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꿈에 기대어
혹 잊지 않으셨는지요? 금강산을 관광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요. 부모님의 고향이 북한이었던 나는 그 짧은 순간 금강산에 다녀올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언제 관광이 멈출 지 모른다며 서둘렀는데, 예언처럼 그 예상은 적중하고 말았습니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10년이 넘었군요. 다시 그런 기회가 오긴 올런지.
이 글은 2001년에 쓰여진 것입니다.
타인의 꿈에 기대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갖는 것은 사치다,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꿈은 측은한 자기위로다,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도 역시 꿈을 가져야 했습니다.
수렁이 깊어도, 그래서 정말 누군가 나에게 오랏줄 하나 던져줄 사람 없을 것 같지 않아도,
하늘을 봐야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새벽을 꿈꾸는 것이
얼마나 많은 눈물과 탄식과 인내와 기도와 절망의 음식을 필요로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어둠을 음식 삼아, 눈물을 양식 삼아, 인내를 친구 삼아, 절망을 노래 삼아,
살아야겠습니다.
정말로 내 생전에 북녘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고 꿈꾸지 않았습니다.
내가 북녘땅을 밟게 된 것은 순전히 타인의 꿈에 기댄 바가 큽니다.
그 지난(至難)한 희망의 밧줄을 끝까지 놓지 않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나도 나의 꿈으로, 꿈을 잃은 타인들의 겨드랑이를 부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북녘에는 뿔달린 동물들이 살고 있다고 배웠습니다.
승냥이들이 사는 곳이라고 배웠습니다.
북녘땅을 밟겠다는 꿈은 불온한 꿈이었습니다.
불온하고 불가능하며 현존할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꿀 수 없는 꿈이기보다 꾸어서는 안되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나는 북녘땅을 밟았고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2001/08/11(10:23) - 공동묘지에서 만난 별똥별
새벽 3시 30분 전주 출발.
정읍에서 2시 30분에는 출발해야 했다.
한숨 잘 수 없었다.
여행에 대한 설렘보다는 전주까지 제 시각에 도착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우리는 무슨 에버랜드나 민속촌에 가는 것이 아니어서,
속초 도착 뒤 사흘에 한번씩 뜨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여분의 시간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었다.
사발시계를 두 개씩이나 맞춰 놓고 가수면(假睡眠) 상태에 있다가 새벽 2시경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상을 깨트리는 불편함 속에서도 문득문득 의식을 깨우는 '특별한 여행'의 긴장 때문이었을까.
전주로 가는 길에서 만난 풍경들도 모두 나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새벽 두 시의 라디오.
그것도 길 위에서.
라디오에선 아주 조용하고도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 나왔다.
음악도 클래식과 영화음악, 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왠지 그 시간에 듣는 디제이의 목소리는 낮에 듣는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모두 잠든 시간, 이렇게 낯선 목소리가 홀로 깨어,
나와 같이 긴장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위안의 음악을 들려준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세상이 환해 보였다.
별로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의 수고로움과 그 수고에 대한 감사.
정읍을 벗어나 한참을 달리다가 한 무더기의 오토바이 여행객들을 만났다.
새벽 3시.
무슨 반딧불이들처럼 이마에 불 하나씩을 달고 어둠을 질주해오는 오토바이들.
분명 그들은 폭주족들과는 다른 무게를 가지고 어둠을 깨트리며 어디론가 떠나갔다.
도대체 그 새벽에, 아무도 없는 산길을 왜 달려가는 것일까.
그들은 어디를 가고 있는 것일까.
기차의 객차 불빛처럼, 영화 필름처럼 연이어 달려오다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 여행객들의 고독한 레이스가 어쩐지 슬프게 느껴졌다.
불확실한 어둠을 달리는 우리네 인생을 닮은 것 같았다.
그 새벽, 그래도 나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것은 태인의 공동묘지 곁을 지날 때,
그 산 너머로 한순간 스러지던 별똥별이었다.
얼마 만에 보는 별똥별인가.
혼자 생각했다.
역시 깨어있으니 잃었던 환희도 만나는구나.
전주에서 속초로 - 허리 잘린 곳
7시간 가까이 버스를 타고 달려와 속초에 도착하다. 그리고 바로 승선하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금강산 못지 않게 북한의 해안선이 보고 싶었다.
배 위에서 북한의 윤곽을 보고 싶었다.
너무 오랫동안 금지된 장면과 금지된 감정, 그리고 커다란 단절의 협곡 때문이었을 것이다.
금강산을 보는 일은 너무 과분했다.
너무 갑자기 금강산이라는 감동과 만나면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저 어렴풋이 해안선이나마 볼 수 있다면, 그로부터 조금씩 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튼튼한 실은 오히려 헤진 헝겊을 이어주지 못할 것.
약한 실로 조금씩 찢어진 헝겊을 깁고 싶었을 것이다.
아, 나는 그 순간까지도 북한땅에 가고있는 나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게다.
나는 속초에서 북한의 장전항에 도착하기까지 갑판을 떠나지 않았다.
앉지도 않았다.
밤잠을 설치며 달려온 먼길의 피로도 잊었다.
누가 유치하다 비웃어도 이 순간만큼은 단정하고 절도있게 나 스스로를 추스르고 싶었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가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이 핸드폰이 끊기는 순간이 군사분계선을 넘는 순간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곳이 허리 잘린 곳.
잘린 허리로도 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이 민족의 슬프고도 아픈 전설의 현장을 잠시나마 확인하고 싶었다.
그 잘린 허리로 인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질병에 걸린 사람들,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
나도 순간적이나마 그 통증의 진원지를 느껴보고 싶었다.
이제 우리 모두 그 잘린 허리를 아파하기보다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무감각으로부터 이 순간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서서히 북녘땅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색 산하와 낮은 둔덕들이 왼쪽으로 펼쳐졌다.
헐벗은 야산들도 보이고 등대도 보였다.
오랜 긴장과 기대와 흥분을 자극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산하.
나는 한편으로는 실망하면서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자는 설렘과 기대의 크기를 나타내 주었고
후자는 이 땅이 남녘 땅의 연장임을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나를 안심시켰던 것은
군사분계선을 넘으면 바로 끊어져 버린다는 핸드폰이
예상과는 달리 거의 북한 땅이 보이는 곳에 갈 때까지도 의연히 건재했다는 것이다.
남한에서도 북한 땅에서도 핸드폰은 얼마든지 유효했다.
적어도 핸드폰은 '어디서나 잘 터진다'는 그 광고처럼 국토의 통일을 거의 이루어가고 있는 듯 했다.
장전항(長箭港).
활처럼 둥글고 길게 굽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장전항.
정박한 배에서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장전항을 굽어보며, 나는 새삼 분단의 현실을 생각했다.
강원도의 통일전망대가 있는 곳이 고성땅이었는데, 바로 이곳 장전항도 고성땅이었던 것이다.
결국은 전쟁으로 인해 고성땅이 둘로 나뉘어 지금도 양측에서 지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고성땅을 밟고 거대한 봉우리들이 서로 고개를 내밀며 환영하듯 우리를 반겼다.
금강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