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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Apr 27. 2022

칸 영화제가 그렇게 대단한가?

영화 〈중경삼림〉(1994)

칸 영화제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딱 세 종류이다. 영화 관계자, 기자, 그리고 젊은 영화광. 젊은 영화광의 경우 motivation letter을 제출하면 심사를 통해 3일간 영화제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나는 영화 전공도 아니고 관련 경험도 없다. 어디까지나 관객으로서 영화를 좋아하는데 좀 심하게 좋아한다. 올해 내가 멀리 이사를 간 덕에 칸에서 가까운 니스는 비행기로 2시간도 안 걸린다. 칸 영화제에 들어갈 수 있다니! 눈이 뒤집혔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대사로만 이루어진 전혀 다른 내용의 글 하나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출처를 보면 나의 취향을 완벽히 파악할 수 있을만한, 아예 내 추천 목록으로 사용해도 될만한 그런 글! 그저 영화가 좋아서 쓰고 싶었기에 한 쪽짜리 지원 동기에 연습삼아 써보았다. 그리고 너무 힘들었다. 영화 대사로만 전부 작성하기에는 글의 형식이나 내용 측면에서 무리가 있어 변형과 모티프를 허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맨 처음 To whom it may concern에서부터 맨 마지막 Yours very sincerely and respectfully까지 내 이름과 칸 영화제 관련 고유명사가 들어가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영화 대사 그 자체이거나 그 변조이다.


칸 영화제에 제출한 motivation letter 일부



영화는 문학이다.


라는 게 내 소견이다. 나는 이야기라면 그게 영화든, 줄글이든, 말이든, 음악이든 거의 구분하지 않는다. 내 내면에서 똑같이 동작한다.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문학은 나와 전혀 다른 처지에 있는, 내가 평생 얼굴 볼 일도 없고 나와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일에 공감하여 눈물로 가슴을 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문학의 이 사회적 특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는 문학이다.


https://365filmsbyauroranocte.tumblr.com/post/625707958724182016/embed


내가 영화를 볼 때면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서로 다른 프레임을 통해 나는 언뜻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보였던 세상의 이면을 발견한다. 내가 보지 못한 구석에서 세상이 조금 망가진 채로 웅크려 자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그 못난 모습이 싫다가, 사랑스럽다가, 나와 닮았다는 안도감이나 위로를 받기도 하고,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기뻐할 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영화는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든다. #663도 모르게 페이가 그의 좁은 집구석으로 숨어들어가 양치컵, 물고기, 비누를 바꾸는 것도 모자라 아예 그의 삶을 온통 바꾸어버린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내 세계는 바뀌고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오늘 낮에 칸 영화제로부터 젊은 영화광의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저녁에는 학교에서 상영해주는 〈중경삼림〉, 대만어와 홍콩어와 영어와 일본어가 나오고 영어 자막이 달린, 한국어는 조금도 없는 이 낯선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돈 생각을 안 한다. 나는 요 며칠 돈 생각밖에 안 했다. 영화에 비치는 골목골목은 새 돈 냄새보다는 낡은 돈 냄새가 난다.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럿을 거치고 갔을 작은 단위의 떼 묻은 동전들. 그들은 돈을 생각하는 데 시간을 쏟지 않고 지나간 사랑에, 파인애플 통조림 유통기한에, 울고 있는 집에 마음을 쏟는다. 그냥 인생을 그렇게 흘려보낸다.


그들을 닮고 싶다. 그게 영화적 편집이라 해도. 아무리 찌질하게 굴어도 그들은 어딘가 멋지다. 진심이니까. 사랑에 진심이고, 이별에 진심이고, 또 새로운 사랑에 진심이고…. 술집에서 만난 남녀 둘이 호텔에 가서 한 명은 내내 먹고 한 명은 내내 잠만 자다가 나오는 게, 남의 집에 무단침입했다가 첫 데이트 신청에 바람맞히는 게 진짜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영화가 나는 좋다. 그리고 내가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나도 돈이 없고 이런 영화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그들을 닮은 건가?






내가 돈이 많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칸 영화제에 갔겠지만, 나는 지금 돈이 없다. 경험은 값지다. 정말이다. 경험은 너무나 비싸다. 역시 칸 영화제는 대단하다. 아무나 가지 못한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기회는 없겠지만, 〈중경삼림〉을 보니 마음이 섭섭하면서도 좋다. 비가 내리는데도 더운 홍콩 날씨 같다. 타지에서 타국의 언어로 생각지도 못한 위로를 다 받는다.



그래도 난 여전히 내가 쓴 마지막 문단이 마음에 든다. 칸 영화제에 잘 초대받지 못하는 대중 영화와 애니메이션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헝거 게임〉(2013)과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로 엮은 맺음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헝거게임은 초대를 받긴 했으니 나와 처지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표지 출처


중경삼림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7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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