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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문학은 필연적으로 ‘옷 벗기’가 되는 거야”
소설론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옷 벗기’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맺었다. 그때 이후로 ‘옷 벗기’는 글을 쓰는 내 의식 어딘가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옷 벗기’는 모든 글에는 자기 경험, 자기 고백, 자신의 가치관 등이 녹아 있다는 개념이다. 수필은 당연하고 소설이나 시에도 ‘옷 벗기’는 녹아 있다. 문제는 자기 경험이나 고백을 얼마나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키며 보편적 가치로 끌어올리느냐인데, 여기에 성공하면 좋은 글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글이 된다 하겠다.
‘옷 벗기’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단편 소설이 있었다.
[젊은 작가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맞선을 봤고, 다행히 서로 마음에 들어 결혼 얘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직업이 소설가라는 데에 약간의 경이감과 호기심이 있어 여자의 작품을 모두 찾아 읽었다. 그리고는 파혼을 통보해 왔다. 이유를 묻는 여자에게 남자가 대답했다. -니 작품을 모두 읽었어. 그 말은 -너라는 사람에 대해 알았어. 와 같은 의미였다. 여자는 거기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작품 속의 작가가 곧 지은이임에 의심이 가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top of top’에 위치하는 작가의 문학 교실에서 수학을 한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내가 흠모해마지 않던 그분은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력 있는 여자의 청혼, 재혼으로 암암리에 유명세를 타는 분이었다. 그분의 수업을 듣는 중에, 그분만큼이나 유명한 작가가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수상 작품의 스토리가 대놓고 그분의 이혼과 재혼 이야기였다. 수상작이 발표된 다음 주 수업에서 용감한 수강생이 우리 모두가 궁금해하는 질문을 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수상 작가와 좀 안 좋은 사이셨어요? 그분은, 수상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읽지는 않았다고 하며 작품에서 대놓고 자신을 욕하지 않았으면 아무 대응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얼마나 자기 얘기가 궁했으면 남의 얘기로 작품을 썼겠나....!”
선생님의 입장은 자기 옷을 벗는 것이 먼저고, 남의 옷을 벗기는 것은 약간 하수라는 의미로 들렸다. 다르게 생각하면 작가란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소설의 ‘옷 벗기’는 허구라는 형식을 빌린다. 가장 개연성 있는 허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저한 ‘옷 벗기’가 필요해 보인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가장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의 ‘옷 벗기’는 소설과는 차이가 있다. 소설은 자기 경험이 허구라는 형식의 틀 안으로 들어가지만, 수필은 자기 고백이 그대로 작품이 되는 장르다. 그래서 소설에는 없는 ‘성찰’이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작가의 성찰은 다시 보편적 가치로 잇대어진다. 이것은 수필의 기본 형식이지만 동시에 수필의 한계이기도 하다.
소설에서의 자기 고백은 한계가 없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악하든, 허구라는 형식을 통해 스토리가 되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심리적 부담이 적고 결말도 자유롭다. 하지만 수필은 허구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고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같은 이유로 작가에게는 큰 심리적 부담을 준다. 결국 내놓을 만한 이야기만 나온다. 추하고 험한 이야기, 부끄러운 이야기는 ‘내놓을 만한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수필이 소설처럼 치열하거나 인생의 적나라한 모습을 담지 못하는 이유이며, 규방문학, 식자층의 문학이라는 비난 아닌 비난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수필을 배울 때면 어김없이 나오는 설명이 ‘신변잡기’다. 신변잡기! 사실 듣기만 해도 지루한 말이다. 신변잡기인 글을 써서 성공하는 예도 적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의 대부분은 대중의 관심을 받는 누군가의 사생활, 혹은 드라마의 소재로 어울릴 듯한 이혼, 불륜과 같은 이야기다. 이런 글의 지은이들은 앞에서 말한 수필의 한계를 뛰어넘는 ‘옷 벗기’를 한다. 하지만 그런 내용이 글이 되고 책이 되고 나아가 문학으로까지 취급받는 데에는 이 시대가 갖는 독특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글에도 어김없이 붙은 제목이 에세이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복기해 보면, 수필은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뉜다. 철학적이며 깊은 사유가 필요한 무거운 주제를 담은 글이 중수필인데, 이 중수필을 에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나오는 대부분의 글은 에세이가 아니라 경수필인 미셀러니라고 하는 게 맞겠다. 중수필을 쓰는 작가는 많지 않다. 김형석, 이어령 등이 그나마 대중에게 알려진 분들인데, 중수필 작가가 많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철학적 사유와 논리적 구조, 그리고 문학성까지 갖춘 글쓰기가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신변잡기’의 신변에서 훌쩍 벗어난 에세이는 글 쓰는 모든 이들의 지향점일 것이다.
하지만 좋은 경수필이 갖는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경시할 수는 없다.
‘본격수필’이라는 개념을 세운 수필가 권대근은 수필에도 허구의 영역을 도입할 수 있다고 과감히 주장했다. ‘신변’에서 찾는 소재와 사유에 한계가 있고, ‘옷 벗기’도 망설여질 때, 수필가는 고민과 좌절에 빠지게 된다. 그때, 길을 터줄 무언가가 필요한데 그것을 허구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필의 허구와 소설의 허구는 다르다. 소설의 허구는 작품 전체를 이끄는 서사지만, 수필에서의 허구는 작가를 사유와 성찰로 이끄는 매개물이다.
‘허구 수필’은 새로운 이론으로 보이지만, 우리 수필사를 돌아보면 진즉에 나와 있었고, 나름 성공을 했다. 대표적 작품이 잘 알려진 피천득의 ‘인연’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연’을 피천득의 대표작으로 꼽는데, 그의 수필집 제목 역시 ‘인연’이다.
‘인연’을 읽으면 소설이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다. 1인칭 시점에다 서두에 나오는 춘천, 성심여대 등의 장치와 마지막 부분의 아련한 회환, 다시 등장하는 춘천은 독자가 작가의 경험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할 수 없게 한다. 전체적인 서사가 주는 아름다움과 낭만적 분위기도 독자를 작가의 의도대로 이끄는 강력한 요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이다. 피천득은 작품을 써놓고 소설로 발표하려고 했는데, 출판사의 실수로 수필로 발표되었다고 한다.
‘인연’은 수필의 일반적 형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지만, 허구를 통해 수필의 지경을 넓혀 놓은 것만은 확실하다. 더해서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통해 경수필의 아름다움과 따뜻함을 체험한다. 수필을 쓰는 사람이라면 허구 수필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 정의가 맞지 않음을 안다. 붓가는 대로 쓸 수가 없다. 허구를 넣은 수필이든 적나라하게 ‘옷 벗기’를 한 글이든 붓가는 대로 썼다간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내용과 구성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있어야 한다. 문학적 형상화란 시점에서 보면 소설보다 어려운 것도 같다. 소설에서의 형상화는 서사의 형상화지만 수필에서의 형상화란 정서, 가치에 대한 형상화이기 때문이다. 촌스러워서는 안 되고 고루해서도 안되며 새롭고 창의적이며 날카로워야 한다. 쉽지가 않다. 날카로운 성찰을 통해 가장 평범한 일상의 소재를 버무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와 가치를 빚어내는 것. 동시에 문학성을 잃지 않을 것, 늘 어렵다. 글을 쓸 때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나를 보며 컴퓨터가 나오지 않았으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우울한 생각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늘 같은 결론과 마주한다.
더 열심히 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