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로 코엘료,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국가 중 가장 높다고 한다. OECD 평균의 두배를 웃도는 수치다. 주변에서도 자살을 한 번쯤 생각해봤다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도 한다. 한 번 자살을 시도한 사람은 다시 한 번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 주변에 누군가는 지금도 남몰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시한 폭탄을 안고 살아가듯이.
파울료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자살을 시도한 여성이 어떻게 삶의 의지를 되찾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쉽게 접하지만 실제로 와 닿지는 않는, 꼭 살아야 하는 이유, 즉, 사랑을 위해 투쟁하고 자아실현을 끝까지 추구하는 열정의 중요성에 대하여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 한 여성이 있다. 젊고 아름답고, 원하면 언제든 남자를 얻을 수 있는, 안정적 직장과 수입이 있고, 적당한 가족이 있는, 평범한 여성. 베로니카라 불리는 이 여성은 어느 날, 자신의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자살을 시도한다.
"그녀의 삶은 이제 모든 것이 너무 뻔했다. 젊음이 가고 나면 그 다음엔 내리막길이다. 어김없이 찾아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노쇠와 질병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친구들. 이 이상 산다고 해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권태와 무기력함에 지친 베로니카는 수면제 네 통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깨어나 보니 불행히도 정신병동 이었다. 그녀의 시도가 실패한 것일까? 담당 의사는 놀라운 선고를 내린다. 앞으로 그녀가 자살 후유증으로 일주일 정도밖에 살 수 없을 거라고.
베로니카는 죽기 전에 자신의 욕구를 마주한다.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의 뺨을 바로 휘갈기기도 하고, 다른 남자가 보는 앞에서 성욕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릴 적 가졌던 피아니스트라는 꿈을 떠올리며 미친듯이 피아노를 치기도 한다. 모두 그녀가 살아온, 착하고 얌전한 여성스러운 모습과는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정신병동에는 다양한 환자들이 있다. 제드카는 한 때 유부남의 정부(情婦)였다. 그녀는 남자가 있는 낯선 나라로 떠나 싸구려 호텔에서 지냈다. 그러나 남자가 더 이상 그녀를 원치 않게 되었을 때는 본국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녀는 좋은 직장을 얻고, 잘생기고 똑똑한 남편을 만났으며, 주변의 부러움을 사며 결혼도 했다. 사회운동가가 되어 강연과 기고로 이름도 날렸다. 하지만 어느 날 불현듯, 그녀에게 놓쳤던 사랑의 기억이 다가왔다. 그녀는 사회적 신념만큼 사랑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잠식당했다.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버렸다.
마리아는 한 때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명예로운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하지만 공황장애가 느닷없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 시시각각 공포감이 닥쳐와 그녀의 숨을 막히게 했다. 동료들은 그녀에게 잠시 쉬다가 돌아오라고 다독였다. 남편도 다 잘 될 거라며 위로했다. 하지만 정신병동에 다다른 그녀에게 돌아온 건 해고 통지와 이혼 청구서였다.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고 그녀는 사회로 돌아가길 주저하게 된다.
에뒤아르는 외교관인 아버지의 뒤를 따라 브라질로 왔다. 이 곳에서 그는 신비주의와 영적 체험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이 자신의 뒤를 따라 외교관의 길을 걷길 바랐다. 어머니 역시 뛰어난 정치가인 아버지의 판단을 믿었다. 에뒤아르는 부모님 뜻을 따르지 않았다. 예술가들을 집에 들이거나 수염을 기르고 마약도 했다. 앞으로 미술을 전공하여 '천국의 환영들' 연작을 그리겠다는 포부도 세웠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아들에게 꿈을 접어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에뒤아르는 자신의 소명을 접어둔 채 우울감에 빠져 정신분열증에 걸린다.
다양한 환자는 저마다의 사연을 들려준다. 베로니카는 그들과 친해지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에뒤아르와 열정적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베로니카는 자신의 진짜 욕구를 추구할 용기를 얻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세상 밖으로 나가 마음껏 투쟁할 자신이 생긴다. 하지만 병동에서 내보내줄리 없다. 결국 베로니카는 에뒤아르와 병원을 탈출하게 된다. 바깥 세상에서의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녀는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환희와 함께 남은 인생을 기적처럼 맞이한다.
한편, 베로니카의 탈출 소식을 들은 원장이 병원에서 홀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사실 시한부 선고는 의도된 거짓말이었다. 그는 사람은 죽음을 자각할 때 더 삶을 치열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실험 대상이었다. 스스로의 임종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베로니카에게 삶의 소중함을 격렬하게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슬픔은 언제 찾아올까. 예전에 나는 출근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는 아침에 느닷없이 우울하다고 느끼고는 했다. 특히 전날 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음 날 더 공허했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정작 나의 진짜 힘든 얘기는 꺼내놓기 힘드니 그런게 아닐까?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도, 속으로는 다들 약간의 우울을 감추고 있을 것이라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에서는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건 사회적 억압 때문일 수도 있고, 부모의 강요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는 자라나며 조금씩 가면을 수정한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를 거치며 가면은 계속해서 더 두터워진다. 하지만 가면 속 나의 모습이 가면과는 많이 다르다면 어떻게 될까? 쌓였던 내면의 욕구가 분출하여 순식간에 가면의 주인을 산산조각낼 수도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제드카, 에뒤아르, 마리아는 모두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고 살던 사람들이다.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속으로는 오랫동안 아파했었다. 베로니카 역시 무난하고 안정적인 삶을 선택한 듯 보였지만, 타는 듯한 분노와 정열을 묵혀두고 있었다.
마지막이 있다고 생각하면 선택이 한결 쉬워진다. 베로니카는 자신이 스스로 안정적 선택을 내렸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건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기간이 길 수록 예측은 더 어려워진다. 베로니카가 용감한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은 기간이 일주일이 되었을 때, 그녀는 몰라보게 용감해졌다. 상상하지 못하는 미래는 누구에게나 두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눈 앞에 훤히 보이는 미래와 상황이 놓여있으면 누구라도 안심하고 도전할 수 있다.
자신의 욕구를 도외시한 안정적인 선택을 내린 뒤 우울해하고, 그 때문에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불확실성은 누구든 그런 식으로 선택하도록 한다. 하지만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때가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제드카처럼 어느 날 갑자기 공원을 지나다가, 에뒤아르처럼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다가, 마리아처럼 회사에서 업무를 하다가, 갑자기 문득 지나간 선택에 대한 후회와 슬픔이 물밀듯이 쏟아질 수도 있다. 그 슬픔에 당하지 않는 길은 오직 자신을 좀더 다독이고,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