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 다녀와4

by 모래바다


북한에서 듣는 KBS방송


마지막 날.

우리는 해금강과 삼일포를 보기 위해 하선했다.
세 번째 반복되는 번거로운 입국절차였지만 일행들을 훨씬 너그러워져 있었다.
분단도 그로 인한 불편함도 분명한 우리의 현실임을 우리 모두 빨리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누군들 하루 빨리 금강산 관광이 국내여행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인가.

세 번째 보는 온정리 길은 더 친숙했다.
부동자세의 소년병사들도 꽤 익숙해졌고 밭에서 일하는 주민들도 그랬다.
칼라가 없이 잿빛으로 내려앉은 양진마을까지도 50년대 우리의 어느 시골마을을 보는 듯 가깝게 느껴졌다.

마침 날씨가 더워서였는지 마을 앞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여전히 경제적 빈곤의 풍경으로 비춰졌으나 이 또한 서서히 우리 조국의 현실로 다가왔다.





해금강과 삼일포는 온정각에서 12㎞.

김일성이 중국에서 얻어와 심었다는 참대밭을 지나자 너른 고성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키 작은 벼에 비해 논둑마다 빽빽이 심어진 콩이 이채로웠다.

처음으로 북한의 학교들을 볼 수 있었다.
남한의 시골학교와 형태는 같으나 단지 기와를 얹은 건물이 특이했다.

그 더운 날에 운동장에서는 군인인지 고등중학생인지 분간이 안가는 청년들이

팬티만 입은 채로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키 큰 포플라 그늘 아래선 조무래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축구를 구경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시골풍경은 너무 한가로워

여기저기 큰 글씨로 새겨져 있는 자폭정신, 조국통일, 군민일치 같은 글씨들마저도 크게 이질감이 느껴지기보다는 그저 한가롭게만 보였다.

그곳은 비무장지대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라 했는데 그곳에서 듣는 남한 방송은 잠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때마침 케이비에스 라디오 뉴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었는데

혹 그게 평양방송이 아닌가 하고 귀기울여 들었다.

남강을 따라가다 보니 끊어진 다리와 폭격맞은 고성역사(驛舍)가 멀리서 보였다.
한국동란 때 너무 전투가 치열해 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월비산의 매끄러운 능선은 마음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이윽고 삼일포.

삼일포는 관동 팔경의 하나로 일찍이 영랑, 술랑, 안상랑, 남석랑등 신라의 화랑 4명이 하루만 놀자고 왔다가, 사흘을 놀다가는 바람에 이름을 얻게 된 곳이라 전해진다.


호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섰다.

다도해처럼 작은 암석들이 호수 위에 둥둥 떠있어 특이한 풍경을 자아내었다.
삼일포는 입구에서부터 <김정숙 여사 사적지>,

'민중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싼다'로 시작되는 <적기가> 등이 커다란 자연 바위에 적혀 있었다.

유홍준 교수는 그의 북한 방문기에서 남한 여행객들이 그 혁명적 글씨들로 인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실상 일행들은 크게 개의치 않고 그대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그런 구호성 문구들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기를 잊지 않았다.

관동별곡의 '단서(丹書)는 완연한데 사선(四仙)은 어데 갔는가.'라는 구절을 따라

'永郞徒南石行(영랑의 무리가 남쪽으로 가다)'라는 붉은 글씨를 찾아보고 싶었으나
빠듯한 일정 관계로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가이드의 시



삼일포에 이어 찾은 해금강은 말 그대로 '바다로 옮겨온 금강'이었다.
해금강은 만물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안개가 들쭉날쭉했다.
금강산의 날씨가 이곳까지 날아온 것인가.

맑은 날이면 고성의 통일 전망대가 보인다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 겨울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갔을 때에도 어렴풋이 이 해금강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한때 북쪽을 향해 총을 겨누며 군대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그 반대편에 와서 자신이 서 있던 쪽을 바라보는 감회란....

그 해금강에 가끔 초코파이, 돼지바 껍질, 퐁퐁 뚜껑같은 것들이 넘어 온다니,

어쩌면 인격이란 그런 무인격체들보다 더 어리석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퐁퐁 뚜껑이 넘나드는 길을 만물의 영장인 인간들이 왕래하지 못하니 말이다.
아울러 혹 남한의 소비문화가 이 금강까지 침투해 들어오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공식적인 여행은 끝났다.
여행을 한다고는 했으나 미진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북측 환경 관리원의 말에 의하면 금강산 여행터는 총 22곳인데 남측 관광객이 들르는 곳은 4군데 뿐이라 했다.

무엇보다 아쉬움으로 남았던 것은

국어 수업시간에 공부했던 관동별곡의 지명들을 금강산 맛보기 여행에서 다 만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금강대의 선학도, 정철이 금강의 여산이라며 칭송했던 진헐대도, 너무 맑아 인걸을 만들고 싶다고 했던 개심대도 만날 수 없었다. 십이폭포의 장관도, 정철의 눈에 외롭게만 보였던 망고대, 혈망봉도, 금강의 최고봉인 비로봉도 만날 수 없었다.

금강산의 일만 이천봉 중에 불과 나는 손가락을 꼽을 만한 곳을 보고 왔을 뿐인 것이다.

마지막 온정각에서 봉래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사흘동안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는,

자신이 처음 금강산 가이드 교육을 받으면서 새벽에 금강호 갑판에서 지었다는 시를 들려주었다.


통일에 관한 시였다.


애절하고 그리운 목소리.
시의 내용은 별 게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통일에 대한 간절함이 전해져왔다.

가이드는 마지막 인사로 '자신은 통일이 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설사 그것이 인사용 멘트라 해도 그 가이드의 다짐이 참 반갑고 고맙게 느껴졌다.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다


속초에서 전주로 오는 길. 때마침 남한은 여름휴가로 모든 길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미시령을 넘어 강원도를 빠져 나오는 데만 4시간 이상이 걸렸다.
모두 잠든 차에서 혼자 북한의 까만 밤을 떠올렸다.

전력난 탓인지 밤 9시가 되었는데 촛불을 켠 듯 희미한 주택들이 생각났다.
남한은 차가 많아 주차하기가 어렵겠다는 북한측 환경관리원의 말도 떠올랐다.

북한에 다녀온 첫 인상은 슬픔이었다.
경제적 빈곤이 곧 불행은 아니었을 것이다.
경제적 부요가 곧 행복이 아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경제적 빈곤이 찬 바람처럼 확 느껴지는 북한의 풍경은 마음 아팠다.

여행을 하면서 좀 아쉬웠던 점은 아직도 북측에 대해 이유없이 욕을 하거나, 무시하거나, 선입견을 가지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수 십년동안 차단된 정보로 인해 닫혀있던 정보가 그렇게 만든 것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금강산 관광이 통일의 작은 초석이 되리라 확실히 믿는다.




금강산 여행을 갔다 온 지 며칠 후, 나는 뜻밖에도 김정일 위원장과 평양시내를 걸어다니는 꿈을 꾸었다.

함께 식사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복권을 사야한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 꿈을 꾸고 난 후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많다나.


어쨌든 좋은 일이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나의 아버지는 고향이 황해도 은율이다.

나의 어머니는 고향이 황해도 송화이다.

어머니는 늘 북한에서 넘어왔다는 것을 숨기려 했으며

어디서든 북한과 관련된 말을 조심하라고 일렀다.


부친은 딱 1주일만 있다 돌아가려고 생각했는데

수십년째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늘 탄식하다가 돌아가셨고

딸만 셋인 집에 8년만에 아들로 태어났던 나의 외삼촌과

나와 16년 터울지는, 얼굴도 모르는 큰 형은 피난 오는 과정에서 죽었다.


나의 어머니는 지금도 그 상처들을 안고 살아 계신다.

하루빨리 육로 여행길이 열려, 좀더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처럼 서랍 깊이 잠자고 있던 글들을 꺼내 읽는다.

바로 그때 여행을 가지 못하면 다시는 금강산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서둘렀던 여행.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금강산 관광이 금지된 지 벌써 12년 정도 된 듯 하다.

그 사이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북미관계는 지지부진하다. 모든 것이 안타깝다.

앞으로 12년이 지나면, 남북 사이에는 어떤 상황이 전개되고 있을 지 궁금하다.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저 가녀린 꿈 하나로 사이좋은 민족이 되는 날을 기대해볼 뿐이다.

지금은 2020년 11월 8일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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