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드라마라 한다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아마도 2,30대가 아닐까? 그게 가장 무리 없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실제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도 대부분 그 세대이다.
‘마더’나 ‘죽여주는 여자’같이 노년이 주인공인 영화도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마더’류의 영화는 특별해진다.
청년 세대의 고민과 아픔에 전 세대가 공감하고, 가장 너그럽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 역시 그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성공이 주인공에게 달렸듯이, 좋은 세상을 이루고, 인류가 발전하는 것이 청년세대에 달렸음은 언제나 정답이다.
주인공만 있는 드라마는 없다.
10대나 그 보다 더 어린 세대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내 가방 안에 비스킷이 있다면 봉지 채 주고 싶고, 투정을 부리면 받아주고 싶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하는 그들은 분명 빛나는 조연이다.
30대 후반부터 40대를 중년이라 한다. 중년을 세상의 허리라고 하더라. 허리가 온전치 못하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허리는 그만큼 중요하다. 3,40대는 삶의 클라이맥스다.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노력에 따른 성취를 이제 거두고, 그 성취를 누리며, 아직은 한 번 더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에 클라이맥스다.
이들에게서 나오는 힘으로 인해 세상은 진화하거나 혹은 퇴보하며, 한 장이 닫히기도 새로운 장이 열리기도 한다
클라이맥스를 지나면 대단원이다. 연극이라면 배우들은 무대 뒤에서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거나 가방을 꾸릴 것이다. 소설이라면 독자는 대단원에 대한 흥미보다는 클라이맥스의 여운을 좀 더 느끼기 위해 긴장을 풀어놓고 읽을 부분이다.
장년(長年)은 그런 세대다.
주인공은 결코 아니고, 주목받는 조연도 아니고,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있는 병풍 같은 배역...
보잘것없는 배역에 영화가 친절할 리 없는 것처럼, 세상은 장년의 세대에 친절하지 않다. 청년이 많은 카페나 식당에서, 연령제한이 없는 취업에서, 무례한 청년 앞에서, 이 세대는 미안함으로 답한다. 늙어서 미안해...
한 때는 전부였던 것 같은 사랑, 정성과 힘을 다한 아이들, ‘나’를 값으로 치르면서 가꿔 온 가정... 이 모든 것들이 날짜 지난 신문처럼 다가온다.
가뜩이나 불친절한 세상에서 온전히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마저 온통 불친절할 때, 지나 온 시간이 사라진 것처럼 텅 비어있는 ‘나’와 마주한다.
장년의 그림은 모색으로 가득하다.
고맙게도 나라에서는 ‘신중년’이라는 새 이름을 붙여 주고, 요리조리 살펴 여러 통계를 내준다.
신중년이 가장 바라는 것은?
혹은 신중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문항들이다.
대답의 1위는 요지부동 ‘일자리’다.
신중년은 새로운 일을 원합니까? 하는 질문에는 65%가 그렇다고 대답했단다.
역시 1위다.
이들이 가장 큰 바람이 새로운 사랑도, 안락한 노후도, 자녀의 성공도 아닌 ‘일자리’라는 것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일은 삶을 위한 도구였다. 도구이기에 새로운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고, 가끔은 손에서 놓을 수도 있었다. 세상은 집중할 것이 많기도 했다. 사랑, 우정, 신념, 비전... 그래서 일은 때마다 뒤로 밀렸다,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장년의 날에는 세상에 집중할 것이 많지 않다. 세상은 ‘내’ 게 간절하지 않고 나 역시 세상에 간절함이 없다. 예전에 의미 있던 것들의 의미는 옅어지고 내 존재 역시 옅어진다.
매일매일 옅어지고 희미해지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는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부모의 무게는 더 가벼워서 아이들은 주거에서 독립하듯 모든 판단과 결정에서도 독립한다. 장년의 부모는 가만히 있으면 고마운 존재다.
자랑할 것이 약 밖에 없는 친구들도 귀찮다. 세상은 TV 수상기 안에 존재한다.
세상으로부터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심지어는 추억으로부터도 소외되는 때.
그때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 유일한 대상, 일이었다.
일은 흐르지 못하고 갇혀서 탁하게 변해가는 시간에 물꼬를 내 흐르게 한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거실 한편에 정물처럼 놓여있는 산세베리아가 새 잎을 피우며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나는 희미하지 않고 뚜렷하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잘 보인다.
그 일은 무엇이라도 좋다.
강의여도 지게차 운전이어도 청소여도 동화구연이나 돌봄이어도 일은 최후의 병사, 최후의 친구다.
힘드시죠? 지게차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그는 예전에 방송국에서 촬영감독을 했다고 한다.
“아뇨, 굉장히 좋아요! 힘든 건 일하지 않는 거였지 “
남아 있는 한 가지 바람,
생명 있는 날까지 일하게 하소서. 일 할 수 있는 날까지만 생명을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