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조금 이른 아침이었지요. 집 뒤쪽에 있는 신축 창고 쪽에서 걸어 나오는 회색 점퍼를 입은 당신을보았습니다.순간 든 생각은의아함이었습니다.
건물 뒤쪽으로는 길이 없고, 앞 쪽 출구 외에는 3면이 펜스로 둘려져 있는 그곳은 낯선 사람이 걸어 나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펜스 너머는 들판이지요.
창고 주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낯선’ 사람임에 분명했습니다.
나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궁금증으로 거실 창문을 통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정면만 응시한 채 잰걸음을 옮기는 당신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에게 이 글을 씁니다. 하지만 당신은 복수입니다. 내가 핑크색 하네스의 강아지만 본 것은 아님으로 해서 그렇습니다.
잰걸음의 당신이 사라지고, 내가 잠시 거둔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던졌을 때, 거짓말처럼 길 가상 자리에서 펜스를 붙잡고 있는 강아지가 보였습니다.
윤기가 흐르는 잘 정돈된 털, 그 털에 어울리는 귀여운 핑크색 하네스, 어디로 보나 지금 막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강아지였습니다. 다만 리드 줄이 없을 뿐이었습니다.
강아지는 크고 검은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주인을 찾나? 어디로 갈지 방향을 가늠하나? 한두 걸음 떼다 붙박이처럼 멈춰서 두리번거리고, 다시 한 두 걸음 옮기고 멈춰서 앞뒤를 번갈아 바라보기를 반복했습니다.
잠깐 실수로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이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선가 애타게 찾는 주인이 있길 바랐지만.... 황량한 논밭뿐인 이곳은 실수로 강아지를 잃어버리거나 놓칠 수 있는 장소는 아닙니다.
내가 밖으로 나갔을 때, 강아지는 그쪽으로 가기로 정했다는 듯, 일자로 나 있는 외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강아지가 정한 방향은 사람들이 사는 곳과는 반대쪽이었습니다. 들개들이 주로 그 방향에서 나왔지요.
며칠 뒤 우리 집 강아지를 산책시키다 황량한 논밭 한가운데 서 있는 핑크색 하네스 강아지를 보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강아지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윤기가 사라진 털은 퍼석퍼석했고 여러 군데가 뭉쳐져 있었습니다. 어이없게도, 핑크색 하네스는 여전했습니다.
비루한 강아지와 핑크색 하네스... 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강아지의 슬픔과 공포를 외려 더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는 찬 들판에 서서 우리 집 강아지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내가 한 두 걸음을 그 방향으로 떼자 이내 고개를 돌려 반대방향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 후에도 핑크색 하네스를 한 번 더 보았습니다. 바로 우리 집 펜스 밖에서요.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다른 들개(혹은 유기견)와 함께였습니다. 2마리가 펜스 밖을 서성였습니다. 우리 집 강아지가 맹렬히 짖어 대 나가보니 그러고 있었습니다.
황급히 육포를 들고 나와 몇 가닥 찢어서 펜스 밖으로 던졌습니다. 하지만, 육포에 대한 식욕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건지, 육포 가닥은 거들떠도 안 보고 달아나버리더군요.
이곳에 살면서 여러 마리의 들개를 보았습니다. 그 개들을 들개라고 해야 할지 유기견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들개 하면 단모의 날렵한 몸과 매서운 눈빛, 흡사 늑대 같은 외양을 떠올리지만, 그 무리에는 보더콜리나 스피츠 같은 개도 있었습니다.
아직, 들개라는 이름과 어울릴만한 매서운 눈빛을 한 개는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본 개들은 대부분 휑한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달려들만한 기개 같은 건 아예 없고요.
푸석한 털, 마른 몸, 휑한 눈빛, 내가 본 들개들의 공통점입니다. 또 하나, 바로 코 앞에 있어도 결코 사람에게 곁을 내주지는 않았습니다.
목줄이 조이는 개도 있습니다. 볼 때마다 목줄이라도 풀어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결코 사람을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버리려면 목줄이라도 풀어서 버리지....
버려진 개는 처음에는 혼자 배회하다가 이내 무리를 찾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들개는 2,3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움직입니다. 하지만 혼자 있는 개도 있습니다. 그런 개는 대체로 어리고 약해 보였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약자의 삶은 늘 더 고단하기 마련인가 봅니다.
사람의 울타리 안에서 사랑과 돌봄을 받았던 날들이 상처이기만 한 생명들을 대하고 있자면 통증 같은 게 느껴집니다. 그 통증은 슬픔이기도 때로는 분노이기도 때로는 걱정이기도 합니다.
키우던 개를 버리는 당신도 결코 편한 마음은 아니겠지요. 그것은 아마 당신에게도 상처일 겁니다.
들을 배회하는 개들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주는 사료를 잘 먹지 않습니다. 땅을 파고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폐창고를 뒤져 먹이를 구하는 것 같습니다. 비바람을 피할 곳을 찾지 못하면 구석진 곳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 비바람을 다 견뎌냅니다.
당신의 강아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가끔 들판을 헤매고 다닐 강아지를 생각하나요?
동물 구조센터에 연락한 지 벌써 한참이 지났지만, 손이 모자라는지 구조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오면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저 개들에게 새 삶이 열릴까요...?
구조팀은 오지 않는데, 새로운 개가 보입니다.
얼음장 같은 들판을 서성이는 저 비루한 개들이 찾고 있는 것은 먹이일까요? 아니면 당신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