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스냅사진 : 엄마의 수박 나물

by 심시현


“엄마를 이장해라”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히 하셨지만, 나는 그제야 아버지의 이혼이 이해가 되었다. 여동생에게 그런 말을 하자 동생은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투로 대답했다.


장성해 결혼까지 한 아들이 새엄마와 불화하자 아버지는 나와 여동생의 반대에 아랑곳없이 깜짝 놀랄 만큼 빠르게 결단하고, 그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새엄마가 원하는 액수의 위자료를 건네고는 법률적 이혼 과정까지 마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동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효도 이기라도 하듯, 아버지를 호국원에 모시는 날에 맞춰 엄마의 산소를 파묘하고 화장을 해서 한 날 한 시에 같이 모셨다.

아버지는 이제 원하시던 대로 영원한 시간 엄마와 함께였다.


안치함 안에 가지런히 놓은 사진 속 엄마는 곱디고웠다.

아빠, 되셨죠.... 이제 엄마 옆에서 편히 쉬세요... 봄이었다.

아빠는, 돌아가셨지만 돌아가시지 않고 내내 아빠의 가슴속에서 살던 엄마와 함께 내가 손 닿을 수 없는 그곳에서 봄을 맞이할 게 분명했다.

나의 봄이 있었다.

햇살은 아우성치듯 쏟아지지만 사위는 한 밤처럼 고요할 때, 어지러운 식탁을 치우다 말고 의자에 걸터앉아 내 의식의 끈을 함부로 놓아버릴 때, 손길 가지 않던 오래된 물건 속에서 툭- 떨어진 어린 시절의 사진, 이제는 낯선 젊은 엄마 아빠, 양 갈래 머리의 내가 그 사진 속에서 나를 바라볼 때, 그럴 때면 아무 맥락 없이 그 한 봄날이 떠올랐다. 그 봄 어디쯤 하얀 접시에 담긴 연둣빛 나물이 있다.

엄마의 일상복은 한복이었다.

치마의 뒷자락을 앞으로 잡아당겨 끈으로 허리를 묶은 한복은 어느 한 곳 불편함 없이 날랜 평상복이고 작업복이었다. 그렇게 한복을 입은 엄마는, 우리가 우걱우걱 베먹은 반달 모양의 수박 껍질을 부엌칼을 들고 사과 껍질 깎듯 깎아냈다. 껍질 안쪽의 빨간 과육과 바깥쪽 검은 줄무늬의 진초록 껍질이 벗겨진 수박은 연둣빛 속살로 양푼 가득 담기곤 했다.

그다음을 보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나는 늘 거기까지만 보았다. 대청마루에 식구들이 둘러앉아 수박을 먹고 나면 식구들은 온통 수박 물인 입가와 손을 씻기 위해 수돗가로 갔다. 수돗가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어느 결엔가 커다란 양푼을 갖다 놓고 수박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엄마는 부엌으로 가서 그 수박속살에 어떤 마술을 부렸을까?

수박 속살은 어느 결 수박 나물이 되어 저녁상에 올라 왔다.

나는 왜 부엌으로 따라 들어가 속살이 나물이 되는 과정을 안 보았을까... 여름이 되면 엄마의 수박 나물을 흉내라도 내보려고 몇 번씩이나 시도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엄마의 수박 나물은 간질간질한 맛이었다.

그 맛이 아직도 내 혀 끝에 있다.

복숭아처럼 부드럽고 젤리처럼 매끄러우면서도 아삭아삭 씹히던 나물, 유난히 수박 나물을 좋아하는 내 앞으로 엄마는 접시를 밀어놓았고, 나는 다른 찬은 보지도 않은 채, 접시가 비워질 때까지 밥보다 수박 나물을 더 많이 먹었다.

양껏 입에 넣은 수박 나물의 달콤한 향과 맛이 입 안 가득 퍼지던 날들....


한복 자태가 고왔던 엄마, 양푼에 담기던 수박 속살들, 맑은 연둣빛 수박 나물, 그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주던 엄마의 손길... 그것은 내 인생의 가장 화창한 봄날을 찍은 한 장의 스냅사진이다.

아빠가 재혼을 하시고, 새엄마에게 수박 나물을 해달라고 하자, 새엄마는, 무슨 수박으로 나물을 해 먹어? 먹을 게 없어서 수박껍데기를 먹니? 했다.

그 이후로는 수박 나물을 떠올리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더 이상 수박 나물을 먹을 수 없었던 것처럼 봄도 돌아오지 않았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길고 지루하고 추운 겨울, 엄마의 부재는 그런 시간이었다.

새엄마는 수박 나물은 물론 손이 많이 가는 나물반찬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수입을 새엄마에게 맡기지 않았다. 들어오는 월세를 새엄마가 받게 하고, 때 되면 당시에는 드문 밍크코트나 보석을 선물하기도 했지만, 살림 전부를 맡기지는 않았다.

부동산 투자가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다. 주위에 있던 친척들이 너도 나도 동부이촌동이나 강남에 투자를 하며 아버지에게 채근하듯 권했지만, 아버지는 꿈쩍도 안 했다. 친척들은 왜 돈을 굴리지 않냐며 안타까워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투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아빠는 매일 칼날 위에서 살았다. 아빠가 재산을 잃거나 무너지면 너희들이 어떻게 될까 평생 그 생각뿐이었다.

고관절 수술을 하고 한 동안 우리 집에서 머무르시던 때였다.

나는 신데렐라나 콩쥐팥쥐는 이야기일 뿐 세상 모든 아버지가 다 우리 아빠 같은 줄 알았다.

우리 아빠는 세상에 없는 아버지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막내는 아빠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아빠는 그런 막내를 데리고 출근을 하셨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의 잠자리를 살피시고, 엄마 없는 티가 날까, 우리의 교복과 신발까지 챙기시던 분, 같은 시기 대학을 다닌 나와 동생의 등록금을 기일이 시작되기도 전에 납부하시는, 아빠는 그런 분이셨다.


재혼을 하신 후 우리를 향한 살뜰함은 어쩔 수 없이 새엄마와 갈등의 요소가 되었다. 새엄마는 자주 보따리를 쌌던 것 같다. 너무 철이 없어서 그때는 몰랐었다. 아빠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아빠에게 수박 나물 이야기를 했다. 몇 번 해봤는데, 나는 잘 안 되더라... 수박 나물을 하기 위해 수박을 사 와 다시 해 봤지만, 역시 그 맛이 아니었다.


니 엄마는 손끝이 야물어서 뭘 해도 맛있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나는 걸까? 상추에 싸 먹던 꽁치조림, 달콤하면서도 쫄깃했던 무말랭이, 젓가락으로 잘 안 집어져 아예 숟가락으로 퍼먹던 윤기 나는 콩자반...

스냅사진을 다시 펼쳐본다. 내 인생 가장 깊고 환한 오직 한 봄날, 한복을 입은 엄마가 있고, 퇴근길 항상 우리의 군것질거리를 들고 오시던 아빠가 있다. 넓은 원형 밥상에 차려진 엄마의 찬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여동생이 새엄마와 통화를 했다고 전화를 했다.

-니 아빠는 나한테 한 번도 속을 내보인 적이 없어. 나는 평생 니 아빠 월급이 얼만지도 모른 체 살았다.

오래전 들은 말인데도 잊히지 않는다. 새엄마는 원하던 대로 여행도 하고 종교활동도 자유롭게 하는 것 같았다. 새엄마가 이해되는 것은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뜻 같다.


짧은 봄이었다. 그래서 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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