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동 일기15
오래 전 일이어요.
20대 후반, 뜨겁지만 혼란스런 사랑 고백을 했죠.
애매함이 묻은 거절의 언어를 듣고
생활을 추스르느라 힘들었어요.
강원도의 바다가 보이는 어느 한적한 기도원에 들어가 청소나 하며 한평생을 살아볼까,
소설가 박상륭처럼 외국의 어느 장례식장에 취직해 시체나 태우면서 남은 인생을 살아볼까,
생각도 했었지요.
그냥 스르르 이 세상에서 사라져 없어졌으면 바랐어요.
생활은 무너지고, 정신도 너덜너덜,
가장 먼저 먹는 일과 자는 일이 힘들더군요.
가슴에서 이따금 쿵 무언가가 떨어지고,
살갗은 둔감해지고, 머릿속은 콘크리트를 들이부은 듯,
그 즈음 직장에서 강원도 평창으로 이른바 엠티라는 것을 갔습니다.
내 고백의 대상이었던 그녀도 함께였죠.
고스톱과 술로 밤은 깊어가고, 나는 홀로 밖에 나와 평상에 누웠습니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녀를 마주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평창의 별은 남달랐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별이 쏟아진다’는 유행가의 가사를 실감했어요.
까만 어둠 속에서
마치 장난감처럼 별들이 바로 눈앞에 내려와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였어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별들을 만나진 못했습니다.
이튿날 새벽, 모두 잠든 새벽을 깨우며 혼자 산에 올랐습니다.
그때였어요.
조그만 냇가 옆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았지요.
마치 민들레 씨앗처럼 풀잎 꼭대기에 이슬이 맺혀 있었어요.
당연히 굴러 떨어져야 할 이슬은 뾰족한 풀잎 위에서 묘기를 부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 순간,
거절의 아픔으로 아리던 내 마음이 조금 평안해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런 종류의 기이한 자연 현상이 어떻게 사랑의 쓰라림으로 할퀴어진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는지요.
그 표면장력의 완강함으로, 중력에 대한 강한 저항으로
풀잎 끝에 맺혀 태양을 맞이하던 그 이슬의 위로가 주는 신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신비한 체험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삶은 다른 방식으로 나를 자꾸 밀쳤습니다.
연속되는 빚 보증 사고에 치여 어쩔 줄 몰라하다가 미친듯이 산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
소나무의, 그 상처투성이의 피부들이 또 그때처럼 어떤 위안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심지어 한밤중에도
산에 오를 때마다 나무들의 그 거친 피부들을 만지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지요.
맞아요, 그건 두려움이나 불안감보다는 외로움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그 순간,
무언가 위로가 되지 않았다면, 무언가 힘이 되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내 스스로 위로를 요청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는, 인간이 일부러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위로가 있다고 믿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단한 퇴근길에 먼 산 위에서 붉게 흩어지는 노을의 위로를 무시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너무 흔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지나칠 뿐이지요.
옥상을 비추는 조각달의 희부연 입김, 해동하는 대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봄비의 위무, 산길을 가로막는 안개의 깊은 한숨, 지구를 뒤흔드는 성난 태풍의 분노조차도 삶의 위안이 되는 이 신비를, 자주자주 만나고 싶어요.
종종 어떤 호모 사피엔스가 동굴 앞에서 세찬 비바람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아마도 그즈음부터 인간과 자연은 서로에게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위로도 건네는 애증의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근래 들어 자기 중심적인 인간들이 자연을 함부로 대하고 있긴 하지만, 서로 관계가 틀어지기에는 둘이 함께 지냈던 세월이 너무 길어서요. 생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이미 존재했던 관계잖아요.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난치병에 걸린 이들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 치료를 시작하는 것도요. 비가 내리거나 눈보라가 칠 때, 무지개를 보거나 하늘의 구름들을 볼 때, 바람을 맞거나 숲속 같은 곳에 들어갈 때, 마음에 스며드는 그윽한 고양감(高陽感)같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해요. 인생이 힘들 때, 자연을 떠올리는 것은 그 역사가 수십 억년은 되는 옵션이니까요, 순간순간 우리의 인생 설계에 자연이 함께였으면 좋겠어요. 작은 풀 한포기, 한 줌 흙도 괜찮겠지요.
#자연#거절#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