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차이나1

by 모래바다


아마도 2002년 겨울이었을 거예요. 20년이 다 되어 가네요. 크리스마스가 포함되었던 어느 날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갔었죠. 아직은 해외여행이라는 것이 조금은 생소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온 세상을 물들였던, 그 우중충하던 인도차이나의 황톳빛이 기억나네요. 시차를 감안하여 읽으시기를. 휴대폰도 없었나봐요. 사진이 없는 걸 보니. 배낭여행에 가까운 여행이었습니다.

레지 바르니에 감독의 프랑스 영화 <인도차이나>도 떠오릅니다. 그 사랑과 이념의 강렬한 서사와 감동! 잊지 못할 영화죠.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을 아우르는 인도차이나 반도 여행을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즉각 동의했다. 해외여행이라는 의례적인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막연한 동경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은 전무했다.


대략적인 인상은 이런 것이었다.

아시아! 약자! 가난!


물론 태국은 좀 낫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 강대국의 침략과 횡포 속에서 신음해야 했던 나라들에 대한 연민같은 것. 물론 이것은 우리 나라에도 해당되는 말이었기에 더욱 부담 없이 친근감을 느꼈을 것이다.


여행을 결심하고 여권과 비자를 만드는 동안 딱 한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들여 여행을 간다는 것은 괜찮은 일인가.


단지 내가 살고 있는 곳과 조금 다른 풍광과 삶을 경험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많은 돈과 에너지를 쏟아 붓는다는 것은 합당한가.


그 돈의 가야할 길이 나의 욕심으로 왜곡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물론 엄청나게 크고 심각한 고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금세 나의 이러한 사치를 허용하기로 했다. 그동안의 나의 소박한 삶이 이러한 사치를 상쇄시켜 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스스로를 달래지 않으면 여행이 조금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가기 전에도, 갔다 온 후에도.



몇 마디로 여행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거창하게 기행문을 써볼까 했지만, 여행 후유증 탓인지 쓰는 일이 자꾸만 미뤄졌다. 좋은 여행가는 좋은 여행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기행문을 쓰는 사람이라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비행기를 타보는 나로서는 그 일 자체가 약간의 흥분과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공중에 뜨는 것은 불안하다. 비행기는 어쩔 수 없이 불안하다. 특히 비행기를 많이 타보지 않은 나로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직접적인 경험이 적은 탓에 나의 의식은 더욱 편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02년 12월 20일 - 베트남을 향해


두려움의 크기만큼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국토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금가루, 은가루를 뿌려놓은 거대한 트리.


내가 이런 고상한 상상을 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가 서울을 떠난 것은 바로 12월 20일, 크리스마스를 닷새 앞둔 날이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야경을 보며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 같다고도 했다. 일상에 찌든 우리 마음은 벌써부터 한껏 아름다움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미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호치민으로 가는 비행기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비행기가 작아서인지 기류에 휩싸여 자주 흔들렸다.


호치민.



거대 미국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끝까지 조국의 자존심을 지켜냈던 베트남의 영웅.

그가 공산주의자였기에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귀를 씻어내야 할 정도로

이념의 유치한 대립 시대를 지나와야 했던 젊은 시절.


그런데 이제 그런 기억마저 흐릿해진 시대에,

호치민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향해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미국의 편에 서서 침략자의 졸개로서 본토 주민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던가.

마치 인디언에 대한 백인들의 개척사가 나중에 알

© eugeniohansenofs, 출처 Pixabay 고 보니 잔인한 침략사였던 것처럼,



베트남전은 불의에 대한 정의의 수호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이권을 위해(물론 우리의 이익을 위해) 약자에게 총칼을 들이댄 침략전쟁이 아니었던가.

순진했던 우리나라가 최초로 타국에 대해 가해자의 위치에 섬으로써 우리 모두의 마음에 얼마나 커다랗고 쓰라린 얼룩을 남겼던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런저런 상념으로 마음은 더욱 어지러웠다.




호치민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현지 시간으로 새벽 1시. 약 5시간이 걸린 셈.

우리나라의 조그만 기차역만한 공항건물을 빠져 나오자 열대 몬순의 후덥지근한 더위가 우리를 반겼다.


벌을 서듯 영어로 쓰인 안내문을 들고 여행객을 기다리는 많은 호치민 사람들.

아마도 호텔이나 여관 등에서 나온 사람들로 여겨졌다.

투숙할 여행객들을 붙잡기 위해 그 늦은 시간에 공항으로 몰려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봉고차를 타고 예약된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에서 수속을 밟는 동안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 것은 장미 파는 소녀들과 마사지를 하는 청년들이었다.

소녀라고는 하지만 이제 예닐곱 살이나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들이었는데, 아이들이 들고 있는 한 송이 장미꽃은 남국의 더위에 지쳐 시들어 있었다.


그 더운 날씨에 장미꽃이라니!

아무리 여행객을 겨냥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구걸을 숨기기 위한 장치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장미 파는 소녀들을 만났는데, 한번은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아주 어린 꼬마를 데리고 와 장미를 팔게 하여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우리의 마음이 아팠던 것은 그 꼬마의 가난 때문이 아니었다.

그 꼬마는 우리 주변에 와서 그냥 서 있을 뿐 장미를 팔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냥 근처에 있던 분수대만 바라볼 뿐, 거의 한 시간여 동안 장미를 건내지 못했다.

그러자 엄마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를 혼내더니 자전거에 태워 어디론가 사라졌던 것이다.



여관방은 의외로 깔끔하고 넓었다.

방에 들어갔는데 벽에 클림트의 <키스>가 나를 반긴다.

그 옆엔 온통 빨간색으로 차려입은 베트남 여인의 사진이 고혹적이다.


하지만, 선입견이었을까.

방에서는 사회주의의 빈곤과 단아함이 물씬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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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guyentuanhung, 출처 Pixabay


2002년 12월 21일 - 호치민에서의 하루



이튿날 아침, 호치민 시내를 둘러봤다.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호치민 시는 온통 우리나라 자동차로 가득 차 있었다.
택시, 봉고, 버스, 트럭 할 것 없이 온통 우리나라 차들이 도로를 뒤덮고 있어 우리들의 마음을 한결 편하게 해 주었다.

호치민에서 다닌 곳은 독립궁과 전쟁 유물 박물관, 벤탄 시장, 호치민 시청, 중앙우체국, 노틀담 성당 등이었다.

<독립궁>은 구 베트남의 대통령궁.
1975년 베트남이 패망하면서 월맹군에 항복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월남의 마지막 대통령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사진, 미국에 항거하며 분신하는 승려의 사진,

해방군이 소련제 탱크를 타고 바로 그 건물에 진입하는 사진 등이 인상적이었다.
영화 킬링필드가 생각났다.

<전쟁 유물 박물관>은 수많은 흑백사진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지만,

베트남의 현대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것은 곧 베트남 전쟁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거리의 수많은 걸인들을 보면서 누군가 내뱉었던 농담이 떠올랐다.
‘너네 미국놈들은 많이 도와주야겠다. 너희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잖아.’

총알이 뚫고 지나간 카메라, 살기 위해 강을 탈출하는 모녀의 애절한 눈빛, 논바닥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시신, 전차에 묶여 끌려가는 군인, 피난 풍경들, 엄마로부터 갓난아이를 떼어놓는 군인, 하수구 속의 엄마, 진지 속의 아이들, 시신의 일부를 들고 웃는 미군 병사, 네이팜탄의 후유증으로 기괴하게 태어난 아이들, 뱀을 옷 속에 집어넣어 고문하는 병사, 손톱 아래를 바늘로 찌르는 군인......사진들.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방명록을 들추었다.
언뜻 훑어보니 <양키 고홈>이라는 의미의 글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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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guyentuanhung,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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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ncegx, 출처 Unsplash


뭐니뭐니 해도 호치민시의 대표적인 인상은 오토바이 행렬이었다.
무슨 로봇들의 자동 경주처럼 그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내달렸다.
새벽에도 한밤중에도, 시내 중심지에서도 골목길에서도.
심지어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 책을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오토바이들이 사고 한번 없이 움직이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이런 이국인들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그들은 자동인형처럼 무표정하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들은 무척 바빠 보였는데, 그것이 한 느긋한 이국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하긴 단지 자동차라는 것이 다를 뿐,

우리나라도 신호등이 바뀌면 감아놓은 고무줄이 풀리듯 자동차들이 쏜살같이 달려나가지 않던가.

단지 우리가 이미 자본의 흐름을 좇아 한참을 달려와 조금 익숙해졌다면,

저들은 이제 첫발을 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조금 마음이 답답했다.
자본을 향한 저들의 바쁜 질주가

또 얼마나 많은 마음의 순수를 짓밟으며 불신과 미움과 거짓을 잉태할 것인가.
육체적 편리함이나 욕망의 달성을 위한 끝없는 경쟁이 곧 마음의 덫이 되어 삶을 얼마나 피로하게 할 것인가.
출발점에 서 있는 저들은 그 경쟁의 끝이 어떠한 지에 대해 어느 정도나 고민하고 있을까.

스쳐 지나가는 상념은 그들의 오토바이 속력만큼이나 빠르게 머리 속을 휘감았다.





거리의 벽마다 달라붙어 있던 도마뱀들도 기억난다.
바로 그 도마뱀들이 모기의 유충을 잡아먹어 도시에 모기가 적다는데.
그래서인지 정말 여행을 다니는 동안 모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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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chardX, 출처 Pixabay


인력거꾼들도 떠오른다.
깡마른 체구에 검붉은 그들을 볼 때마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소설에서는 운수가 없었는데, 저들은 정말 운수가 좋았으면 하고 바랐다.

분위기나 맛으로 보면 우리나라 한강의 유람선을 따라올 수 없겠지만,

그래도 색다른 베트남의 음식을 맛보자며 디너쇼(?)를 하는 배에 탔다.
말이 디너쇼지 그저 밥을 먹는 동안 아마추어 수준의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는 정도.

디너쇼의 마지막은 불쇼(fire show)였다.
반라(半裸)의 한 여자가 나와 불을 입에 넣었다.
불로 페인트칠하듯 온 몸을 문질러대기도 했다.

저런 위험한 짓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고 많은 일 중에 저 여자는 어쩌다 저런 직업을 택하게 되었을까.
어떤 트릭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저렇게 위험한 일을 할까.
나는 제 몸의 위험으로 돈을 버는 그녀와, 그녀를 고용해 돈을 버는 고용주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하는 여행객 모두가 불쌍해졌다.

즐겁기는커녕 안쓰러웠다.
저런 불쇼는 안 봐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타인의 위험을 담보로 즐기고 싶지 않았다.
위험하고도 슬픈 마술 때문에 조금 마음이 울적했는데

마침 무역 때문에 우리나라를 자주 왕래한다는 한 베트남인이 나와 노사연의 ‘만남’을 부르는 바람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러자 무대의 가수가 ‘아리랑’을 불러 집 떠난 여행객들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배에서 내리려는데 발치에 떨어져 있던 자그마한 배에서

앞을 못 보는 할아버지가 잠자리채같은 긴 장대를 이용해 구걸을 했다.
작은 손녀는 노를 젓고.
기막힌 구걸의 방식이 또다시 마음을 울적하게 했다.
날씨는 왜 그렇게 후덥지근한지.

배에서 내려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
꽤 늦은 밤인데도 오토바이들이 알전구에 몰려드는 불나방처럼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어느 기업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그곳으로 가는 거라고 누군가 귀뜸해 주었다.


어린 시절,

여름밤이면 우리도 저녁밥을 서둘러 먹고 영화를 보기 위해 인근 초등학교로 몰려가곤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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