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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시현 Jun 23. 2022

하나님의 의무, 책임.

우크라이나 전쟁이 오래간다. 이렇게 오래갈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바람을 섞어 전쟁이 길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길어지는 전쟁의 여파는 이곳에 있는 갑남을녀에게까지 닿아 주유소에 갈 때마다 미간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이 겪고 있을 고통에 견준다면 기름값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전쟁의 한 복판에 있는 어린아이들이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여자들에 대한 보도를 접할 때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누구의 책임일까, 누가 그 고통과 피해를 책임져야 할까?     

하나님께서 거기 개입하셔서 단번에 잘못한 자를 징벌하시고 무고한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면... 그렇게 해주신다면, 우리의 속이 시원하겠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선호하시지는 않는 것 같다.


하나님은 뭘 하시는 걸까...?


아무 잘못 없는 가족이 악마 같은 사람에 의해서 살해당할 때, 사랑만 받아도 모자랄 어린아이가 학대받으며 죽어갈 때, 약자의 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은 사람이 공직자라며 정의를 외칠 때, 100장의 이력서를 써놓은 청년이 고독사 할 때, 하나님 당신은 뭐하고 계시나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면 이 모든 불행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불행과 고통에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건 직무유기인 것만 같다.


스스로 창조하신 세상에 대해 하나님은 의무감을 가지셔야 되지 않을까...?





<주인의 품삯 계산>

포도원을 갖고 있는 주인이 있었다. 아침에 온 일꾼들에게 주인은 1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했다. 일꾼들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 봐 그 금액은 일당으로 합리적인 가격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주인은 3시경 장터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이들을 만났다. 그들은 아마도 일할 의사가 있지만, 일거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든지 주인은 그들에게 1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하고 포도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들은 아주 감사했을 것 같다.

비슷한 사람들을 포도원 주인은 시간을 달리 해 세 번이나 더 만다. 주인은 노동에 대비된 임금보다 생활임금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주인은 그들에게도 1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모두 포도원으로 보내주었다. 뒤에 만난 사람일수록 감사의 마음이 컸을 것 같다. 또는 웬 횡재냐 멍청한 부자를 만났네, 생각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모두 포도원에서 일을 하다 동일한 시각에 일을 끝냈고, 포도원 주인 약속한 일당을 주었다.

아침에 들어온 사람들이 항의했다. 노동의 시간이 모두 다른데 어떻게 같은 임금을 주냐고, 하지만 주인은, 약속한 임금을 주었다며 그들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태복음 20장에서)     



고등학생인 아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이 말씀을 들으면 아주 분개한다. 주인이 너무 부당하다고, 임금을 시간으로 계산해서 많이 일한 사람이 많이 받는 게 옳다고 한다. 아이는 무려 밀레니엄 세대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근거해서 교육받은 세대에게 이 주인은 더없이 부당한 악덕 기업주다. 노동에 비례해서 임금을 받는다는 명제는 명확히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노동과 비례하지 않는 임금'같은 일포도원에다면 다행이지만 우리 인간사에서 일어난다면 모두가 억울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일어나고 있고, 그래서 세상에는 피해자와 억울한 사람뿐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주인 잘못이 없다고 하신다.       

    

다행히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있다. 바울은 존재를 만든 자와 만들어진 존재의 관계, 다시 말하면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토기와 토기장이에 빗대어 설명해 놓았다.


토기장이는 소용될 목적을 갖고 토기를 빚는다. 빚어진 토기는 오직 토기장이의 처음 목적에 맞게 소용되는 것이다. 토기가 할 일은 거기까지다. 바울은 밥그릇으로 빚어진 토기가, 나는 도자기로 소용되고 싶은데 왜 밥그릇이냐 항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했다. 그것은 피조된 목적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 쓸모는 오직 토기장이만이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자리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의 역할은 조물주의 애초의 목적에 부합하는 데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자리는 만물의 영장, 세상의 중심, 그래서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겠지만, 사람 정확한 자리는 '피조물' 위치다.


 

포도원 일화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피조물'이라는 사람의 자리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포도원은 포도원 주인의 것이다. 일꾼은 포도원에 들어가서 끝나는 시간까지 주인이 시킨 일을 하면 그뿐이다. 내 앞이나 내 뒤에 온 이들이 얼마의 임금을 받든, 포도를 잘 따서 보너스를 받든 그것은 관심을 가질 일도 항변할 일도 관여할 일도 아니다. 묵묵히 포도만 따는 일꾼에게 다른 갈등이 있을 리 없다.    


전쟁이 일어나고 하루도 빠짐없이 세상에 온갖 불행과 악이 넘쳐나고 힘없는 자의 설움이 우리의 가슴을 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에게 그 책임을 묻거나 의무를 지울 수 없다. 그것은 피조물의 자리를 벗어나는 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자리'는 역할과 한계를 알고 거기에 순응함으로 지켜진다.  그 자리를 지킬 때 세상에서 가장 깊은 평화가 찾아온다. 그것은  부당함에 대한 분노를 놓아버린 무기력이나 거기에서 비롯된 절망이 아니다. 포기도 무지도 아니다.

원형 회복의 자연 상태가 주는 편안함, 피조물의 자리가 주는 평화는 그런 모습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세상의 모든 논리와 인본주의는 '피조물의 자각'을 종교 세뇌라 치부하겠지만 이조차 피조물이 걱정할 영역은 아니다.

믿음이 모든 자의 것이 아닌 것처럼 피조물으로서의 인식 역시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인본주의가 사람에게 얹어놓은 '조물주와 같은 대단함'을 내려놓는다면 그것은 어려운 과정이 아니다.


세상이 시끄러워도 피조물의 자리는 평화롭다.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평화롭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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