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시현 Oct 10. 2023

고양이가...

  다용도실에서 바깥 테라스로 나가는 방충망 미닫이 문 가까이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난생처음인 경험에 그저 신기할 뿐이어서 나도 가만히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와 나 사이에 방충망이 있기는 하지만, 녀석은 내 눈을 피하지 않다.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낯선 고양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당황한 건 내 쪽이었다. 마침 집에 와 있는 딸아이에게 식빵이라도 한 장 줘보라고 했더니, -내가 고양이 가까이 다가가는 건 사실 겁나는 일이어서- 녀석은 딸아이가 내민 식빵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이곳에서 살면서, 진입로 가운데 앉아 있거나 농가를 들락이는 고양이를 심심찮게 보고, 쓰레기봉투나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밖에 두면 뜯기는 일이 종종 있어 우리 집 마당으로도 고양이가 오가나 보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고양이 괴담을 10개도 넘게 알고 있다. 비 오는 날 아이들의 성화에 선생님이 해 준 이야기, 숙모가 해 주고 할머니가 해 준 이야기, 그리고 친구들이 해 준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서 고양이는 늘 저주나 앙갚음의 주체이거나 매개물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앙갚음을 직접 당한 체험담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사회 선생님과 숙모는 실제로 고양이에게 앙갚음을 당한 경험을 들려주었었다. 그 이야기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 때문인지, 내게 고양이는 일관되게 무섭고 꺼려지는 동물이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다음 날 또 왔다. 식빵이 없어서 참치 캔을 줬더니 욤욤, 잘도 먹었다. 오전에 오더니 오후에 다시 왔다. 내가 내다보자 이번에는 야옹야옹 운다. 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버리려고 했던 묵직한 반려견 식기를 꺼내오고 고양이 사료를 시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용도실 한 켠에 고양이 사료를 놓고 스푼도 갖다 놓았다.    

  먹고 있는 사료 양이 좀 적은 듯해서 조금 더 줄 요량으로 사료를 뜬 스푼을 식기 가상자리로 슬며시 기울이니, 아니, 이건 아니지, 한쪽 발을 들어 스푼을 확- 쳐낸다. 사료 알갱이가 테라스 바닥으로 흩뿌려진다. 나만 놀랐다. 녀석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되려 나를 뾰족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너는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구나, 내가 방충망 문을 닫고 한 발 뒤로 물러서자 다시 식기에 머리를 박고 욤욤, 예의는 없지만 뻔뻔함은 넘치는구나, 이것이 녀석의 속성임을 아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녀석의 야옹 소리는 좀 더 커지고 힘이 들어갔다. 터득한 대로 사료를 먹고 있을 때는 양이 적어 보여도 가만있었다. 사료를 먹고 나면 조그만 혀를 날름거리며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오도마니 앉거나 배를 깔고 눕거나 하다가 휙-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불러도 한 번 뒤돌아보는 법은 없다.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던 내가 무안할 지경으로 야멸찼다. 녀석이 가는 곳이 궁금했다. 가족이 있니? 엄마와 형제들이 근처 어딘가 있어? 아니면 동무가 있나?

  오전에 왔다 가고 오후가 되면 다시 찾아왔다.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초저녁에 안 오면 늦은 밤에라도 꼭 와서 사료를 먹고는 다시 훽-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조금씩 차가워졌다. 바람이라도 피할 뭔가가 있어야 될 것 같았다. 이런 내가 몹시 낯설었지만, 어느새 중고사이트를 뒤지고 있었다. 고양이 집을 숨숨집이라고 하나보다. 며칠을 뒤지니 마땅한 물건이 나왔는데, 차로 20분 거리. 운전대 잡기 싫어하는 내가 그 거리를 기꺼이 갔다 왔다. 흰색 타원형으로 된 숨숨집은 플라스틱재질이어서 외부에서 쓰기 맞춤해 보였다. 집을 닦고 방석을 깔아 바람을 피하는 방향으로 놓아주었다. 처음에는 본 둥 만 둥 안 들어가더니 며칠 지난 아침에 보니 숨숨집 안에서 다리를 다 펴고 자고 있었다. 깰까 조심스러워 살금살금 뒷걸음질로 다용도실을 나왔다. 그때 깨달았다. 이 관계의 주도권은  내가 아니라 녀석이 갖고 있다는 것을, 녀석이 나를 길들이고 있음에 분명했다. 고양이 집사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또 터득, 녀석을 만난 후 터득되는 게 많았다.      


  녀석은 흰 바탕에 큰 넓이의 갈색과 작은 넓이의 검은색 무늬가 섞여 있는 빛깔을 하고 있다. 기지개 켜 듯 몸을 죽 늘어뜨리면 몸길이가 제법 되는데 옹크리고 있을 때는 작은 토끼처럼 보인다. 성격은 이미 언급한 대로 제 멋대로, 아무래도 쌀쌀맞은 쪽에 가깝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눈도 빛의 양에 따라 조리개가 조절되지만 고양이 눈의 변화는 드라마틱하다. 한낮에 고양이의 검은 눈동자는 휜 자위 가운데 거의 일자 형태로 있다. 그럴 때 고양이는 더없이 앙칼지고 표독스러운 모습이다. 내 머릿속 고양이의 모습이 대체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빛이 사라지는 저녁이 되면 검은 눈동자 점점 커져서, 완전히 해가 기울고 나면 흰자위는 없어지고 온통 검은 동자의 네모진 눈이 된다. 낮의 앙칼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대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듯한 깜찍하고 귀엽고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세상 착한 생명체다.     

  

  어느 날은 나를 보고 야옹 대지도 고 행동이 좀 굼떠 보인다. 그런 날은 사료를 주지 않고 가만 두는 게 좋다. 귀찮게 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 테라스 마룻바닥에 가로누워 실눈을 뜬 채 시간을 보낸다. 녀석이 쉬는 동안 나는 다용도실을 들락이지 않는다. 한참 후 내다보면 어느 결에 사라지고 없다.

  녀석과 나의 사이는 좁혀지지 않는다. 나는 식기를 닦고 사료를 주고 잠자리를 정돈해 주는 정도까지만 한다. 물론 녀석도 내게 곁을 주거나 고마워하는 기색이 없다. 하지만 배가 고프거나 쉬고 싶거나 자고 싶을 때면 찾아온다. 아마 이곳에 가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것으로 고마울 뿐 녀석에게 욕심내지 않는다.

  문득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이런 거리를 지켰다면... 돌아보면 사이가 멀어서 상처를 받거나 화가 돋는 경우는 드물었다. 상처를 주고받고 분노를 키우는 경우는 늘 너무 가까워서였다.

  강물 같은 평화는 일정한 거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거리는 욕심과 고집, 섣부른 판단을 내려놓음으로 유지된다. 이 단순한 진리를 좀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겠다는 마음이 든다. 나이가 들면 미성숙이 성숙함으로 바뀌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마음이 더 좁아졌다. 더 자주 더 쉽게 마음에 찌꺼기가 쌓였다. 그래서 나이 듦은 부끄러움이라고 시인은 노래했는지 모르겠다.    

   

  고양이를 돌보는 것도 낯선 경험이지만, 이것은 더 낯다.

  녀석이 테라스로 올라와 물을 마시고 사료를 먹고 웅크리고 있거나 잠들어 있는 모습을 가만히, 오래 보고 있노라면 마음에 쌓인 찌꺼기가 오래된 짐이 정리된 듯 비워졌다. 찌꺼기가 비워진 자리는 고요함과 가벼움과 애찬함으로 채워졌다. 나조차 납득되지 않으니 이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는 없. 그런 마음상태를 갖고 지속시키기 위해 애쓴 적도 있지만 애씀으로는 얻지 못했던 것들이다. 고양이가 내게 무엇을 했을까...? 답이 찾아지지  않는다


  다용도실의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보송보송한 고양이 몸통이 보이면 하던 일을 제쳐두고 다용도실로 나가는 것이 어느덧 버릇이 되어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 식물, 갈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