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
지난 토요일 오후, 모처럼 솔이와 데이트에 나섰다. 집에만 있는 게 답답했던지 솔이가 흔쾌하게 따라 나섰다. 딱이 갈 곳은 없었다. 마침 기온도 올라서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그냥 인도를 따라 걷는 것이 전부였는데도 솔이는 무척 즐거워했다. 그러고 보니 솔이와 한가롭게 걸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너무 어릴 때는 걷기 힘들어했고 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학원이니 뭐니 하면서 일상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왠만한 곳은 자동차로 이동했다.
스포츠 용품 가게 안에서 졸고있는 고양이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솔이. 길가 전봇대를 보면서는 왜 가시처럼 뾰족뾰족하냐고 묻기도 했다. 아마도 감전을 우려해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시설물같다고 말해 주었다. 이런 말을 하자니 내가 엄청난 현인처럼 느껴진다. 어려운 인생의 숙제에 대답해 주는. 밖에 나오니 아빠의 권위가 좀 서는 듯 하다. 집안에서는 그럴 일이 별로 없는데. 쇼윈도를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혼자서 이렇게 인도를 걸어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리는 미니스톱 실외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또 한참을 걸었다. 사람들 몇이 웅성이는 곳, 청자다방이었다. 나는 솔이가 이런 산책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음료 한 잔을 사주기로 했다. 솔이에게 골라보랬더니 이름도 복잡한 하나를 고른다.
- 솔이 이거 먹어봤어?
입이 짧은 솔이를 고려해 다짐을 받듯 물었다.
- 먹어본 적은 없지만 먹는 것을 본 적은 있는 것 같애.
- ......? 정말? 맛 있대?
- 응, 맛 있어 보였어.
나는 솔이가 이 음료의 맛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책임을 피하기 위해 몇 번을 물었다. 솔이는 자신 있게 먹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보는 것과 먹는 것은 다른 법. 음료를 살짝 맛 본 솔이의 반응이 시원잖다.
- 이건 맛있긴 한데......뭔가 단 맛은 아니야......쓴 맛도 아니고...그런데 먹을 수는 있어.
나는 직감적으로 솔이가 먹을 수 없는 음료라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마셔보니 정말 이상한 맛이다.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솔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약같은,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맛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청자다방이라는 데서는 고구마를 주 테마로 음료를 만드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그래. 탄 고구마 같은 맛! 그걸 음료로 만든 맛!
우리는 투덜대며 한참을 걸었다. 그 음료를 욕하면서. 오늘의 선택이 실패였다는 것을 힘겹게 인정하면서 말이다.
- 그래도 괜찮아. 새로운 경험치를 얻었잖아. 경험치가 5는 올라갔을 거야.(솔이는 요즘들어 경험치라는 말을 잘 쓴다. 경험도 아니고 경험치? 어디에서 배운 말인지 궁금하다)
- 맞아, 먹어봐야 맛을 알지. 다음에는 좀 더 신중하게 선택하도록 하자.
- 아니, 신중하긴 했는데 맛이 이상했어......세상에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맛이야......
솔이가 계속해서 아쉬움을 토로하는 바람에 아파트 앞 메가커피에서 즐겨마시는 음료를 특별히 사주기로 하고 그 대화를 멈췄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다이소에 들러 천 원짜리 매직 스노우를 샀는데, 솔이는 그 때문인지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 오늘은 이거 샀으니까 메가커피는 가지 말자. 오늘은 이걸로 만족하기로 할게.
기분 좋아진 솔이가 특별히 양보하는 바람에 음료값을 아낄 수 있었다.
솔이와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마도 처음인 듯 하다. 집에 오면 솔이는 휴대폰만 보고 나는 피시나 티비 앞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최근에는 함께 책을 읽는 시간도 많이 줄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솔이는 피아노, 미술, 발레, 태권도 학원 등을 전전했다. 학교생활을 힘들어 하는 것 같아 학습지도 했다. 우리는 솔이가 아직 1학년이기 때문에 그냥 자유롭게 풀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학습 과정을 제대로 따라가기가 힘들었는지 솔이는 학교 가기를 힘들어 했다. 다행히 최근에는 좀 나아지긴 했지만.
이제부터 시간이 나면 솔이와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겠다고 결심해 본다. 에버랜드나 동물원이나 키즈카페가 아니어도 우리가 훨씬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함께 걸으며 깨닫게 되었다. 늘 큰 이유를 대면서 작은 일에 소홀했던 나를 반성해본다. 진짜 소중한 것은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솔이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소중한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