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340

거북이

by 모래바다

혼잣몸 운신하기도 귀찮아 하는 내가 거북이를 키우게 됐다. 솔이 때문이다. 사실 솔이는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했다. 하지만 엄마 아빠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는 이것저것 고르다가 거북이를 키우겠다고 했다. 우리는 동의했다.


롯데마트에서 거북이 한 마리를 샀다. 한 마리만 키워보자고 제안한 것은 나였다. 가격도 만만찮았지만 막상 키우다 보면 그 일이 금방 식상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솔이는 미리 이름까지 지어놓았다. 달달이. 거북이와 이름 사이에는 아무런 의미관계도 없었다. 그냥 솔이가 그렇게 지은 것 뿐이다.


그런데 그 거북이는 하루가 지나도록 별로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자 이튿날 솔이와 아내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아마도 외로워서 거북이가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주장이 타당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는 그냥 그 말에 동의했다. 거북이는 혼자였고 혼자인 것은 외로울 수 있겠다고 생각해보니 그 주장도 영 타당성이 없어보이지 않았다. 둘째의 이름은 세달이였다. 이것도 솔이가 지은 것이었는데 역시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했다.


먼저 데려온 거북이가 외로워서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새 거북이를 데려왔는데도 달달이는 별로 움직임이 없었다. 그것은 그 놈의 성향이었던 것이다. 먹이를 주면 세달이는 잽싸게 달려 들었지만 달달이는 먼발치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랬다. 세달이는 이곳저곳을 다니며 고개도 주억거리고 뒤집어지도 하고 물가에서 수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달달이는 수풀가에서 고독한 현자처럼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다 알 순 없었지만 거북이들도 개인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들이 그런 것처럼. 문득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수많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차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들이 생각났다. 거북이들도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종종 거북이집에 불을 켜준다. 주인의 게으름 때문에 햇빛을 쐬기가 어려운 탓이다. 두뼘 쯤 되는 유리집 안에서 달달이와 세달이는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다. 불과 며칠만에 솔이는 거북이에 별 관심이 없다. 그나마 거북이집에 불을 켜주고 먹이를 주는 것은 내 몫이 되었다. 텔레비전 바로 옆에 집이 있기 때문에 자주 그 집을 들여다보곤 한다. 석 달여가 지난 지금도 달달이는 사색하는 철학자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고 세달이는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활기찬 등산가처럼 움직인다.


문득 생각해 본다. 저들의 삶은 무엇인가. 저들은 왜 자기들의 몸이나 마음에 익숙한 고향을 떠나 도시의 아파트, 번쩍거리는 텔레비전 옆에서 살고 있는가. 물론 그들은 안전하다. 자연의 먹이사슬로부터도 안전하고 온갖 비바람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꼭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안전한 것이 곧 행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항구에 있는 배가 안전하지만 제 삶을 다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불행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들 역시 늘 안전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삶의 전부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고통과 위험이라는 실존적 조건 속에서 비로소 누군가는 행복을 추구하게 되는 게 아닐까.


내가 게으르고 무관심한 주인임을 확인할 때마다 저곳은 거북이가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거북이들이 더 이상 이 작은 집에서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느 연못가에 놓아주고 싶다. 방생이라 하던가. 이는 너무 거창하고 인간 중심적인 말인 듯 하다. 잡아서 가둘 때는 언제고 방생이라는 거룩한 말로 자신들의 선함을 증명하려 할 때는 언젠가. 어쩌면 방생이 그들의 삶을 내동댕이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파트 유리집의 경험이 그들의 자생력에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쯤 도시와 아파트의 유리집을 원망할 지도 모르겠다.


인간들이 무언가를 키운다는 것은 거만의 극치이다. 우주의 모든 생명들은 제 삶의 운명과 몫이 있으며 그것대로 살 때 생명들은 가장 자연스럽다. 인간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성의 발달로 무언가를 키우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신의 위치에서 군림해서는 안될 일이다.


우리와 가까운 동물 돼지, 소, 닭. 오리... 인간이라는 생명은 자신을 유지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삼키지만 동물들에게 그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소나 돼지, 닭, 오리 등도 자연이 그들을 부를 때까지 수명을 연장하고 싶을 것이다. 인간이 그러한 것처럼. 그러므로 인간이 인위적으로 동물들을 해치는 행위는 그저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동물들을 살륙하는 것 뿐이다. 인간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들을 먹어치워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며 살륙은 최소화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도 상대에 대한 존중감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백정들이 소나 돼지를 잡기 위해 며칠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통탄하며 그들이 최소한의 고통만을 느낄 수 있도록 애썼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 인간들은 그저 우리의 생명유지를 위해 다른 생명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존재라는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윤리도 정립해야 할 것 같다.


거북이들을 들여다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빠른 시일 내에 거북이들을 놓아주고 싶다. 별다른 애정도 없이 생명들을 가둬놓고 먹이를 던져 주면서 함께 지내는 일은 모두에게 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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