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백두산에 갔다.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었다.
백두산에 가기로 했다. 한번은 가보고 싶었다.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여행이 조금은 고생스러워야 한다는 치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였던가. 겨우 정읍을 떠났을 뿐인데, 기후는 우리 편이 아니었다.아랫녘에서는 장마가 끝나고 있었는데,고속도로를 타고 인천에 다가갈수록 폭포같은 장맛비가 내렸다. 장맛비가 북상하고 있다고 했을 때, 설마 장마가 우리의 길을 그렇게 집요하게 따라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2004년 7월 16일 오후 5시경 인천 출발.
인천에서 배를 타고 단동으로 갔다. 17시간을 뱃속에서 뒹굴었다. 생전 처음으로 침대칸에 탔지만, 거의 닭장 수준이어서 우스웠다. 서해바다이어서인지 다행히 파도는 높지 않았다. 닭장 속에서 에머슨의 에세이들을 읽었다. 여행 중에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17시간을 그냥 맹숭맹숭 보내기는 쉽지 않았다. 손님의 대부분은 보따리 장사들이었으며,여름방학이어서인지 백두산에 가는 젊은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거기에서 만난 보따리 장사들은(베테랑으로 보이는) 초보 여행자들이 귀여워 보였는지(?) 중국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중국에서 입국할 때 깨나 참기름 같은 농산물을 들어다 주면, 몇 만원 벌 수 있다며 이른바 따이공(1인당 들여올 수 있는 농산물의 한계 때문에 대신 물건을 들어다 주는 일)을 권했다.
배에서 바라본 인천항.
7월 17일 오전 11시경 단동 도착.
중국에 도착해 배에서 바라본 단동항.
붉고 큰 글씨가 인상적인데 여행하는 내내
중국 사람들이 간판을 아주 크게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회색의 단동항은 컴컴하고 지저분해서 우울한 느낌을 주었다.
단동항에 민박을 정하고 가장 먼저 간 곳이 압록강 철교였다.
배경은 한국 전쟁 때 미군의 폭격에 의해 끊어진 다리.
사진은 바로 폭격 받은 부위.
버스 한 대가 신의주로 넘어가고 있었다.
머쓱했다.
우리는 갈 수 없는 길. 제길헐.
새벽, 민박집에서 굉음에 잠을 깼는데
그게 바로 신의주로 넘어가는 기차 소리라고 민박집 주인이 일러 주었다.
단동 강가에서는 유람선이 강을 한 바퀴 휘 돌아오는 관광 상품으로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주민(군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을만큼 북한 가까이 다가간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그 유람선을 탔다.
아래는 유람선에 타고서 조심스레 찍은 사진들.
금강산에 갔을 때에도 느꼈던 거지만,
한 눈에 그들의 빈곤이 드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표정했다.
무슨 정물화처럼 잘 움직이지도 않았다.
민박집에서 두 사내를 만났다.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두 달 째 단동에 와 있다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중국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책에서 읽을 수 없는 생생한 지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표정도 말투도 교양 있어 보였다.
하지만 늦은 밤,
만취하여 들어온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민박집 아줌마를 괴롭혔다.
투숙한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마구 욕을 해댔다.
결국 아줌마는 밤새 그 사내와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아줌마와의 대화였기 때문이다.
그는 외로운 거라고 우리 모두 생각했다.
다른 한 사내는 북한 무역을 한다는 사내였다.
소주를 큰 잔에 부어 꿀꺽꿀꺽 마신 그는, 북한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들을 들려 주었다.
썩 신뢰가 가지 않는 정보들을 과시하듯 떠벌였다.
(용천 돕기 물품은 전부 전달되지 못하고 신의주 창고에 쌓여있다. 한국이나 미국 상표가 붙은 물건들은 무조건 전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물건들은 통관과 관련한 간부들이 전부 가져간다. 그러므로 밀가루나 쌀로 바꾸어 도와줘야 한다. 이것을 가로채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 우리 방에 따라 들어와, 몇 대의 담배를 마구 피워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도 외로운 거라고 우리 모두 생각했다.
2004년 7월 17일 민박집에서 하루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