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지났구나. 우리들의 자유가 마스크 안에 봉인된 게. 정부의 마스크 해제 발표는 곧 코로나에서의 해방을 뜻하는 게 아닐까. 어느덧 코로나도 일상이 되어버렸고 더 이상 공포도 두려움도 없다.
아
망할 코로나.
빌어먹은 코로나여.
나에게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말해보라 하면 대하소설이 나올 만큼 할 말이 많다. 코로나로 인해 평생 살면서 들을 욕을 다 먹었지만 코로나 덕분에 원장은 떼돈을 벌었다. 내가 일했던 대형어학원은 누구보다 발 빠르게 코로나 대처를 잘했다. 온라인 수업이 없던 3년 전, 본사는 줌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가정에서 거리두기 할 필요 없이 편하게 수업할 수 있는 실시간 라이브수업을 간판으로 내세워 퇴원생 하나 나오지 않았다. 주변 소형학원과 개인교습소는 미처 방향을 잡지 못해 폐업하기 일쑤였고 그 많은 인원이 영어 학습에 공백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 학원으로 줄줄이 등록했다.
모두들 온라인 수업은 처음이다 보니, 카메라 설치부터 접속, 마이크 및 이어폰 체크, 출석체크 등 나는 뛰어다니면서 교실마다 일일이 다 확인해야겠고 끈임없이 학부모들과 소통해야 했다, 실시간 온라인 수업으로는 아이가 집중을 못하네마네 하지만 학원에 보내기는 불안하네마네. 전화로 정말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하루는 전화기만 8시간 잡고 쩔쩔매다가 퇴근한 적도 있다.
모두들 이런 팬데믹은 처음이라 대처방안도 몰랐고 뉴스에서 연신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빨간글자의 코로나 확진자 및 사망자수에만 촉각을 곤두세워 '우리 동네에 코로나 환자가 있어서는 안 돼. 확진자를 처단하라.'식의 불안한 마음이었다. 혹여나 동네에 코로나 환자가 1명이라도 나오는 날이면 다들 무조건 학원으로 전화해서 그 사람이 누구냐, 학원생은 아니냐, 선생님들 동선이 겹치지 않았느냐 등 경찰도 모를 셜록홈스 같은 마구잡이 질문을 해댔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ㅆ. 그 당시는 학원 전화 벨소리만 들어도 지릴 정도로 노이로제가 걸렸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2년 전, 우리나라에서 일일이 확진자의 동선을 파악해서 동선이 겹치는 사람도 무조건 2주 자가격리를 할 때다. 당시 6인 가족 이하 모임만 허락했을 때, 내 생일을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가 오랜만에 서울에 있는 오빠 부부를 굳이 초대해서 가족끼리 집에서 회를 먹었다. 다행인건 서로 다 시간이 맞지 않아 겨우 저녁만 함께 먹었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인 월요일 새벽 시외버스를 타고 회사로 출근했고, 오빠네 부부는 그날 밤에 서울로 돌아갔다. 화요일 오후,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매우 떠는 목소리였다. 아빠가 코로나 확진이라 했다. ㅆ바ㄹ.
내 생일 며칠 전 만난 아빠 지인이 몸이 안 좋아 검사를 하니 양성이었다. 아빠에게 연락을 해서 검사를 받아보라 했는데 아빠도 양성이었다. 무증상 확진. 아빠 동선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걸리니 미리 가족들에게 알리라 해서 엄마가 나에게 전화를 줬다. ㅈ됐다. 동네에 확진자 한 명만 나와도 학부모들은 신상털기부터 시작해 공개처형과 석고대죄를 시킬 수준으로 핵 예민한데 우리 아빠가 확진이라니. 우리 아빠가 경남 1명 중 한 명이라니. 일단 바로 집으로 가서 보건소 전화를 기다렸다. 나는 프런트에 앉아 있기 때문에 집단감염의 위험도는 낮았지만 너무 불안했다. 나 때문에 학원이 망할 수 있으니. 난생처음 하느님 부처님 성모아리아님 선녀님 간디님 홍콩할매님 귀신님 분신사바님을 찾았다. 무교임에도 불구하고.
동선 파악한다고 보건소 연락이 늦어졌는데 무조건 오늘 안에 받게 해달라고 보건소에 전화해서 펑펑 울었다. 저 300명이 넘은 곳에서 일해요 제발요. 저 암살당할 수도 있어요 흑흑흑. 수화기 너머로 나의 불쌍함과 난처함을 알아준 직원이 일단 먼저 검사부터 받으라고 했다. 대중교통은 절대 이용하지 말고 자차로 어서 보건소로 오라고 했다. 이런 난 차가 없눈뎅. 또 전화기에 대고 울었다. 저 차 없어요 데일러줄 친구도 남자친구도 가족도 없어여 흑흑흑 나이 30 넘게 먹고 자차가 없도 친구도 없고 남자 친구도 없는 내가 불쌍한 게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랬더니 직원분이 한숨을 푹 쉬시면서 확진자 가족이라 빨리 검사해야 하니 직원을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고마워요 나의 구원자여.
직원분이 오기 전에 일단 생각정리를 했다. 가만있어보자. 내가 아빠랑 마주 보고 말한 적이 있던가. 다행히 없다. 저녁을 같이 먹긴 해도 나는 회를 못 먹어서 옆에 앉아서 추임새만 넣어줬으니 아빠 침사례를 받은 일은 없었다. 아빠도 침실지박령이라 밥 먹을 때 말고는 방에서 꼼짝도 안 한다. 럭키. 일단 확진은 아니겠지. 근데 괜히 목이 아픈 것 같은 느낌 같은 느낌. 머릿속에는 내가 확진이라면 학원은 어찌 될 것이며 그 많은 원망의 눈초리며 손가락질은 어쩔 것이며 남은 인생을 죄인으로 고개 처박고 살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에 복잡했다.
곧 나를 픽업온 직원분이 집 앞에 왔다. 일단 확진자가 거의 나오지 않는 조용한 동네니까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조심히 후딱 보건소에 갔다 올 마음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건물밖으로 나갔는데 이게 뭔 일,
구급차는 아니었지만 승합차안쪽을 온갖 비닐로 감쌌고 기사님은 백조처럼 새하얀 방호복을 입고 계셨다. 걍 누가 봐도 확진자 이송작전중. 그리고 나와 멀찌감치 자리 잡고 서서는 차에 타서는 한마디로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이 아주 굉장히 무척이나 무거웠다. 이 차를 타는 순간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지배당한 몸뚱아리요 내일 안전문자에 부산 OO동 1명이 내가 되겠구나 싶은 마음에 300명의 학생+300명의 어머님+300명의 아버님+300명의 학생 자매남매형제친적의 팔촌의 지인들의 원망이 귀에 들리는듯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보건소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고 그 앞으로 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선 겹친 사람들인가 보다. 기사님은 굳이 그 줄을 끊고 안쪽에 주차하기 위해 '여보시게들 여기 위급 확진자 예비후보가 있소이다'를 알리는 경쾌한 빵빵 클락션을 울리셨고 예수님이 바다를 두쪽으로 가르듯 긴 줄을 반으로 갈라 굳이 길을 만든 다음 굳이 나를 한가운데 내려주셨다.
먼저 내린 기사님은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방독마스크를 쓰셔서 그런지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저어어-기 가서 먼저 검사받으세여. 확진자 가족이라 바로 받을 수 있어요."
마치 그분의 행동은,
절대 이 확진자를 놀라게 해선 안된다네.
감사해요 시선집중유도.
덕분에 일사천리로 검사를 하고 다시 그 트럭을 타고 집으로 왔다. 10분 정도 걸린 우당탕의 해프닝이었지만 줄 서있는 시민들의 입틀막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검사결과를 기다리는게 아닌 무죄가 내려지길 기다리는 범죄자같은 기분으로 밤을 꼬박 셌다.
다음 날 오빠네 부부, 나, 엄마 다 음성이 나와서 한시름 놓긴 했다. 난 내가 처음부터 음성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 기사님의 과잉보호리액션을 보았을 때 양성이어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우리나라 보건소 직원분들 그리고 방역은 전세계 탑클래스임은 인정한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 오미크론으로 코로나의 치사율이 점점 낮아지면서 하루에 수천 명씩 확진되던 시기에 학원 선생님들도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주일 간격으로 한 명씩 코로나에 확진되어 선생님 각자의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긴 했는데 몸상태가 좋지 않아 내가 수업에 들어가는 일들이 잦아졌다. 한 명 나아서 오면 또 다른 한 명이 아프고. 한 달 내내 그렇게 선생님들 수업 빵꾸를 메꾸며 발에 불나도록 뛰었던 것 같다.
신기하게 나는 금요일 밤이 되면 으슬으슬 춥고 주말 동안 호되게 아파서 '혹시?' 했다가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이면 씻은 듯 나아서 '역시' 또 노예처럼 일을 했다. 사실 조금 억울한 부분도 있었다. 학원에 피해 안 가게 하기 위해 나는 외출도 안 하고 사람도 안 만나고 매일 2번씩 소독하고 온갖 쇼를 했는데 일이란 일은 내가 다 떠맡아했으니. 그래도 코로나 확진돼서 아플 바에는 일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코로나로 집에서 쉬는 선생님들이 내심 부럽고 걱정되고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원래 하는 일 20개 + 선생님 수업 및 시험지 정리 10개 = 내가 해야 하는 일 12382342520개. 제기랄. 내가 대신 수업한다고 해서 내 월급이 오르거나 보너스가 나오는 건 아니니 더 빡쳤다.
한차례 선생님들 사이에 불었던 코로나 태풍이 잠잠해지고 주변 사람들이 자가격리를 알뜰살뜰하게 써먹을 때 괜히 억울했다. 이쯤이면 나도 걸리겠는데 싶었는데 매번 검사하니 응 음성 넌 아니야. 나는야 슈퍼 유전자라면서 친구와 나는 이대로는 억울해서 안 되겠다면서 장난으로 지하철 땅바닥을 혀로 핥고 다니자면서 우스갯소리를 했다 (... 난 어느 정도 진심이었음 그만큼 너어어어무 힘들었다는 걸 감안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저를 이해해 주세요) 친구도 직장에서 본인 빼고 다 걸려 본인이 일당백 일처리 다 했다면서 우리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매일밤 나눴다.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다 하면서 확진된 동료의 칫솔을 얻어서 막대사탕처럼 빨아먹자는 (... 응?)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또 둘 다 새가슴이라 그렇게 하진 못했다. 둘 다 말만 센 척했지 뒤로는 코로나 걸리고 싶지 않아서 생강차 칡차 레몬차 배도라지차 프로폴리스 은교산 몸살약 감기약 목수건 마스크 2개 쓰기 등 자기 몸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일상이 된 작년, 일주일 학원 여름방학을 앞둔 토요일. 친구와 오랜만에 쇼핑을 하러 아울렛에 갔다. 쇼핑도 하고 밥도 먹고 신나게 놀다가 일요일 첫차 타고 방학을 보내러 고향에 내려갔다. 부모님과 여행도 가고 사진도 찍고 머리 염색도 하고 네일도 하고 집 인테리어도 다시 하고 등등등. 많은 계획을 세웠다. 엄마랑 수다도 떨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는데 그날 밤에 열이 38.8도까지 올랐다. ㅆ바ㄹ. 왔네 왔어. 내 차례구나.
엄마는 오랜만에 힘든 일 끝나고 고향에 내려와 긴장이 풀린 탓에 몸살이 온 것 같다고 푹 쉬라고 했다. 엄마말을 믿고 월요일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너무 춥고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 같고, 온몸이 아프고,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열을 재니 39.4도까지 올랐다. 엄마가 물수건으로 밤새 몸을 닦아줬고 날이 밝자마자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는 이미 환자가 많았다, 의사 선생님이 자가키트로 내 코를 찔렸고 밖에서 잠시 대기하라고 했다. 그리고 5분 뒤, 간호사분이 주변 눈치를 보며 내 이름을 살짝 부르더니 문을 살며시 닫으시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확진입니다."라 하며 보건소에 제출할 내 정보를 기입하라고 종이를 줬다. ㅆ바ㄹ.휴가 첫날인데. 부모님과 여행도 가고 사진도 찍고 머리 염색도 하고 네일도 하고 집 인테리어도 다시 해야 되는데. 결국뒷북 확 to the 진.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내 방에서 혼자 울면서 일주일 자가격리했다. 도대체 어디에서 옮았을까. 도대체 내 삶은 왜 이럴까. 왜 나는 쉬지 못하는가. 왜 나는 일만 죽도록 해야 하는가. 왜 나는 노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