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oving
치료를 시작하고 나니, 어쩌면 처음으로 ‘가만히 있는 법’을 배운 것 같았다.
늘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시간 속에서만 살아오다 보니,
갑자기 비워진 시간은 처음엔 막막했고, 이내 낯설었다.
하루가 길었다.
그 무렵, 교수님은 내 상태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마음만 아픈 거 아닙니다. 이제 몸도 챙겨야지요.”
가정의학과 진료를 함께 받아보고, 식단과 운동도 가볍게 시작해 보자고 했다.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좀처럼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금방 지쳐서 포기할까 봐,
결국 또 나 자신에게 실망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요.”
그리고 천천히 진료실 문을 닫았다.
아침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오후엔 간식을 챙겨 학원에 보냈다.
저녁이면 침대에 누워,
TV를 켜둔 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
그런 나를 오랜만에 집 밖으로 끌어낸 건,
학교의 녹색어머니 봉사였다.
8시 반까지 등굣길 안내가 있어 아이들을 챙겨 분주히 나섰고,
봉사가 끝난 뒤 깃발을 반납하고 돌아오던 길,
익숙한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은채가 다니던 어린이집 시절부터 알고 있던 엄마였다.
몇 년 동안 늘 “안녕하세요” 한마디로 지나쳤던 사이였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그 인사가 길어졌다.
“오랜만이에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그 평범한 인사가, 우리 사이 첫 대화의 시작이 됐다.
그 엄마와 함께 길을 건너는데, 다른 녹색어머니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얼굴들이었지만, 인사를 건네자 다들 부드럽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곧, 대화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어제 쉬는 시간에 또 그런 일이 있었대.”
“이번엔 아이가 다쳤다고 하더라고.”
별생각 없이 듣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은채와 같은 반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내 일이었다.
엄마들의 말에 따르면,
반 안에 한 아이가 종종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어제는 의자를 갑자기 빼는 바람에
아이 한 명이 넘어져 다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해당 아동은 정서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담임 선생님도 수업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학교 측 역시 상황을 인지하고
보다 적절한 대응을 고민 중이라는 말이 오갔다.
“우리 애도 무섭다고 하더라고요.”
“수업 분위기도 많이 흐트러진다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괜히 나섰다가 아이에게 더 피해가 갈까 봐…”
엄마들의 얼굴엔 걱정과 망설임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그건 불만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누구도 먼저 나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목소리를 낮췄다.
“같은 반 학부모들이 함께 의견을 모아서
교육청에 요청서를 보내보면 어떨까 해요.
학교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위에서 지원 체계가 마련되면,
선생님들도 아이들도 한결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다행히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뜻을 모아 내용을 정리했고,
학부모 공동명의로 요청서를 전달했다.
며칠 뒤, 교육지원청은 요청 내용을 받아들이고
학교와 협의해 공익요원을 학급에 배치했다.
해당 아동에 대해서는 부모와 논의해
심리상담 등 전문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외부 기관과의 연계를 진행하기로 했다.
자칫 학교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상황은
큰 마찰 없이 조용히 마무리되었고,
모든 아이가 빠짐없이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학교 측도 필요한 조치를 더 빠르게 취할 수 있어
다행스럽게 여겼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정말 고마워요.”
“이번 일로 우리 아이들도 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먼저 나서줘서… 고마워요, 은채 엄마.”
그 따뜻한 말들 사이에서,
나는 엄마들의 얼굴과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되었다.
조금씩, 내 삶에 다시 사람들의 온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며칠 뒤, 그중 한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내일부터 주민센터에서 줌바 수업 신청받아요.
혹시 같이 해보실래요?”
나는 한참 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도 같이 해볼까요?”
라고 답장을 보냈다.
움직일 준비가, 아주 조금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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