데…' 싶은 마음에서 글쓰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보낸 사연들이 금은보화로 되돌아오는 기적을 두 눈으로 본 부모님은 이야깃거리가 생길 때마다 사연으로 적어보라고 나를 부추겼다. 처음에는 소소한 커피쿠폰으로 시작해 점점 상품의 값어치가 커지더니 삼촌의 흑채 에피소드가 잭팟을 터트려 황금제비가 되어 황금을 물어다 주었다. 3일에 한 번꼴로 집에 택배가 쌓이게 되니 어느새 부모님은 딸의 재능을 인정해 주는 동시에 라디오 사연에 중독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시작된 그들만의 지독한 사연 사랑.

하루는 아빠가 침대 위에서 생초콜릿을 먹다가 한 덩어리를 침대에 흘렸는데 그걸 줍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전기장판의 뜨뜻한 온도에 초콜릿이 고스란히 녹아버렸고, 침대를 정리하던 엄마가 초콜릿이 녹아 찐 갈색이 된 자국을 보고는,

..ㅅ . 이.. 이게 뭐여..


아빠가 침대똥을 지렸다고 생각해 혹시 치매가 왔나 걱정해서 엄마 혼자 며칠을 끙끙 앓았다고 한다.

내.. 가 본 것이... 뭐시여.


물론 나중에 아빠가 초콜릿이라 말해줘서 오해가 풀렸지만 엄마는 그날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면서 초콜릿은 트라우마가 생겨서 쳐다보기도 싫다면서 그날의 악몽을 되새김질하듯 눈을 질끈 감고서는,


".. 근.. 데 이.. 걸로 사연.. 쓰면 뽑히려나? 허허허 "라고 덧붙였다. 


참…. 상품에 눈이 멀어 아빠를 국민똥지린마로 만들어 집안개망신을 시키고 싶은가 보다 순간 생각했다.


이뿐 아니라 아빠가 엄마랑 싸워서 금식선언 하고 몰래 생라면 뽀사 먹다 앞니가 부러진 이야기, 아빠 등산 갈 때 선크림 대신 비비크림 챙겨줘서 아빠를 숙호산 달걀귀신 만든 이야기 등 전혀 재밌지도 않은 이야기를 가지고 사연을 쓰라고 매일 본인들의 에피소드를 나에게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심사평을 부탁했다. 질린다 질려.


내가 그만 글을 써야겠다고 느끼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에 들어가려는데 아빠가 열쇠를 땅에 떨어뜨렸고, 그걸 주우려고 허리를 굽히다가 아빠 엉덩이로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엄마를 힘껏 밀쳐버렸다. 아빠 엉덩이에 의해 밀쳐진 엄마가 무게중심을 잡지 못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계단에 이마를 박아 쌔파란 피멍이 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고 있는데 혼비백산한 엄마가 이마를 감싸 쥐고는,

"이ㅇㅇㅣ... 이걸로.. 사연 쓰면... 되게ㅆ... 지?"


그날 나는 모든 라디오 계정에서 탈퇴했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고 하니 부모님은 은근 기대하는 눈치셨다. 4년 동안 쌓인 에피소드가 많으니 내 글빨 덕분에 살림살이가 나아지겠다면서 벌써부터 좋아하셨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라디오에 사연을 쓰지 않고 나만의 책을 쓰고 싶다 선언했고 응원해 주겠다고 하면서 은근 서운해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엄마의 소원대로 본인 사연을 나의 브런치에 남기고자 한다.


제목: 참말로 코 더럽게 고네

사연: 엄마는 거의 7일 중 5일을 코를 골면서 자는 편인데, 그 소리가 웬만한 공사장 드릴소리보다 크다. 소리에 예민한 나는 엄마 코골이 주파수가 나의 한계치를 넘으면 엄마를 흔들어 깨웠고, 그때마다 본인은 코 곤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본인은 잠든 적도 없는데(응?) 어떻게 코를 고냐면서 나를 오히려 거짓말쟁이 취급을 했다. 억울했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엄마 코 고는 소리를 핸드폰에 녹음해서 직접 들려줬는데 (나도 정상아냐) 엄마는 내가 인터넷으로 조작했다면서 믿지 않았다.


며칠 뒤 나와 엄마가 다른 지역에 볼일이 있어 새벽출발 고속버스를 탔고, 버스가 출발한 지 30분쯤 지났을 때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가 조용한 버스 안에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1분 간격으로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심지어 우리 앞쪽에 앉은 다른 승객들도 뒤쪽에 앉은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커커커커ㅓㅓㅓㅓㅓㅓ컥. 커커커커ㅓㅓㅓㅓㅓㅓㅓ컥.

우리도 시선을 따라 같이 뒤쪽을 쳐다봤고 신경 거슬리는 코 고는 소리에 엄마는 나에게 귓속말로,

"참말로 코 더럽게 고네."라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난 그 코 고는 소리가 익숙하고 왠지 친숙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커커커커ㅓㅓㅓㅓㅓㅓ컥. 커커커커ㅓㅓㅓㅓㅓㅓㅓ컥.



그렇게 거의 10분가량 코 고는 소리를 들었을 때, 참다못한 엄마는 조금은 큰 소리로,


" 아오. 참 시끄럽네. 공공장소에서 이- 코를 면 되겠는가- 민폐여 민폐."


다른 승객들의 공감과 동의를 구한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크게 말하고는 나에게 저런 매너 없는 몰상식한 행동이 지속되면 본인이 직접 나서 공개처형을 시키겠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에 엄마 가방이 아래로 툭 떨어졌고 가방 안에 있던 핸드폰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커커커커ㅓㅓㅓㅓㅓㅓ컥. 커커커커ㅓㅓㅓㅓㅓㅓㅓ컥.

코 고는 소리의 진실이 세상밖으로 나왔다.



그 무식하게 코를 골아대는 건 다름 아닌 과거의 엄마였다.

커커커커ㅓㅓㅓㅓㅓㅓ컥. 커커커커ㅓㅓㅓㅓㅓㅓㅓ컥.


렇다.

억울한 나는 어떻게 엄마한테 복수할까 (나도 보통 아냐) 생각하다가 엄마핸드폰으로 엄마 코골이 녹음파일을 전송해 엄마 알람 벨소리로 설정해 두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침 8시가 되자 알람이 울렸고 알람을 끌 때까지 계속 울렸던 것이다. 그렇게 버스 안의 시민들과 우리는 15 분가랑 엄마의 코골이 소리를 들은 것이다. 엄마는 그날 거울치료를 제대로 한 뒤 본인의 코골이 소리가 심각하다는 걸 깨닫고 반성했다는 슬픈 사연이다.

커커커커ㅓㅓㅓㅓㅓㅓ컥. 커커커커ㅓㅓㅓㅓㅓㅓㅓ컥.



엄마 코골이 파일 첨부합니다.

복수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면 다운로드하여 상대방 몰래 핸드폰 벨소리로 설정해 두세요 헤헷.




엄마.

원하는 대로 사연 적었어요.

상품은 없지만

대신 개망신은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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