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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시현 Jun 02. 2021

개.

기억  

   

집에 돌아오면 뭔가 아쉽고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귀가가 식구들보다 빨라 집이 비어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단독주택은 사람이 없다면 그야말로 오롯이 빈집이 된다. ‘비어 있다’는 이유 때문인지 귀가할 때면 마치 난간 없는 계단을 오를 때처럼 약간의 허전함과 불안함이 따라왔다. cctv를 설치했지만, 카메라가 ‘비어있음’을 채우지는 못했다.        


가족 모두 이구동성 ‘개를 키우자’했다.

집의 ‘빔’을 채우는데 개는 가장 적합한 대상으로 보다. 그 이유로 나는 침묵했고 가족들은 나의 침묵을 얼른 동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개와 내가 한 집에서 동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심각하고 중대한 일이었다.


나는 개가 무섭다. 보통은 싫어한다고 여기지만, 싫다기보다는 무섭다는 게 맞다. 무서우니 싫을 수밖에 없다.

   

화단 밑으로 떨어진 신발을 주우려는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개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향해 달려오던 사자 같던 그 개의 얼굴이 또렷하다. 다음 장면은 다리를 높이 매달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일이지만, 그때부터 나는 개가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싫었다.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병원 대기실에서 다리를 간질이는 무엇이 있어 내려다보니 ‘개’였다. 병원으로 개를 데려와 풀어놓는 그 몰지각에 화를 낼 여유도 없이 나는 반기절 상태가 되어, 의사는 나와 태아를 같이 염려해야 했다.       


이런 것을 트라우마라고 하는지, 나는 평생 개 근처에도 안 갔고, 개가 있는 집은 내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방문하지 않았다. 개 때문에 잘 정비된 산책길에서 운동하는 것도 꺼렸다.      


이런 내가 개와 동거!!!     

가족들은 이 참에 개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해보라고 했지만, 하기 쉬운 말일 뿐이었다.          




두 개의 세계

   

실내로는 데려오지 않으며, 내가 있을 때는 풀어놓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남편은 아들과 함께 ‘책임비’라는 것을 지불하고 유기견 보호소에서 개를 데려왔다,


개는 슬픈 사연을 갖고 있었다. 9개월이 되었다는 개는 보신탕 집에서 어미와 형제 4마리와 함께 구조되었다 했다. 어미 개는 다른 곳으로 분양되고, 보호소에서 형제 개들과 함께 있다가 이 개가 가장 먼저 우리 집으로 오게 된 것이라 했다.

남편은 얘와 짝꿍 개가 있는데, 걔가 너무 외로울 것 같아- 하며 그 개도 데려오고 싶은 눈치를 보였지만, 나는 외면했다. 한 마리도 감당 여부를 알 수 없는데, 두 마리는 자신이 없었다.

이름을 ‘달'이라 지어주었다.

    

‘개를 키운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였다.


찌그러진 양푼에 사람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담아주면서 대문 앞에 묶어 두고 키웠어, 옛날에는- 


내 말에 아이들은 눈을 흘기며 나를 야만인 보듯 쳐다보았다.      

대통령의 다른 이름이‘박정희’인 줄 알았시대부터 지금까지 격세지감의 드라마는 세상 어떤 대상보다 개에게서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큰 애가 유기견 보호소를 다시 방문해서 ‘예방접종 수첩’을 가져왔다 -예방접종수첩은 아기들만 갖는 건 줄 알았다-.  

큰 애가 그 수첩에 따라 신종플루- 역시 놀랍다-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보호소에서 데려왔으니 종합적인 검진을 받아야 하고, 프런트라인을 해야 한다고 하며, 데려온 다음 날부터 이틀에 한 번 꼴로 동물병원을 다녀왔다.   

   

남편은 새벽에 일어나 개를 데리고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난 후 출근을 했다. 퇴근해 돌아와서도 역시 개 산책부터 챙긴 다음에야 저녁식사를 했다. 늘 피곤해하는 사람이 그랬다. 잠 많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막내 녀석도 마당에서 개가 찡찡대는 소리가 나면 한 밤중이든 새벽이든 벌떡 일어나 나갔다.      

'달'은 오자마자 집의 ‘센터’가 되었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소소한 일을 해야 했는데...    

 

동물병원이나 애견샵에 전화를 하면 전화를 받은 직원들은 개를 꼭 ‘애기’라 지칭했다.

아이들은 내가 개를 분양받았다고 하면 ‘입양’이라 정정해 주었다.

분양은 나누어 준다는 뜻도 있지만, 내가 갖고 있는 것을 판다는 의미도 있으니 분양이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하면 극구 입양이라 했다. 입양은 사람한테 쓰는 말이라는 내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개가 어떤 시대보다 존중받는 때다.      

개의 드라마는 ‘어휘’에서 절정을 이뤘다.

남편이 열심히 시청해 나도 보게 된 동물 관련 프로그램에서 한 훈련사가 집에서 아기와 개가 같이 있는 문제를 언급하며,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 아기’라 한다.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고, 마땅히 소중해야 할 아기가 갑자기 집에서 키우는 동물과 같은 격이 되고 만다.      

‘사람 아기’

국어에 그런 말은 없다. 그 훈련사 언어대로 사람 아기가 있다면 개 아기도 있고, 원숭이 아기도 있고, 고양이 아기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한국어에 없다.      


상상할 수도 없는 범죄가 빈번히 터지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휘두를 만큼 사람이 무시되고 하찮게 여겨지는 세상이다, 지금은.

개가 다시없는 대접을 받는 이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격은 계속 추락 중이다.


개에 대한 과도한 인격화가 개를 사랑하는 방법인지 모르겠다. 역으로 개를 인격화해야만 개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개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 세계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 아닌 동물이 있다. 다른 세계에는 사람이 있고, 개가 있고, 사람과 개가 아닌 동물이 있다.

두 세계의 양립은 어려워 보인다.


후자의 세계에서 ‘사람 아기’나 ‘애기’나 ‘입양’은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자식이나 친구를 대신할 수도 있는 개를 인 격화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일 듯했다. 같은 이유로 유기농 사료나 간식, 입이 떡 벌어지는 진료비, 미용, 패션 역시 사람의 의식주와 다름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 개는 이미 ‘두 번째 사람’이다.      


전자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과해 보일뿐더러 불편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개는 다른 동물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고기는 먹으면서 보신탕은 혐오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 동물보호를 외치면서 사람에 대한 예의는 외면하는 행태에 분노한다.


나는 전자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다.





연민  

    

가족들이 '달'을 데리고 산책을 가거나 잔디밭에서 놀아주거나 사료나 간식을 먹거나 할 때, '달'은 생기가 넘치고 즐거워 보다.

하지만 24시간이 그렇게 채워질 수 없는 게 당연하고, 하루의 시간을 본다면 즐거운 시간의 비중은 그리 길지 않다.      


나머지 시간, '달'은 자거나 가끔 마당을 배회하거나 혹은 잔디밭에서 뒹굴었다. 그도 아닐 때는 집 앞에서 몸을 납작 엎드린 채 미동도 않다. 사람이 놀아주지 않으면 장난감도 잘 쳐다보지 않다. 나까지 없을 때는 저런 상태가 더 길고 깊을 것이라 쉽게 짐작되었다.

'달'은 진종일 남편이나 막내아들을 기다리는 것 같다.    

  

'달'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왜 불쌍할까...? 아픈 것도 아니고 학대받는 것도 아니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보고 있을수록 불쌍한 마음만 가득 차오르는 걸까...?     


사람이 아니면서 사람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와 버린 개.

사람의 세계로 들어와 버린 개는 먹이를 구하러 다닐 필요가 없고, 안전한 잠자리를 찾을 필요도 없고, 무리와의 전쟁이나 교감 역시 필요치 않다.

그러니까 개는,  할 일이 하나도 없다. 할 일은 전무한데, 인형은 아니니 계속해서 느끼고 살아야 한다.  

이 비극(?)은 개가 사람의 세계로 들어올 때 이미 예정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개 팔자가 상 팔자’라는 말에는 사람의 독선과 개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큰 애는 사료를 주면서도 산책을 시키면서도 심지어 목욕을 시키면서도 불쌍해-를 입에 달고 있다.      

홍삼이 든 간식을 먹고, 첨단 병원 진료를 받 호화로운 애견놀이터를 뛰어다녀도 개는, 불쌍한 존재였다.      


자정이 넘은 깊은 시간이 되면 가끔씩 들개들이 찾아왔다. 얼마 전 창문을 통해 보고 있자니 들개 한 마리가 다가와 멈추어 섰다.

'달'도 들개를 보더니 다가갔다. 두 마리의 개 사이에는 펜스가 있다. 분위기가 험악해 보이지 않았다. 펜스를 사이에 두고 잠시 서로 쳐다보고 있더니 들개가 몸을 돌려 왔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들개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달'이 컹컹 짖기 시작했다. 마치 그 들개를 부르는 듯이.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달아, 너 저 들개가 부럽니?  저 들개를 따라가고 싶니?’     

 




너의 능력  

   

다른 동물들은 접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개는 확실히 그 눈동자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고 있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눈빛 때문에 사람은 개에게서 마음을 거두지 못하는 것 같다.     

 

'달'은 애처로운 눈빛을 할 때도 있고, 즐거움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을 할 때도 있고, 뭔가 토라져 보이는 눈빛을 할 때도 있다. 눈빛이 토라져 보일 때면 곧이어 휙 몸을 돌려 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럴 때면 가족들은 ‘귀여워’를 연발하며 '달'에게 ‘열광’했다.      


'달'과의 접촉이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나는 '달'의 눈빛을 읽는다. 그리고 그 눈빛에 마음을 뺏긴다. 어느새 자유롭게 접촉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할 지경이다. 미안한 마음은 금세 불쌍한 마음과 뒤섞여 버린다.     


'달'도 내가 저에게 편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을 아는 듯했다. 내가 다가가면 다른 식구들에게 하듯 몸을 격렬히 움직이거나 꼬리를 힘차게 흔들지 않았다. 몇 발자국 내 쪽으로 오다가 내가 주춤 뒤로 물러서는 기색을 보이면 저도 이내 몸을 돌렸다.      


나는 매일매일 '달'에게 다가갔다. 언젠가 편해질 날이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

'달'도 내 노력을 아는지 등을 쓰다듬으면, 편하게 쓰다듬으라는 듯 가만히 있어주고, 현관을 열고 나가면 천천히 다가오며 나와의 간격을 유지했다.

나를 대하는 방식과 남편을 대하는 방식, 아들과 딸을 대하는 방식이 모두 달랐다.      


개도 개 나름의 방식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자신의 환경을 받아들이며 거기에 맞춰 주어진 생을 살아 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은 불쌍함만으로 이 생명체를 대해서는 안 될 이유로 충분했다.        


나는 '달'을 불쌍하게 보는 대신 대견히 여기기로 했다.

빈 집을 견디고 빈 시간을 견디고 목줄을 참고, 사람을 이해하고 최선을 다해 따르며 자신의 감정표현할 줄 아는 개는 분명 대견한 생명체다.


'달'을 데려오면서 한 처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달'은 데크로 올라오더니 이제 현관을 점령했다. 거실까지 올라오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다. 가족들은 '달'에 관한 한, 나의 소극적 태도를 늘 동의로 받아들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내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것은  '달'의 능력이다.


나는 어느 결엔가 이전에 긍정하지 않았던 세계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다. 이것 역시 '달'의 능력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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