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삶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한 기억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순종적이거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커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내가 원망보다는 체념 쪽을 빠르게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무서운 쪽을 향할 수는 없어서 내 안에서 체념으로 타협을 보았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체념이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만한 덕목일 수는 없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뜨거운 감사도 그리 크지 않았다. 마음이 메말라 있을 때면 굳이 감사할 제목이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적시어서 감사의 제목들이 보일 때면, 감사하는 감동이 있었지만, 그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누나 둘과 터울이 큰 늦둥이를 두었다. 딸 둘을 둔 집의 늦은 아들이니 지인들은 나와 남편이 이 아들을 특별히 편애했을 것이라고 보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도 했었다. 그럼에도 그런 오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딸 둘도 그렇게 믿고 있다.
우리 집의 결핍과 여유는 치킨으로 대유 된다.
큰 딸은 출가를 했고, 작은 딸은 직장에 들어가 반은 독립을 했기 때문에 가정의 재정상태가 딸 둘이 한창 클 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 수혜는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딸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외친다. 치킨 한 마리를 혼자 먹다니... 우리는 1인 1 치킨은 상상도 못 했다. 우리는 늘 한 마리로 나눠 먹었어.
-지금 막내는 나눠 먹을 형제가 없으니까 혼자 먹는 거고, 너희들도 치킨만 시키지 않았어, 치킨이랑 피자랑 세트로 시켜서 너네도 먹을 만큼 먹었다.
하지만 딸들의 잔소리는 계속된다. 엄마 카드 뺏어라, 끼니마다 고기 반찬 해주지 말아라, 사달라는 거 다 사주지 말아라... 아들아이는 엄마와 누나들의 이런 이야기를 옆에서 듣지만 자신이 받은 수혜를 인정하는 데에는 인색했다. 아들애는 학교 다닐 때, 고성능 컴퓨터와 게임용 의자가 없는 애는 친구들 가운데 자신 뿐이었지만 자신은 참았다며 누나들의 말에 항변한다.
딸들은 항의를 멈추지 않는다. 엄마가 우리한테는 재수는 절대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아예 재수는 생각도 안 했는데, 얘는 심지어 재수를 했어, 아들이라고 재수시켜준 거잖아...
나는 어쩐지 딸들에게 평생 이 소리를 들을 것만 같다.
그때는 재수를 시킬만한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거지. 그렇지만 너희들도 강력하게 재수하겠다고 했으며 시켜줬겠지, 그리고 너희들은 대학 잘 갔어, 재수할 이유가 없었어, 그런데 막내는 작년 수능 너무 못 봤잖아, 갈 학교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재수한 거잖아.
나는 변명 같은 설명을 늘어놓지만 아이들에게 먹히는 것은 아니었다. 딸들은 그때 우리 집의 재정상태를 고려하지 않았고, 아들은 자신이 받는 수혜가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딸들에게는 원망을 받고 아들에게도 감사를 받지 못한다. 못된 것들...
1인 1 치킨을 해주지는 못했지만, 자식을 키우는 데는 힘쓰고 애쓰는 수고가 들어간다. 첫째든 둘째든 셋째든 말이다. 첫째와 둘째는 부족한 살림으로 키워야 했기 때문에 나의 애씀은 더 들어갔다. 학년으로 2년 차이인 딸들을 동시에 학원에 보내고 예체능 활동을 시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조금 더 나은 학원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학원을 순례하고, 살림을 쥐어짜며 학원비와 악기 레슨비를 대고, 밥 먹을 시간조차 없어 굶어가며 퉁퉁 부은 손으로 글을 쓰던 나의 수고를 아이들이 다 알 수는 없었다.
아들아이는 자신이 먹는 1인 1 치킨은 알지만, 누나들이 그렇게 먹지 못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보이는 것만 보았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보이는 것만 보았다. 하나님께서 내게 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 역시 수고하고 애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수고와 애씀이 사람의 그것과는 다른 차원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 하셨음’은 분명하다.
사람이 가장 분노할 때는 그 노력한 과정이. 폄훼될 때다. 하나님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감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 그 과정을 다 무시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원망 역시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왜 그토록 분노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노력과 과정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보이지 않는 그것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오래전,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 한 분이 tv에 나오 신 것을 보았다. 8남매인가 9남매를 두었다는 그 할머니는 이제 바라시는 게 뭐냐는 사회자의 물음에 대답하셨다. 아이들이 내게 고맙다고 하는 것이라고... 9남매를 키워내기까지 할머니는 아마도 자신의 뼈를 깎아내야 했을 것이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린도 전서 2:11
하나님의 일을 나는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분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해야 한다. 그래서 감히 원망할 수 없다. 구체적으로 보이는 은혜가 아닌, 그것을 주시기까지 ’그분의 일하심‘으로 인해 나는 감사한다....
나 역시 그 할머니처럼 내 아이들이 언젠가 내 수고를 헤아리고 고맙다 하는 날이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