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들은 온전치 못한 정신에도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면 자꾸 가야 한다며, 침대에서 내려오는 위험한 행동을 한다고 했다. 가야 해, 얼른 가야 해, 어디를 가야 하냐고 물으면- 집, 집에 가야 한다고 할머니들은 대답한단다. 왜 집에 가야 해요? 집에 가서 뭐 하시게요?
“밥 해야 해, 밥 해야지”
살인 혐의로 잡혀가는 배종옥이 경찰에 강제 연행되는 과정에서 친척을 보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정수 밥 좀 챙겨줘. 밥 좀 챙겨줘. 그녀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들의 밥을 챙기라고 시누이에게 절규하듯 외친다. 그 시간 그녀에게는 자신의 연행이나 앞으로 치러 내야 할 형사 과정보다 아들의 밥이 더 중요한 가치였다. 영화 ‘결백’의 이야기다. 배종옥은 아마도 특별하지 않은, 우리 보통 어머니들의 정서를 담아냈을 것이다.
무릎 수술이 결정되었다.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따라 얼추 계산해 보니 입원 기간이 족히 한 달이 넘어갔다. 주위 사람들은 다 무릎 수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수술 후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며, 이구동성 걱정해 주었다. 착한 마음의 사람들이 걱정해 주는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환자인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 먼저였고, 다음 차례는 집에 있는 남편과 아들이었는데, 대부분 정말 똑같은 말을 했다. “밥은?” “밥은 어떻게..?”
그놈의 밥!!-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가장 하찮아 보이지만, 절대 하찮지 않은 것, 밥은 그런 이상한 위치에 놓여 있다.
밥을 하기 위해 집에 가야 한다는 요양원 할머니의 말을 들은 대부분은 연민과 어이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연민은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밥을 놓지 못하는 할머니의 삶이 가엽기 때문일 테고 어이없음은 죽음 앞에서 챙기는 것이 고작 밥 따위라는 것에 대한 감정일 것이다. 그 기사를 오래 보았다.
세상에는 중요한 일이 정말 많다. 나라를 지켜야 하고, 회사도 챙겨야 하고,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도 가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일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회 정의가 목숨을 걸 일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런 일들에 ‘하찮음’이라는 딱지를 붙이거나 헛웃음을 날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은 ‘중요함’을 공인받고 있다는 의미다. 일이 중요하니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아무도 밥 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밥이 하찮으니 밥 하는 사람도 하찮아서일까...?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둔 대부분의 여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밥에 묶이고 얽매이고 통제당한다. 그렇게 배운 적이 없고,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이 없어도 시간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을 그렇게 만든다. 그녀들이 보고 배운 게 없고, 자의식이 없고, 자기애가 없어서, 무엇보다 하찮아서 그렇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밥 하는 여자들이 하루에 두 끼씩만 차린다고 가정해도 한 달이면 60번, 일 년이면 720번, 그 일 년이 10번이면 7200번이 된다. 7200번이 2번이면 14,400번, 그리고 3번이면 21,600번. 30년 가정을 이룬 여자는 최소 21,600번의 밥상을 차린 것이다. 같은 과정을 이 정도 횟수로 반복하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이 정도 횟수로 반복했어도 멈추지 않고 다시 반복해야 하는 것이 밥상이다. 이 밥상으로 가정은 단단해지면서 사회의 건강함을 받치는 초석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아이들은 자라 한 명의 성인으로 우뚝 선다. 밥은 결코 하찮지 않다. 때문에 밥을 하는 여자도, 밥 하는 일도 하찮을 수가 없다.
밥은 한 명 한 명 개인을 지키고, 그 개인으로 구성된 가정을 지키고, 결국 사회의 건강함을 지키는 원재료 같은 것이다. 밥은 일하고 공부하는 가족에 대한 실제적 응원이며, 가족을 사랑하는 어머니가 갖는 강력한 책임감이다. 밥을 먹지 않는, 밥이 없는 가정은 상상할 수 없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따뜻한 집은 항상 따뜻한 밥상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지고지순한 가치와 밥상을 차리는 과정의 피곤은 다른 것이다. 밥상은 복합적 사고 과정인 동시에 노동이다.
‘오늘 뭐 해 먹지!’ 드라마나 영화에서 ‘아줌마’의 통속성을 표현할 때나 개그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존경심이나 감사함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냉소지만, 현실의 모든 밥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번 먹을 식당 메뉴를 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온 가족이 먹을 메뉴를 정하는 것은 당연히 녹록지 않다. ‘뭐 해 먹지!’에서 ‘뭐’를 정하기 위해서는 요리하는 데 드는 비용, 가족의 식성, 조리 시간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에는 우유부단하지 않은 결단력까지 필요하다. 그야말로 복합적 사고 과정이다. 이런 복합적 사고 과정 뒤에는 노동이 따른다. 식재료가 없다면 장을 봐야 한다. 밀키트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재료는 다듬고 씻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다음은 불이다. 삼복더위에도 음식을 하는 어머니는 불 앞에 서야만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한 접시의 음식이 비로소 식탁 위에 올려진다. 이 과정이 매일매일 반복된다. 적지 않은 여자들이 죽음 앞에 이르고서야 여기서 벗어난다.
몇십 년 밥상을 차린 여자들의 한결같은 소망이 밥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노릇이다.
밥은 가정 안에서 특히 더 대접받지 못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늘도 꾸역꾸역 가족들의 밥상을 차린다. ‘셰프’라고 불리는 요리사는 존경과 명성을 얻어도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어머니’나 ‘아내’에게는 아픈 무릎과 허리뿐이다. 영리한 세상은 주방에서의 시간을 아껴 줄 밀키트나 간편 식품, 나아가 배달까지 만들어 냈지만, 인류의 생명 유지 수단이 음식인 한,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밥이 갖는 이중성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로 남는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남편과 아들의 밥을 걱정하는 친지와 이웃들에게, 내가 아파 죽겠는 지경에 아이들도 아닌, 성인 남자들의 끼니까지 걱정해 줘야 하냐는 핀잔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선의를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나 역시, 내가 없는 사이 그들의 배를 채워 줄 먹거리를 어린아이 준비물 챙기듯 챙겨놓았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남편과 아들이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최면에 걸린 듯 그런 ‘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