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동 일기17
퇴직 후 처음으로 읽은 책이 김훈의 '남한산성'이었다. 그의 문체를 찬찬히 살펴보고 싶었다. 짧고 냉정하고 적확한 문체가 잘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수백 번 한숨을 쉬며 읽었는데, 소설의 압권은 오히려 소설이 다 끝난 뒤 등장했다. '못 다 한 말'이라는 소제목으로 쓰여진 3-40페이지의 글은 당시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몇 번을 몸서리치며 이 부분을 읽었다. 소설이 아니라 역사적인 묘사여서 더욱 그랬다. 굵은 역사 뒤에 숨겨진 디테일한 이야기들이 김훈의 비장하고 차가운 문체에 서릿발처럼 담겨 있었다.
그런데 더 오래 뇌리에 남은 부분은 따로 있다. 우리나라의 임금이 청나라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늙은 신하 셋에게 청나라에 보낼 문서를 쓰게 하는 대목이었다. 셋 중 하나인 정육품 수찬은 임금에게 자신이 국서, 즉 외교문서를 쓸 능력이 없음을 알리는 상소문을 올린다.
신(臣)은 어려서 공맹(孔孟)과 퇴율(退栗)을 읽었으나 먼 말류를 더듬었고, 나이 들어서는 성은(聖恩)으로 출사(出仕)하여 어두운 두메에서 목민(牧民)하였으나 아무런 치적이 없었나이다. 공(功) 없이 늙어가는 천한 몸에 병까지 깊어서 할 일 없이 성 안에 들어와 곡식을 축내며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몸 안에 물기가 다 말라서 살갗이 비듬으로 부서져 흩어지고, 물을 자꾸 마셔도 이내 오줌으로 다 나와서 몸 안에 머물지 못하옵니다. 음식을 보아도 입안이 말라서 침이 고이지 않는데, 잠잘 때는 공연히 침이 흘러나와 베개를 적시니 추악하옵고, 울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데 웃을 때는 겨우 눈물이 나오니 괴이하옵니다.
또 가끔씩 자다가 아래가 저절로 열리고 대소변이 새어나와 더러운 거름 위에 뒹굴고 있으니 어찌 국서(國書)를 적을 수 있으며, 어찌 어전에 나갈 수 있겠나이까. 며칠 전에는 성첩을 살피러 올라갔다가 빙판에 넘어지면서 인사불성이 되어 들것에 실려 내려왔사온데, 그 뒤로 눈이 핑핑 돌고 오장에서 화기가 들끓어 앉도 서도 못하며 밤낮으로 망령이 보여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주절대고 있나이다.
정신이 혼미하고 몸이 아득해서 이미 문자를 다 잊어버렸고, 서책을 덮은 지 오래되어 장구(章句)를 엮어낼 도리가 없사옵니다. 더구나 빙판에서 넘어질 때 오른쪽 어깨를 삐어서 밥 숟가락조차 들기가 어렵나이다. 신의 더럽고 잔약한 육신을 불쌍히 여기시어 국서를 지으시라 하시는 분부를 거두어 주시고, 어명을 받들지 못하는 죄를 따로 다스려 주소서. 신의 몸에 내리시는 벌조차도 성은일 텐데 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임금이 늙은 신하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을 강제로 떠맡기는 모습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하 중 하나가 자신의 질병을 호소하는 장면에선 언젠가 나에게 닥칠 질병의 섬세한 묘사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노화가 이런 것이었다니. 이 대목을 읽은 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노화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한참 지나자, 한줌의 평화가 찾아 들었다. 늙음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내 힘으로 뭔가 극복해낼 수 있다고 애썼던 수많은 날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당연히 어떤 부분은 노력해야겠지만, 어떤 부분은 그냥 받아들임으로 평안에 이를 수 있다. 노인들에게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라는 유튜버들의 충고에 전전긍긍하지 않겠다. 그냥 애쓰지 않고 운명에 순응하면서 온힘을 빼고 노화를 맞으리라. 안되는 것을 되는 것처럼 헛된 희망을 선전하는 헛똑똑이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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