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고삐 잡기

by 심시현

펼쳐놓은 책 위로 기어가는 것은 분명 머릿니였다.

내가 놀란 소리를 내거나 큰 액션을 하면 교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는 선이가 당할 놀림이 먼저 떠올라 머뭇거리는 사이,

머릿니는 보이지 않았다.


3개월쯤 뒤, 행정직 선생님이 선이가 시골 고모네로 가게 됐다는 말을 전했다.


다섯 식구 중 유일하게 정상인에 속하는 선이를 위해 주민센터와 아동보호센터가 나서 결정한 최선의 길이라고 했다.


그 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배시시 웃던 선이를 볼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센터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친 지 10년이 넘어간다.


센터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사회적 취약계층 아이들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이 너무 시끄러워서 수업을 하기 어려우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면접 때 받은 센터장의 질문이었다.


강사 채용이 결정된 후 다시 만나자

그는 뒤늦게 진실을 털어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사실 아이들이 굉장히 말을 안 들어요. 선생님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세요.”

선이는 좀 더 심한 편이라 하겠지만, 다른 아이들의 상황도 이 사회 평범한(?) 또래들과는 많이 달랐다.


편부나 편모 아래서 늦게 들어오는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하는 아이, 아버지의 폭력이 매일매일의 공포인 아이, 교재로 사용하는 책을 사주지 않는 게 아무렇지 않은 부모,

센터로 와서 나라에 뭐 맡겨놓은 것처럼

큰 소리로 항의하고 요구하는 부모, 그리고 몇 년 전부터 갑자기 밀려오는 다문화 아이들까지....


아이들은 학력이 많이 떨어졌고, 무례했고 툭하면 싸웠고 잘 울었다

센터장은 버틴다고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버팀’이 필요 없어졌다. ‘함께’ 시간이 흘러갔다.

연말이면 섭섭함 반 기쁨 반으로 졸업하는 아이들을 보내고 또 새로운 아이들을 맞이했다.

새로 들어온 학생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특성은 나에게 이미 개성이 되어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길게 놓인 데크가 운치 있는 조류 생태 공원이 있다.

공원 앞 쪽으로 노란색과 분홍색으로 페인트 된 앙증맞은 초등학교가 있다.

흡사 유치원 같은 학교는 공립이지만,

이 도시에서는 다 아는 '잘 나가는’ 초등학교다.

그런 학교답게 방과 후 학교 앞은 ‘잘 나가는’ 차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나는 주도로가 막힐 때면 돌아서 가는 코스가 되는 그 학교 앞을 통과하곤 했다.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는 감정인데

정작 나의 인식 안에는 들어오지 못한 것들이 있다. 어느 날 그 감정과 마주했을 때

나는 처음 본 것인 양 당황스럽다.

그것이 내가 아는 ‘나’와 이질적이면 이질적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날 그랬다.


시속 30km를 유지해야 하는 도로에 노란색 학원버스와 승용차들이 뒤섞여 정차되어 있었고, 여기저기서 클랙슨 소리가 요란했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차 안에서 멀거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 건물만큼이나 앙증맞은 아이들이 콩콩대고 뛰어나와 저마다 학원버스나 승용차에 올랐다.

그 몸짓이 놀랄 만큼 자연스러운데

더 놀라운 것은 나였다.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몹시 불편했다. 인형처럼 예쁘고 귀한 아이들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뭐지?


되짚어 보니, 이 학교 앞을 지날 때면 항상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부모의 혜택을 듬뿍 받아 어린 나이에 해외연수를 가고 고액 수강료의 스포츠나 악기를 배우는 아이들,

세상에 상처라는 게 뭐지 하는 귀공자 같은 아이들을 볼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왜?


불편함의 외피를 벗겨내니, 뒤섞여 있는 약간의 슬픔, 약간의 회의, 약간의 분노...

언제부턴가 센터의 아이들이 고 또래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잣대가 되어 있었다.


내가 마음으로부터 지지를 보내는 아이들은 센터 아이들이나 그 보다 더 힘든 아이들이고- 거의 본 적이 없다-

그 이상의 아이들은...


내가 멈출 수 없고, 절제할 수 없고, 방향을 가리킬 수도 없다면 그것을 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애꿎은 아이들을 부정할 때,

내게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을 괜스레 싫어할 때, 그만 생각하고 싶은 사람이, 혹은 일이 꾸역꾸역 생각의 틈새를 비집고 올라올 때, 욕심내지 말아야 할 것에 욕심이 갈 때,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할 때,


그런 때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내 것이었던 때보다는 내 것이 아니었던 때가 더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

네 감정에 솔직해!

이 보다 멋지고 자유로운 말은 없다.

그래서 늘 꿈꾼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의 삶을.


하루 종일 빈둥거리고 싶다. 온종일 강물에 취해있고 싶다. 길음 시장에 가서 부침개를 먹고 싶다. 비 오는 거리를 맨 발로 걷고 싶다. 집에 있는 집기를 다 버리고 싶다, 내 소리가 공명될 만큼.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다....


마음은 위험하다. 내 것이 아닌데도 나와 분리되지 않는다.

남은 선택은, 마음의 고삐를 잘 잡고 있기.

그것뿐이다, 때로는 다독이고 때로는 힘을 줘 당기면서.


앞에 가던 흰색 승용차가 비상등을 깜박이며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내리더니 교문 쪽을 향하여 소리를 치며 손짓을 한다. 이내 긴 머리를 찰랑이며 여자아이가 뛰어 와 차에 오른다.

손에는 백팩과 신발주머니 바이올린 케이스까지 짐이 가득하지만, 뛰는 모습은 폴짝폴짝 경쾌하기만 하다.


나는 내 마음을, 거기 매어있는 고삐를 바싹 당긴다.


센터의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처럼 저 아이도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그렇게 보니 또 정말 사랑스럽다.

고삐는 팽팽하다.

나는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비 오는 거리를 맨발로 걷지도 않고,

집안의 집기를 버리지 않고,

시계를 외면하지 않는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장년은 무엇으로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