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푸익, <거미 여인의 키스>
최근에 라틴아메리카 문화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하바나(Havana)' 와 '코코(Coco)'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라틴 소설이라고 하면 아직은 생소하게 느껴진다. 마누엘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는 그러한 점에서 신선하게 느껴질 만한 소설이다.
한 감방에 두 명의 죄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 명은 극좌파 운동을 하다가 정치사범으로 잡혀온 발렌틴, 다른 한 명은 남성의 몸을 갖고 있으나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동성애자 몰리나.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 발렌틴이 이성적이고 정치적 의식이 강하다면, 몰리나는 감성적이고 정치보다는 사람에 관심을 둔다. 둘은 감옥에서 식사로 나오는 옥수수죽을 먹다가 번갈아가며 복통을 일으킨다.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그걸 잊기 위해 서로 끝없이 영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등장하는 영화는 총 6편이다.
첫 번째는 표범 여인의 이야기. 남자와 키스를 하면 표범으로 변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와 갓 결혼한 남편은 아내와의 관계에 불만족하고, 결국 자신에게 관심 있던 회사 동료 여자와 더 친해진다. 그 와중에 아내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데, 의사가 아내를 유혹하려고 키스를 시도한다. 그러자 아내는 진짜 표범으로 변하여 짐승처럼 의사를 물어뜯었다. 이 기묘한 이야기를 하던 중,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남편과 의사 중에 누가 너랑 가까운 것 같아?'라고 묻는다. 발렌틴은 '당연히 의사지'라고 답한다. 사실 그 이야기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를 상징했다. 발렌틴을 사랑하면서도 강압적 태도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몰리나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었다. 몰리나는 너무나도 이성적인 발렌틴에게 실망한다.
두 번째는 여가수 이야기. 프랑스의 어떤 아름다운 여가수가 젊은 독일 장교에게 빠져버린다. 그러나 조국은 그녀에게 스파이 활동을 강요하며 장교에게서 정보를 빼내오라고 시킨다. 여자는 사랑과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남자를 선택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발렌틴은 이토록 뻔한 나치 선전물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였냐며 화를 낸다. 하지만 몰리나는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결말이 좋다며 상처받은 감정을 드러낸다. 사실 이 이야기 역시 두 사람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었다. 몰리나는 감옥 측으로부터 발렌틴의 사회운동 정보를 캐내면 가석방시켜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던 것이다.
세 번째는 못생긴 하녀 이야기. 숲 속 오두막에 우연히 못생긴 하녀와 젊은 청년이 함께 머물게 된다. 젊은 청년은 2차 세계대전 후 얼굴에 기다랗고 큰 흉터를 얻었다. 그는 책만 읽고 방에 칩거하며 못생긴 하녀를 박대한다. 하지만 종국에는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청년의 결혼 소식을 듣고 오두막에 청년의 부모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들은 하녀의 얼굴을 보고 대놓고 실망한다. 결국 사랑의 콩깍지는 무참히 벗겨진다. 그들은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청년과 하녀는 발렌틴과 몰리나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냉정한 시선을 받고 위축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네 번째는 게릴라군 청년 이야기. 한 게릴라 청년이 사회운동 중에 의도치 않게 산에서 만난 이국 처녀를 임신시킨다. 그는 그녀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기에 그녀를 버리고 군을 이끌고 떠난다. 그리고 부르주아의 농장을 급습하는데, 농장주의 애인은 바로 청년의 어머니였다. 그는 군에게 어머니를 총살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총살 장면을 보던 중 이성을 잃어버렸다. 청년은 마구 기관총을 쏘았고 결국 자신도 군인들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이 영화에서는 부유한 배경 출신이지만 사회 전복을 꿈꾸고, 이혼한 부모를 사랑하며 경멸하는, 딜레마에 빠진 발렌틴의 심리가 드러난다.
다섯 번째는 화이트 좀비 이야기. 한 농장주가 사악한 마법사와 결탁하여 마을 사람들을 모두 좀비로 만들어 밤마다 농장에서 일하도록 한다. 마법사는 농장주 아들의 신부에 대해 음모를 꾸며 결국 그녀도 좀비가 되도록 만든다. 충격을 받고 잠시 떠났던 아들은 시간이 흘러 두 번째 아내를 마을로 데려온다. 그녀는 불안정한 심리의 남편을 지키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좀비의 비밀을 알아낸다. 그녀는 사악한 마법사를 막으려 했지만 남편은 결국 마법사에 의해 희생되었다. 좀비들을 두고 아내는 홀로 살아남아 마을에서 도망친다. 이 여자는 사랑을 위해 용기를 내는 몰리나를 상징한다. 몰리나는 당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발렌틴이 원하는 것을 돕기로 마음을 정한다. 이 이야기 뒤에 몰리나와 발렌틴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여섯 번째는 여배우와 기자의 이야기.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여배우의 갑부 남편은 기자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고 할 수 없이 여자는 사랑을 단념하는 척했다. 이를 들은 기자는 직장도 그만두고 폐인이 되었다. 그걸 본 여자는 부귀영화를 버리고 기자를 보살피기 위해 거리에 나가 몸을 팔며 돈을 모은다. 여자는 끝까지 남자를 지켜주려고 헀으나 남자는 중환자실에서 사망한다. 이 영화는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몰리나의 이야기였다. 몰리나는 가진 돈을 털어 발렌틴에게 각종 음식을 베풀고 발렌틴이 고문을 받아 설사를 해도 깨끗이 닦아주며 보살펴주었다.
작품 결말에서 당국은 몰리나를 홀로 가석방한다. 하지만 당국은 몰리나를 염탐하고 있었다. 몰리나는 발렌틴을 도와 극좌파 본부에 정보를 전달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그녀는 목표를 이루다가 경찰에게 붙잡혔고 그 순간 정보가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한 극좌파 사람들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감옥에서 소식을 들은 발렌틴도 그를 애도하며 쇠약해진 몸으로 죽고 만다.
정치적 명분에 감정을 섞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강한 성격의 발렌틴과, 여자보다 더 섬세하고 여린 성격의 몰리나. 그들은 너무나도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둘 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발렌틴은 정치적 신념 때문에 죽을 때까지 숨어 지내야 하는 운명이고, 몰리나는 게이라는 이유로 바깥에서 욕설을 듣고 구타를 받는 것이 일상이다. 또한, 그들은 둘 다 이중적이다. 발렌틴은 부유했지만 사회적 모순에 반발했고 몰리나는 서민이었지만 화려한 생활방식을 동경했다. 이들은 내면의 모순을 서로를 통해 발견했다.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두 죄수는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주었다. 발렌틴의 정치적 이상은 지적이었으나 인간애가 부족했다. 몰리나의 낭만적 감성은 사회적 식견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이들은 혼자 지낼 때보다 다른 이와 교류함으로써 비로소 더욱 완전해졌다. 상호보완적인 면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비로소 성숙해졌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큰 흉터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외면적 또는 내면적 단점 때문에 눈치 보고 움츠러드는 사람들이 있다. 소외된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건 함께 소외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이 될 수도 있다. 고압적인 분위기를 탈피하고 스스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자꾸만 마음속에서 틀에 박힌 인식을 벗어나려 노력해야 한다. 발렌틴과 몰리나는 자신들의 세계를 탈피하고 서로 유대감을 형성하면서 사회적 억압과 외로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