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들롱이 죽었다.

by 심시현

알랭들롱이 죽었다.

‘세기의 미남 알랭들롱 별세’ 아침 기사 상단을 차지하고 있는 글귀였다. 나는 한참 동안 기사를 읽고 제목을 다시 들여다보고 기사 옆에 있는 알랭들롱의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이 배우가 죽었구나?! 기사 제목 앞에 결국, 마침내, 드디어 이런 부사들을 붙여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을 중얼거리듯 낮게 읊조렸다, 아무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기사와 사진에서 눈을 못 떼는 사이, 내 의식은, 오래전 오래전, 갈래머리 땋고 희디 흰 칼라의 교복을 입던 그때로 타임슬립되고 있었다.

내 십 대 시절이 알랭들롱의 전성기였다는 것은 의도치 않은 행운이었다. 나는 알랭들롱을 좋아했었다. 그냥 좋아하 것이 아니고, ‘정말’이라는 수식어를 열 번쯤 붙여도 모자랄 만큼 좋아했었다. 알랭들롱은 지금까지 내가 열심을 다해 좋아한 유일무이한 배우였다.

그의 영화가 개봉되면 나는 보충수업을 빼먹든 청소를 빼먹든,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개봉 며칠 안에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수업을 땡땡이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나는 영화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 알랭들롱을 보러 갔었던 것 같다. 그는 영화보다 더 매력 있었고, 영화보다 더 흥미로웠다.


그의 잘생김이 가장 잘 돋보였던 쾌걸조로, 우울함과 어둠이 멋지던 체이사, 하늘 높이 걸려있는 단두대를 보고는 격한 몸짓으로 뒤에 있는 장가방을 돌아보던, 절망을 가득 담은 눈빛, 그는 안 멋있던 적이 없었다. 사실 영화의 스토리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스토리보다는 영화에서 두드러졌던 어떤 한 장면, 이 배우의 어떤 표정, 제스처 등이 정지화면이 되어 선명히 남아 있다, 마치 한 장 스냅사진처럼.


어린 집시 아이를 사무치듯 가슴에 끌어안던 루지탕의 마지막 장면, 낡은 레인코트를 입고 어깨를 수그린 채 어둡고 누추한 거리를 걸어가는 뒷모습, 암체어에 깊숙이 앉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 그런 장면들은 그 하나하나가 그림이어서, 할 수만 있다면 집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자기들의 소지품에서 알랭들롱의 사진이 보이면 , 네 애인 여깄다-하며 내 책상으로 건네주었다. - 그때는 아이들이 그림엽서 같은 배우들의 사진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알랭들롱은 중년이 더 멋진 배우였다. 미간 사이의 두 줄 주름이 알랭들롱만큼 멋있는 배우는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그는 갈래머리 곱게 땋았던 내 십 대, 이유 모른 채 기쁘고, 이유 모른 채 슬프고 진지하고, 이유 모른 채 웃음이 터져 나오던 그때의 한 부분이었다.


피카드리, 단성사,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그게 뭐냐고 하겠지만, 그때는 시내 한가운데 있는 그런 영화관들이 개봉관이었다. 멀티플렉스에 익숙한 아이들이 본다면 그 규모에 기함을 할 것 같다.

퇴계로 입구에 대한극장이 있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마지막날이면 학교에서 대한극장으로 단체관람을 자주 갔었다. 중학교 1, 2학년 때는 맨- 반공영화, 혹은 계몽(?) 영화류만 보여주더니 학년이 올라가니 영화의 장르가 바뀌었다. 나바론, 콰이강의 다리, 그때 단체관람으로 본 영화들이다. 그런 영화는 그레고리 팩도 멋있고 반공영화보다 재미있었지만, 너무 시끄러워서 잘 볼 수가 없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그 극장에서 아이들은 더 어마어마하게 떠들어대서 영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뭐라고 떠들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아이들이 영화 내내 쉴 새 없이 떠든 것은, 어째서인지 선명하다.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끝난 후였다. 영화가 끝나고는 선생님들의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내에서 돌아다니지 말고 모두 곧장 집으로 가야 한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컸지만 선생님의 말씀이 지켜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알랭들롱 영화는 왜 단체관람을 안 하는지가 그 시절 나의 큰 불만사항이었던 것 같다.

알랭들롱이 죽었다.

문득 떠오른 어린 날로부터 흐른 시간이 놀랄 만큼 길다. 10대를 지나고 2,30대를 지나고... 그 시간 속에는 희망도 절망도 환희도 우울도 있었겠지만 어느덧 다 용해되고 농축되어 버린 듯하다. 이제는 본래의 모습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것, 그것을 성숙이라고 해야 할지 그리움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분명하고 명확한 것을 좋아했지만 어쩐지 모호한 것들이 많아져 간다. 그 이유 역시 모호하기만 하다.


‘태양은 가득히’의 ost는 너무 어렵다. 그 감정을 정확히 짚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극적이고 슬픈듯한 감성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이제 다시 들으니, 어쩌면 삶의 알 수 없는 모호함, 그것을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형사가 다가왔을 때, 리플리는 가장 비싼 음료를 들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과오를 후회했을까? 종 대하듯 친구를 대한 필립의 잘못은 리플리의 죄보다 가벼운 걸까? 가난한 청년의 욕망은 그 자체가 잘못일까...?


알랭들롱. 이 근사한 배우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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