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22일,23일 - 아름다운 해변 무이네
아침부터 서둘렀다.
무이네라는 휴양지를 가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무이네 투어.
원래 이번 여행은 태국에서 출발하여 베트남으로 올 예정이었다.
그래서 여행의 피로를 풀어보자고 거의 마지막 코스로 휴양지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태국행 비행기표를 구할 수 없어 베트남에서 출발하는 바람에 고생도 하기 전에 휴식부터 하게 된 셈이었다.
신카페를 출발하여(신카페는 베트남 배낭여행을 저렴하게 소개해주는 아주 유명한 여행사 이름이다) 무이네까지는 거의 예닐곱 시간이 걸렸다. 오전과 오후의 일부를 거의 버스만 탄 셈이다.
무이네로 가는 도중에 버스 앞 바퀴의 브레이크 라이닝에 고장이 생기는 바람에 한 시간쯤 지체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쁜 일상을 떠난 곳에서의 일탈이어서인지 고장난 버스마저도 견딜만 했다.
무이네로 가는 동안 내내 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한 많은 성당들이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더위 속에서 보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묘한 기분을 자아내었다.
트리는 전반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정성을 들인 느낌이었고 치장도 요란했다.
딱 한 군데 추수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대다수 논의 벼들은 그냥 폭양 아래서 무럭무럭 익어가고 있었다. 한 켠에서는 모를 심고 한 켠에서는 추수한다더니, 그러한 말들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이 길이 하노이까지 가는 유일한 도로이어서인지 길을 따라 가게들이 발달돼 있었다. 하지만 공장지대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산업은 없고 상업만 발달한 느낌. 왠지 경제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기초적인 장사에만 경제가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드디어 무이네.
드넓고 파랗던 바다가 떠오른다.
너무 강렬한 햇살로 인해 오랫동안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야자수 그늘 아래서 책을 읽던 서양 젊은이들이 떠오른다.
단순히 바다의 풍광만을 두고 말하자면, 이곳이 꼭 우리나라의 동해보다 나을 것은 없었다. 단지 이곳엔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아주 적다는 것, 그것이 다를 뿐이었다.
바닷 바람에 휘청이던 등치 큰 야자수가 떠오른다. 야자수는 슬펐다.
껀중한 키에 커다란 잎을 매달고, 커다란 열매를 간직한 채 휘청이는 모습은 몹시 힘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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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네에 도착한 날 오후,
잠시 잠시 짬을 내어 옐로우 샌둔이라는 작은 사막에 다녀왔다.
말이 사막이지 그저 너른 모래밭 정도.
바다 쪽의 모래들이 자꾸 건너편 산에 가서 쌓인다니 뭔가 환경적인 균형을 잃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옐로우 샌둔의 모래는 한없이 고왔고, 금세 제 발자국을 지우고 새 무늬를 만들던 바람의 요술이 신비하던 곳이었다.
정말 오랫동안 사막의 꿈을 꾸었는데...... 언젠가는 반드시 며칠 정도는 밤낮을 걸어야 하는 사막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그날 밤 무이네의 방갈로 카페에서 먹었던 해산물들은 정말 값싸고 풍성했다.
아마 이번 여행 중 가장 풍성한 저녁을 즐겼던 것 같다.
무이네에서 기억나는 한 사람.
아마도 인도 계통으로 보이는 가무잡잡한 중년의 사내.
무이네에 가기 직전 식당에서 만났던 그를 무이네에서 만나고
또 무이네에서 출발하여 돌아오다가 식당에서 또 만났다.
그는 혼자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늘 책을 읽거나 무언가를 썼다.
혼자여서일까.
주변의 여행객들 중에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많았는데, 여행을 생활처럼 즐기던 그 사내가 참 인상깊게 남는다.
혼자 다니는 여행의 자유로움도 느껴졌고, 저런 여행을 한다면 여럿이 함께 다니는 여행이 주지 못하는 자유로움과 깊이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이네 해변에서 고기 잡던 베트남의 어부들도 떠오른다.
그저 그물을 쳐놓고 동네 조무래기들까지 몰려들어 그물을 끄집어내는 것이 고기잡이의 전부.
한가지 특이한 것은 베트남의 전통의상 아오자이다.
아오자이는 여고생들의 교복으로도 널리 애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옷은 아무래도 일년 내내 더운 베트남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혹이라도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이 여성들로 하여금 생활의 유용함에 상관없이 그 옷을 입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보면 더워 보이고, 언뜻 보면 좀 야해 보이기도 하는 아오자이.
그 날 저녁 머리에 붉은 띠를 띤 채 오토바이를 타고 소리를 지르며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 때문에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타이거즈컵 축구대회에서 베트남이 미얀마를 이겼다는 것이었다.
축구에 대한 그들의 열정은 마치 거대한 혁명을 연상케 했다.
2002년 12월 24일 - 메콩강을 따라
호치민에서 짜우독까지 가는 길.
짜우독은 캄보디아로 건너가기 위해 임시로 머물게 된 작은 도시.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 가다가 점심 식사 후 2-30명 정도 탈 수 있는 보트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버스의 젊은 청년 가이드는 꽤 유창하게 호치민시를 영어로 소개했다.
우리 일행을 보고는
‘자신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한국 음식이 김치이며, 자신의 부인은 장동건을 아주 좋아하고, 자신은 김남주를 아주 좋아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매스컴에 소개된 대로 베트남에서 우리나라 연예인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사람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장동건과 김남주를 입에 올렸다.
가이드는 이야기 끝에 ‘나는 당신을 감사합니다.’라고 한국말로 인사해 끝내 우리를 웃겼다.
한국말을 잘 몰라서라기보다는 아마도 유머로 준비한 말처럼 보였다.
캄보디아 방향의 서쪽 길은 무이네쪽의 동편과는 달랐다.
서쪽으로 갈수록 지류가 많았고, 움막 수준의 집들이 즐비했다.
메콩강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서쪽과 달리 성당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후 내내 보트를 타고 메콩강을 따라 흘렀다.
대학교에 다닌다는 어린 여자 가이드가 우리와 함께 했는데 가무잡잡하고 작은 녀석이 어찌나 친절하게, 인상한번 찡그리지 않고 우리의 질문에 답해 주는지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다.
발음은 썩 좋지 않았지만 영어도 꽤 잘했다.
도중에 수상가옥에 들렀다.
텔레비전에서 보거나 말로만 듣던 수상가옥.
썩어가는 나무 기둥 몇 개에 의지하고 있는, 가난이 덕지덕지 묻은 집들.
하지만 그들은 덤덤하게 자신들의 삶을 영위했고 표정은 건강했다.
그들을 측은한 눈으로 보는 것은 우리의 오해다.
몇 가지 문명의 혜택을 더 받고 있다고 해서 타인의 삶을 얕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끔 손을 흔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거의 틀림없이 여행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메콩강은 길었고 우리는 조금씩 여행에 지쳐갔다.
가도가도 끝없는 황톳빛 메콩강.
그 물을 따라 간간이 이어지는 마을들.
겨우 한 두 사람 앉을 수 있을까 말까한 조그만 배들이
어둠 속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부부, 혹은 어린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나와 고기 잡는 사내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우리는 작은 갑판(?)에서 노래를 불렀다. 메콩강은 길었고 끝은 보이지 않았다. 가요와 가곡, 팝송, 찬송가, 동요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노래는 끝이 없었다.
어느새 메콩강에 어둠이 가득 차고, 별들이 반짝였다.
우리의 노래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짜우독에 도착한 것은 저녁 10시 무렵.
우리는 길거리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다가 포크를 씹는 바람에 이가 흔들렸다.
아, 변덕스런 운명이여!
하필이면 왜 베트남의 작은 도시에서, 포크를 씹을 게 뭐람.
그 날 이후로 나는 먹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채 우울한(?) 여행을 해야만 했다.
2002년 12월 25일 - 구토
크리스마스 아침.
우리는 서둘러 선착장으로 나갔다.
캄보디아 국경을 통과하는 날이었다.
도중에 수상 마을을 보고, 참족과 이슬람족 마을도 방문했다.
삶의 기반을 물 위에다 두는 수상마을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곳에 오니 오히려 수상마을 아닌 곳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언젠가 TV에서 수상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뭍에 발을 딛자 마자 멀미를 하던 모습을 봤었다.
참으로 생소한 장면이었는데 그건 뭍을 기반으로 생활하는 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물을 기반으로 살고 있는 그들에게 육지는 흔들리는 곳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가.
그게 누구든 자신이 선 곳이 중심이다는 생각을 새삼 떠올렸다.
우리는 또 보트를 타고 달렸다.
아직도 메콩강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후 세 시경이 되어서야 프놈펜에 도착했다.
캄보디아 입국 수속은 간단했다.
동네 이정표만한 비석이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구분짓는 국경의 전부였다.
남북의 분단을 무슨 손금같은 운명으로 알고 당연시했던 우리들에게 그 국경은 얼마나 허망했던지.
짐을 풀고 프놈펜 구경에 나섰다.
이튿날 새벽에 바로 앙코르 유적지가 있는 시엠립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그날 오후밖에 시간이 없었다.
왕궁과 사원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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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얼슬렝 박물관.
킬링필드 당시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곳.
크메르 루즈 정권 이전에는 중등학교였다는데, 나중에 수용소가 된 뒤 고문실이나 감옥으로 개조된 곳이었다.
1만 7000명이 수용되었는데 단 6명만이 살아 나갔다는 곳.
각종 고문도구와 살해된 사람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또 죽은 이들의 해골과 뼈들도 전시해 놓고 있었다.
한 감옥에 들어갔더니
누군가 ‘free TIBET the same thing in 2000!!! please, help us.’라는 글을 급히 벽에 휘갈겨 써 놓았다.
그 낙서를 보니 갑자기 이 일이 과거의 일이 아니고 현재 진행형의 일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티벳의 해방을 도울 것인가.
그곳을 나오면서 나는 가벼운 구토를 느꼈다.
아무리 몇 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여기저기 널려 있는 뼈와 해골들, 고문 도구들, 잔악한 살해 장면들은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날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내전을 다룬 ‘네 이웃을 사랑하라’(20세기 유럽-야만의 기록)는 책을 읽고 있다. 이 개명천지의 문명 사회에서 얼마나 비참하고 야만적 일들이 벌어지는지, 또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당황스럽다. 최고의 넌픽션이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