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떤 걸 허용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게 어떤 걸 권장하는가지.
- 프레드릭 배크만, 『베어타운』, 이은선 옮김, 다산책방(2018), 17%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면 잠시, 그러나 한 번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고민에 빠진다. 이런 글은 아주 희망적이지는 않다. 그렇다고 아주 비관적이지도 않다. 약간의 희망과 약간의 비관을 섞으면 현실이 될까, 아니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희망이 될까? 희망을 믿으면 나 자신을 속이는 기분이 들고, 비관을 믿으면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기분이다.
내가 당신을 믿어도 될까. 사람이 사람을 믿어도 될까.
베어타운은 하키 마을이다. 베어타운 사람들은 하키를 하든 하지 않든 모두가 하키에 관심이 많다. 이번 청소년팀이 우승을 하면 무너져가는 마을에 하키 아카데미가 세워질 거고, 후원금이 늘어날 거고, 유망주들이 하키를 배우러 올테고, 정치인들은 하키 경기장이나 쇼핑몰을 지을 거고, 그러면 무너져가는 마을은 이전보다 좋아질 수 있다. 그런데 청소년팀은 케빈과 그 외의 고만고만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케빈이 아니면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케빈은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케빈이 마야를 성폭행했다.
마을 사람들은 다채롭게 반응한다. 그러나 가해자 편은 시끌벅적하고 피해자 편은 침묵을 지킨다. 세상이 가해자 중심적이라고 욕할 때, 내가 말하는 '세상'에 나는 없다. 나는 내가 예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말한다. 나도 그 세상의 일부라고. 마야가 집에 돌아가자마자 온 몸을 씻고 증거들을 모두 불태워버렸을 때, 나는 생각한다. '그러면 안 돼! 갖고 있어야지!'
마야가 그 상황에서 이성적일 리 없다. 이성적인 판단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마야는 상처 입은 영혼이다. 하지만 나는 마야가 냉철하게 굴기를 바란다. 마을 사람들은 마야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케빈의 말도 믿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에서는 둘 중 하나이다. 마야의 밀을 믿지 않는 것은 케빈의 말을 믿는 것이다. 아직 편을 들지 않으면 가해자의 편을 든 것이다. 그들이 선과 악을 구분하기까지는 제3의 존재, 아맛이 필요했다.
왜 그는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이 케빈인지 아니면 아맛인지 고민했을까. 왜 마야의 주장으로는 부족했을까.
- 프레드릭 배크만, 같은 책, 89%
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인간적이고 좋은 구석이 있다. 케빈마저 그렇다. 그러나 모두가 마야의 편을 든 것은 아니다. 바로 그게 문제다. 볼드모트나 오크가 아닌, 타노스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누군가의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게. 때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그들이 누구의 이웃이고, 아들이고, 친구이고, 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게.
케빈의 경우 하키부 주장이었고, 친구를 좋아했고, 외로움을 무서워했고, 소속감에 안도감을 느꼈고, 자신의 범죄를 덮으려 했고, 총이 들이밀어졌을 때 겁을 먹었다. 그의 하키 실력과 집안 배경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엮이며 그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낸다. 마을 사람들이 진실을 알면서도 고객이 끊길까, 일자리를 잃을까, 더 이상 하키를 하지 못할까 가해에 동참하는 모습은 비열해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슬프다. 그들에 대한 공감은 선을 넘어 닿으면 안 되는 곳까지 침투한다. 케빈과 마을 사람들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면서 더불어 그들의 잘못까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상황이 그렇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이해받지 못한 단 한 사람이 남는다. M. 그 아이. 그 걸레.
마야.
네가 정직하면 사람들이 너를 속일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라. 네가 친절을 베풀면 사람들이 너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친절을 베풀라. 네가 오늘 선을 행하더라도 내일이면 잊힐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 프레드릭 배크만, 같은 책, 3%
볼드모트 한 명을 물리치고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해리포터와 그의 친구, 가족, 스승을 비롯해 가장 보잘것없는 대우를 받은 집요정 도비까지 필요했다. 마야의 세상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어떻게 해야 마야의 세상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 우리의 문화는 성공, 돈, 명예를 권장한다. 성공에서 정직으로, 돈에서 친절로, 명예에서 선으로 넘어가는 다리를 우리는 찾을 수 있을까…….
찾아야만 한다는 의지와 함께 의심이 마음에서 동등하게 자라난다. 나는 양쪽에 번갈아 물을 준다. 희망이 바보같은 낙천주의인지, 절망이 바보같은 비관주의인지 나는 영영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