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파 선생은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 금식을 행했다. 그런데 내가 빵을 먹고 싶을 때 먹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유 아니던가? 일파 선생이 말한 '자유'는 무엇인가? 작가는 성경이나 사상 속 욕구로부터의 자유를 논하는 듯하다. 욕구하는 자는 욕구에 종속된 사람이다. 일파 선생은 식욕이 대변하는 육체의 욕구를 절제함으로써 영혼의 자유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소설에서 일파 선생의 말씀과 그를 대하는 대중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예수님과 사람들의 관계를 닮았다. 사람들은 일파 선생의 모든 발언을 '말씀'으로 새긴다. 이것은 흡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구하러 올 메시아, 자신의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의 죽음 이후 그를 신격화하는 작업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기독교에서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다.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무결한 그가 대신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았다. 사람들은 '부정한 빵'에 대한 선생의 유언을 그가 진 십자가에 대한 비유로 생각했다. 그의 죽음이 기다림에 대한 보답이었다는 것은 곧 선생의 희생을 통해 자신이 구원받고자 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세 개의 빈 유리잔
배영섭은 일파 선생이 몰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진실로 여겼지만 사실 유리잔에는 음식의 흔적, 진실의 결정적 증거가 없었다. 배영섭과 마찬가지로 메시아를 향한 사람들이 믿음은 성부 성자 성령을 연상시키는 빈 유리잔처럼 실체가 없다.
어찌됐건 배영섭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게 된 일파 선생의 비밀을 사람들에게 밝히려 했다. 그는 선생의 흠결로 인해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설득한다. 그의 주장은 3·15 부정선거 이후 사람들이 기다리던 '봄'과 닿아있다. 신은 인간과 평등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은 독재 체제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영웅을 기다렸지만, 이는 새로운 독재 정권을 의미할 뿐이다. 배영섭은 신격화된 일파 선생의 인간성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진정한 '봄'을 가져다주려 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반은 평등이다. 내가 되는 것은 너도 되고, 내가 안 되는 것은 너도 안되어야 마땅하다. 나의 권리와 의무는 오로지 나만의 것이다. 부정한 빵도, 그 빵을 대신 먹어줄 신도, 그 덕에 내가 받을 면죄부도 없다.
누구나 각기 자기 능력과 분수에 따라 자기 몫의 정당한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이청준, 「뺑소니 사고」 中
뺑소니 사고
이 소설은 배영섭이 뺑소니 사고를 당하는 것으로 허무하게 마무리된다. 아직 내가 분명하게 풀어내지 못한 의문점이 있다. 배영섭의 진실은 왜 그의 직감에 의존해야만 했는가? 그의 죽음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여기서부터는 순전히 나의 추측이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를 채택하였지만 민주주의가 최선인지는 입증하기 어렵다. 체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배영섭과 마찬가지로 직접 증거가 없다. 그의 죽음은 그만 알던 진실이 불러올 수 있었던 미래, 곧 진정한 민주주의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가 뺑소니 사고로 인해 살해당한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뺑소니 사고는 범인을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독자는 신문으로 소식을 접하는 양진욱 부장의 태도를 보고 그가 범인이라고 짐작한다. 독자의 믿음 역시 심증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민중들, 배영섭, 독자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모두 실체가 없다. 육신과 구분되는 영혼을 닮았다. 우리가 오늘의 생존 욕구를 버리는 대신 얻고자 하는 자유는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