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단순하게 보면 참 쉬운 말씀 같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 더 하다 보면 이상한 지점에, 혹은 감당이 안 되는, 에 도달하게 된다.
‘즐겨 내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크기가 같다면 즐겨 내기는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가 훨씬 수월하다.
7절 앞의 6절 말씀은 더 치명적이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
부자는 많이 심을 수 있으니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적게 심으니 계속 가난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데에 부자는 빈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고지에 있다, 마치 타고난 금수저가 세상살이의 유리한 지점을 일찌감치 선점한 것처럼.
이런 논리는 성경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임을 모두가 안다.
그러면 헌금의 절대액이 아니라 상대액이 중요하다는 말씀 일까도 싶다. 예수께서도 두 랩돈 헌금한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체를 드린 것이라며 칭찬하신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헌금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내 수준에서 어느 정도가 ‘즐겨 내기’일까? 혹은 예수께서 칭찬하실 '두 랩돈'일까...?
아무 의미 없는 금액을 종교적 행위로 드리기도 하고, 헌금봉투를 들고는 정말 마음을 다한 금액일까 자문하기도 한다. 때로는 분수를 넘어서는 액수를 드리며 내가 이성을 잃고 종교적 맹신에 빠진 건 아닐까 염려하기도 한다.
부족한 액수의 헌금일 때는 마음이 힘들고, 만족한 액수의 헌금을 드릴 때는 생활이 힘들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내 헌금을 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 확신하거나 내가 기뻤던 적은 드물었음이 확실하다.
어떤 목사님은 십일조와 다른 명목 헌금들까지 해서 한 달에 십의 2조를 드리면 적당하다고 하더라.
나머지 십의 8조로 생활이 불가능하면...? 그래서 드리지 못했다면 생활이 가능해서 십의 2조를 드린 이보다 적게 거두게 될까?
헌금의 목적이 꼭 '거둠'에 있는 것은 아님으로 적게 거두는 것에 연연하지 않더라도 적게 드리는 마음까지 편할 수는 없다
십일조를 드려도 또 주일헌금을 드려야 할까? 교회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그 각양각색의 헌금봉투, 제목도 다양한 특별헌금, 구역 헌금, 그리고 교회 모임마다 붙은 회비들. 그 모든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걸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조차 소외된다는 불가능한 결론을 맞이해야 한다.
종교적 현학과 감동을 걷어내면 헌금에 대한 설교는 하나로 요약된다.
다다익선. 구체적이고 적용이 용이한 헌금 설교를 들은 기억이 사실 없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젊은 목사님의 설교 동영상을 받았다. 이름이 그리 회자되지 않는 패기 넘치는 목사님은 십일조가 아니라고 했다. 구약의 모든 종교적 행위가 예수의 오심으로 파해진 것처럼 십일조 역시 그렇다고 했다.
오래전, 내 전도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후배가 자신의 헌금 방식을 이야기했다.
월급을 타면 십일조에 해당하는 금액을 뗀단다. 그리고 그 금액을 감사헌금 건축헌금 구제헌금 십일조 등 그 교회에 있는 각각의 헌금봉투에 나누어서 드린다고 했다.
- 이렇게 드리면 십일조 하는 거야 안 하는 거 야?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정말 모르겠다.
수는 막내의 친구 엄마다. 큰 키에 웃음이 호탕한 그녀는 늘 시원시원해서 예뻤다. 그녀가 어느 날 고백하듯 말했다.
-어릴 때 교회를 다녔어. 교회 가면 재미있고 좋았어. 그래서 갔는데, 얼마 지나니까 주일학교 선생님이 헌금을 내라 하는 거야. 어린 마음에 돈은 없고 교회는 가고 싶고... 그래서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쳐서 갖다 냈어. 근데 그게 나한테 너무 상처였던 것 같아, 커서 교회를 갈 수 없더라고, 앞으로도 교회는 안 갈 것 같아.
돌아보면, 나는 아까운 마음을 억누르며 인색함으로도 드렸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억지로도 드렸다. 즐거움보다는 떨리는 마음이 더 컸던 것도 같다. 아니 그랬던 적이 그러지 않았던 적보다 훨씬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