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으로 와서 두 번째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나는 작년처럼 올해도 약간의 흥분과 설렘으로 밭을 일구고, 작년보다는 조금 더 잘할 수 있다는 어설픈 자신감까지 보태 상추, 고추, 방울토마토... 여러 작물을 심었다. 내가 뿌린 씨가 발아해서 싹을 틔우고 잘 자라나는 과정을 본다는 것은 환호성을 지를 만큼 기쁘고 경이로운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텃밭부터 돌아보게 되고, 오후에도 틈만 생기면 텃밭의 작물들로 눈길이 갔다. 어제보다 조금 자란 듯이 보이면 뿌듯하고, 잎이 누렇게 뜨는 기색이 있는 녀석이 하나라도 보이면 마음이 쓰렸다.
작물을 키우면서 나는 작물과 대화하는 신기한 능력까지 갖게 된 것 같았다.
작물 재배의 또 다른 과정은 잡초와의 싸움이었다. 내가 심은 작물이 너무 소중해 따가운 햇볕도 아랑곳없이 쭈그려 앉아 잡초를 뽑게 된다. 잡초는 오직 내 아이를 괴롭히는 동네의 불량배일 뿐이다. 그러니 보이는 대로 빨리빨리 뽑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그렇게 한참 잡초를 뽑고 있자니 어느 순간 잡초가 말을 걸어왔다.
-나도 이름이 있어요. 잡초는 사람들이 오직 사람의 관점에서 부쳐놓은 오명일 뿐이에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우주적 차원에서는 소중한 생명이에요. 당신이 심어놓은 상추나 샐러리, 호박만큼이요. 다만 사람들의 먹거리가 아닐 뿐이에요.
것도 그랬다. 그렇구나,
내가 심지 않은 식물은 잡초였다. 마치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 잡인인 것처럼. ‘잡인’이라는 말속에는 오만함을 넘어서는 방자함과 사람을 몰 인격체로 대하는 무도함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잡초는...?
돌멩이 사이로 또는 멀칭한 비닐 사이로 용케도 머리를 들이밀고 올라오는 어린 ‘잡초’를 뽑아낼 때면 마음이 더 안 좋았다. 나는 무슨 권리를 갖고 있나, 일순 혼란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니들은 어쩌자고 이렇게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니? 저것 봐, 내가 늘 물을 주고 돌보는 애플 수박이나 애호박은 저렇게 쉽게 죽어버리잖니? 니들은 물도 안 주고 가지도 안 쳐주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잘 버티면서 번식까지 하는 거니?
-몰라요, 우리도. 아마 아무도 가꿔주지 않으니 더 자생력이 생기는 거 아닐까요?
그럼에도 나는 이기심이 본능이자 천성인 인간 종족이었다. 잡초의 절절한 항변을 들으며 갈등하면서도 여전히 잡초를 뽑고 있으니 말이다.
이른 봄에 텃밭에 비료를 주고 흙을 뒤집어 놓아야지 여름작물 재배를 잘할 수 있다는 주위의 훈수대로 4월 초 남편과 아들을 어거지로 끌어내 밭을 뒤집을 무렵부터였다.
주위가 온통 어수선했다. 건축 자재를 가득 실은 대형트럭과 크레인이 들어오고, 공사할 사람들의 자동차가 줄줄이 들어왔다.
중장비 차의 행렬을 보고 있자면 이제 곧 소중한 것을 빼앗길 것 같다는 불안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기어이 우리 집 바로 앞의 땅 주인이라는 남자가 꼬마 주스병 한 상자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주스 상자를 내밀며 이제 집을 지을 거라고 했다. 좀 시끄러울 테니 양해해 달라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는 집 두 채가 동시에 올라갔다. 모내기를 하는 농부들의 이앙기와 자동차도 만만치 않았지만, 농부들도 다양한 공사를 했다. 논 근처 터에 컨테이너 박스를 올리기도 했고, 휴식을 위해 비닐을 친 정자를 만들기도 했다.
이 집은 더 이상 외딴집이 아니게 되었다.
사람이 몰리고 이웃이 생기는 것은 반가운 일일까?
이웃과 함께 정답게 지낸다면 삶은 한층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어울렁 더울렁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그것은 모두의 바람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앞집의 공사가 막바지에 다 달아 보였다. 앞집은 우리 집 앞에서 훨씬 안쪽으로 들어 가 위치했고, 우리 집 거실과 마주하는 곳은 밭을 일군다고 했다. 거실 창의 시야를 가리지 않으니 다행이라 여기기도 했지만... 어느 날 보니 그 빈 땅에 얕은 동산 같은 흙무덤을 죽 쌓아놓았다. 그지 않아도 바람이 많은 이곳에서 그 흙먼지는 고스란히 우리 집으로 와서 쌓였다. 거실 창문과 데크가 늘 희끄무레한 색이었다.
남편에게 가서 흙무덤을 빨리 펼치든지, 비닐 같은 것으로 덮든지 말하라고 했더니, 날이 갈수록 소심 해지는 남편은 이제 이웃으로 살 텐데 얼굴 붉히지 말고 참자고 했다. 얼굴 붉히지 않으려면 내 불편을 무조건 참아야 하는 건가? 참는 게 맞는 걸까? 이런 일에 불편해하는 내가 유난스러운 걸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얼굴 붉히지 않게’ 그쪽에서 제발 흙무덤을 치워주기를 바랐지만, 그건 그냥 내 바람일 뿐이었다. 애꿎은 남편과 몇 번 투닥이다가 결국 나는 그 집을 찾아가고야 말았다.
하루 종일 쇠를 갈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공사를 하니 참을 수밖에... 문을 꼭꼭 닫았다. 모두가 퇴근하는 6시쯤이면 그 소리도 끝나려니 기대하며, 하지만 소리는 6시를 넘기고 8시를 넘기더니 9시도 넘겼다. 7시가 넘어서부터 나는 착한 이웃과 유난스러움 사이를 수십 번 오갔다. 다행히 끝까지 착한 이웃을 지켰지만, 그날 밤 귓속에서 멈추지 않는 쇠 가는 소리로 인해 나는 결국 잠을 자지 못했다. ‘착한 이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차가 누구 차인지는 모른다. 근처에 살거나 일이 있는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교행이 안 되는 일 차선폭 밖에 안 되는 길에서 그 차는 꼭 어중간하게 주차를 해놨다. 길 한쪽은 얕은 비탈이고 다른 쪽은 농수로였다.
차를 비탈 쪽으로 바싹 부쳐놓으면 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 차 한 대가 지나가기에는 너무 아슬아슬한 폭, 더욱이 시간이 항상 밤이었다. 잘못하면 차바퀴가 농수로에 빠질 수 있고, 아니면 주차해있는 그 차를 긁을 수밖에 없다.
도리없이 클락션을 눌렀지만, 차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애면글면 그 자리를 통과하고 뒤돌아보니 어둑 컴컴하게 펼쳐진 논에서 한 남자가 올라와 차에 탔다. 그리고는 내가 다가가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시동을 켜고 멀어져 갔다. 벌써 몇 번 째다. 클락션을 길게 눌러도 차주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무슨 머피의 법칙인가? 그 차가 그러고 있을 때 왜 항상 나만 지나가는 걸까...?
피곤함이 느껴진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따뜻함과 위로가 먼저일 텐데 인간 혐오자처럼 나는 왜 피곤해지는 걸까...?
외딴집이 그리워진다.
갈등의 봄을 지나고 있다. 사람과, 그리고 식물과.
텃밭으로 나갔다.
내가 심어놓은 작물이 잡초에게 말한다.
-억울해하지마, 어차피 우리도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자라면 결국 뽑히고 마니까
작물은 사정없이 뽑히고 마는 잡초를 보며, 다행이야 잡초가 아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나는 대꾸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식물이 주는 갈등은 둔중한 콘트라베이스 소리처럼 내 안에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아마도 억울함이 넘치는 세상이다 보니 그런지도 모르겠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억울함은 늘 자신의 몫으로 확보한다.
식물은 그들 모두에게 '억울해하지 마'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여름이 되면 주위에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들이 식물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들에게 식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