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을 정리하다가 어릴 적 일기장을 발견했다. 몇 년 전 본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일기장에는 ㅇㅇ 국민학교, 4학년 ㅇ반, ㅇㅇ번이라고 적혀있었다. 펼쳐보니 마침, 이맘때의 일기여서 반가운 마음에 읽어보았다.
엄마가 아빠 몰래 오디오를 사 온 일, 친구의 생일에 용돈이 부족해 천 원짜리 초콜릿을 사준 일, 같은 학교 학생이었던 담임 선생님의 딸과 친해져, 친구들과 선생님 댁에 놀라갔던 일, 비가 온 다음날 지렁이 때문에 짜증 났던 일.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았던 것도 있고, 일기를 보면서 떠오른 기억도 있었다.
마흔이 되어 국민학교 4학년의 나를 이렇게나마 만날 수 있다니. 일기장을 버리지 않고 보관해온 당시의 나에게도, 그동안의 나에게도 고마웠다.
30년 전 3월 이맘때, 일기는 어땠을까?
제목: 담배 심부름과 동시
‘덜커덕’
“ㅇㅇ아! 담배 사 와라”
“(아이고, 또 시작…) 알았어”
“빨리 갔다 와!”
‘치- 자기는 배짱 좋게 비디오나 보면서”
오늘도 담배 심부름.
그러나 그 값은 받는다.
하지만 담배 심부름은 너무 지겹다.
그러나 가다가 산에 핀 진달래를 보고 내가 동시를 한번 지어 보았다.
<진달래 아가씨>
무겁게 오른
심부름 길에.
저 산너머
보이는 색실은 무엇일까?
저렇게 이쁜 건
처음인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진달래 아가씨가
있었어요.
나는
진달래 아가씨에게
‘뭐하셔요?’ 물으니
‘봄소식 전하고 있어요’ 하면서
다시 온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어요.
이야기를 끝내고
뒤돌아보니 진달래 색은
더 진해지고 발걸음도 가벼워요.
내가 살던 시골은 봄이면, 앞산에 진달래가 탐스럽게 피었다. 어릴 적에는 꽃의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을 지켜면서 마당에 앉아 진달래가 만개한 앞산을 보았다. 산은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삼 예쁘고,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동시는 갑자기 뒤로 가서 존댓말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진달래라는 동시 말고도 몇 개의 동시를 써 놓았다. 담배는 아마도 막내 외삼촌의 심부름이었던 것 같다.
4학년의 나는 일기를 쓰면서 마흔이 된 내가 이 일기장을 다시 볼지 상상이나 했을까? 어쩌면 막연히 생각을 했었기에 일기장을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열심히 다이어리를 쓰고 있다. 어릴 적만큼은 아니지만, 먹고 쓰는 돈, 소소한 일상적인 메모가 가득하다. 이 다이어리도 남겨두면 먼 미래의 내가 다시 읽어볼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상상했던 먼 미래의 내 모습처럼, 미래의 나는 이맘때쯤 어디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