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호세아 4:1.6)
오래전 이 말씀을 접했을 때 나는 몹시 의아했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사랑이 없어서도 믿음이 없어서도 순종이 없어서도 아닌,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
목사님의 설교에서 사랑이나 믿음, 순종은 늘 나오는 주제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설교는 들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성도 가운데서도 믿음이 크신 분, 사랑이 넘치시는 분.. 이런 수사를 받는 분은 많이 보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은 분, 하나님을 잘 아는 분, 이런 표현이나 그런 표현으로 설명되는 분을 듣거나 본 적이 없다.
호세아서 4장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이다. 습관처럼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진노를 토하신다. 그 과정에서 마치 탄식처럼 말씀하신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제사장들은 속죄제라는 재물을 위해 백성들이 자주 범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잘못임을 몰랐을까?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얼마나 혐오하시는지 몰랐을까? 심지어 신탁을 받고 점술을 행할 때,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크고 무서울지 전혀 몰랐을까?
몰랐다면...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망해야 했다.
하지만 몰랐다는 사실이 더 신기하다. 민족의 역사(歷史) 자체가 하나님의 역사(役事)고, 삶이 신앙이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쉼 없이 경고하셨는데 그것을 모를 수 있을까...?
신앙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나님의 주신 은혜, 고난, 소소한 간증등이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기초한 신앙관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런 자리에서 정말 많이 들은 이야기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다. 오랜 시간, 그리고 열심히 믿은 이들일수록 자기 확신이 강하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어떤 분인지를 정확히 아는 듯, 하나님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세요!!
이때 ‘그런’은 대체로 우리에게 불편을 주는 사항이다. 헌금, 제사, 주일 예배 등등. 헌금할 돈이 없는데... 주일예배 빠지면 좀 찝찝해서... 집안에 분란 일으키지 않으려면 제사 참석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면, 우리는 정말 불편하다. 불편한 마음을 갖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불편하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라면..’ 얼마나 다행인가! 헌금은 여유가 좀 생기면 하고, 주일 예배는 상황에 따라 좀 빠질 수도 있고, 제사는 집안에 분란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는 내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실 테니...
정말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실까...? 우리는 바로 알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다. ‘12 사도 연구’라는 책에서 그 말씀에 대한 의미를 정확히 배울 수 있었다. 12 사도 연구의 저자(윙키 프레트니)는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각자에게 보여주신 빛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어두운 부분이 누군가에게는 잘 보이는 영역일 수 있다. 반대로 나에게는 잘 보이고 깨달아지는 영역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깜깜한 영역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을 갖고 계신다. 이 말은 하나님이 어떤 시스템이 아니라는 뜻이다. 시스템은 획일화된 하나의 기준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동일한 투입에는 언제나 동일한 결괏값이 나온다. 하지만 인격은 감정과 상황을 알고 공감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이시다.
나에게는 그런 분이 아니시지만 저 사람에게는 ‘그런 분’ 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한 달에 한 번 드리는 주일 예배를 기다려주실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 번 빠지는 예배에도 성령께서 근심하실 수 있다. (기본값은 당연히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이시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시편 18:25) 이렇게 하실 만큼 인격이심을 알아야 한다.
간혹, 아니 어떤 때는 자주, 성령께서 내 안에서 근심하고 계심을 알게 하신다. 성령께서 근심하시는 경우는 거의 백 프로 내가 어느 지점에선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거나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미다. 그런데 나는 나의 잘못을 잘 모른다. 되짚어봐도 어느 지점에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 때는 보여달라고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는 결국 보여주신다. 나의 잘못이 보일 때, 내 입에서 나오는 말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몰랐어요’다. 몰랐다고 잘못이 아닌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 변명을 늘어놓는다..
“하나님 정말 몰랐어요. 이런 일에 성령께서 근심하실지, 이게 잘못인지 몰랐어요 “
나는 살인을 저지르거나 사기를 치거나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런 죄라면 성령께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런 행위가 죄임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저지르는 잘못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잘못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나는 알지 못했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부른다고 친정 근처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이 잘못임을, 아버지는 나를 자주 부르셨다. 그때마다 나는 열일 제쳐두고 고단하신 아버지에게 갔고, 자연스럽게 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절기헌금을 본교회 아닌, 본교회에 대한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이전에 섬기던 가난한 교회로 보내도 될 줄 알았다.
막내아들이 유년부 시절, 천 원, 이천 원 챙겨 보내는 헌금을 천 원짜리가 없다고 몇 주째 드리지 않은 것을, 이 사소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하고 계실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고3. 2학기, 수능이 목전인 그때, 아들아이가 주일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좀 봐주실 줄 알았다. 수험생들은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게 교회의 관례이기도 하니...
좋아하는 소월의 시를 노랫말로 한 우울하고 구슬픈 옛 노래를 며칠째 반복해서 들을 때, 이 하찮은 행위에 성령께서 근심하실지 전혀 몰랐다.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히브리서 3:10) 이 말씀이 글자가 아닌 마치 우레 같은 소리로 내 귀에 꽂힐 때에야 비로소 갈피 없는 내 마음을 하나님께서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다. 외적으로 나는 예배 잘 드리고 봉사도 하는 신앙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은 나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나의 중심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몰랐다. 사실 모르는 거 투성이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 모르고 있었다.
몰랐다는 변명, 그 뒤에는 ‘나의 생각, 긴장 없고 태만한 나의 생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갈라디아서 6:7)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잘못된 행동이나 결정 뒤에는 분명 하나님에 대한 긴장이 없었고 안이했다. 내 생각이 먼저였다.
이스라엘이 반복해서 우상숭배의 죄를 짓고 완악한 마음을 돌이키지 않을 때,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미가 7:10) 같은 교만이 웅크리고 있었을 것이고 결과에 안이했을 것이다.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말씀대로 결과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메시아가 오실 것임은 그들의 선조, 그 선조의 선조 때부터 예언되어 왔었지만, 이스라엘은 예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이 예언대로 오신 메시아임을 몰랐다. 그냥 보아도 범인과는 확연히 다른 언행, 보여주신 수많은 이적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메시아 예수를 몰랐다. 몰랐기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태 27:25) 같은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곧이어 맞이하게 될 자신들의 미래를.
이 모든 ‘모름’은 어린아이가 경어를 모르고 초등학생이 고차방정식을 모르는 ‘모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새로운 법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위반하면 처벌하시겠다는 독재자가 아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고 싶기 때문이고, 말씀을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며 하나님을 업신여기기 때문임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 달린 죄수, 두 명 중 한 명은 에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다. 그는 낙원으로 갔고, 끝까지 그것을 모른 다른 죄수는 영원한 형벌 속으로 들어갔다. 낙원으로 간 죄수는 죄수일지언정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른 죄수는 죽는 순간까지 완악한 마음을 놓지 않았다.
자비하시고 긍휼히 무한하신 그 하나님이 또한 공의로우시고 자신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는 분이시며 사람의 교만과 안이함으로 인한 ‘만홀히 여김’을 용납하지 않는 분임을 우리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피상적이거나 관념 속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오직 예수만이 구원임을 모른다. 인간의 피조물 됨과 이 세상과 우주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모른다. 알려주어도 소리쳐도 모른다. 거기에 따른 결과가 있을 것임은 더더욱 모른다.
그들이 보기에 복음은 너무 촌스럽고 우악스러워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무심해서 혹은 안이해서 혹은 교만으로 내 멋대로 했던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적을 알고 깨닫는 과정이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수월히 알게 하실 때도 있었지만, 어떤 경우는 태풍이 몰아치고 우레가 울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던 두려움의 정체와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믿음의 적지 않은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드넓은 바닷가의 한 줌 모래 정도 알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