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Grands Jours de Bourgogne)
"오! 다니엘! 히사시부리. 잘 지냈어? 파리는 어땠어?"
"그래, 정말 오랜만이네. 잘 놀다 왔지. 언제 도착했어?"
"나는 한 5시쯤 와서 체크인하고 동네 구경하고 왔지. 그거 알아? 좀만 밑으로 내려가면 올드 빈티지를 엄청 싸게 파는 샵이 있어. 이 1983년 빈티지 보졸레 빌라주 와인도 싸게 샀어."
"오 이런 걸 판다고? 얼마에 샀는데?"
"8유로! 엄청나지?"
테페이를 처음 만난 건 앙제로 떠나기 전날이었다. 집이 안 구해져 스트레스는 극도로 쌓여갔고 우울해하던 찰나에 언어 교환 모임 글을 보게 되었다. 프랑스어도 잘 통하지 않고 가서 영어로 신나게 떠들어야겠다 생각하고 별다른 고민도 없이 나가게 되었다. 프랑스어는 예상보다도 더 빠르게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회사를 다니며 주말에나 겨우 시간을 내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수업을 들으며 델프 A2 등급 자격증을 따고 왔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았다. 부동산에서 전화가 오면 그 순간 심장이 미친 속도로 뛰어대기 시작했다. 전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너무나 제한적이었고 결국에는 다다다다 말을 하는 상대방의 말을 끊고 내가 그쪽으로 가겠다는 말을 겨우 하고 끊는 정도였다. 도착해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면 조금은 나았다. 개중에는 이해하기 쉬운 말로 천천히 해주는 이들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서류도 없어 보여서 거래가 될 것 같지 않은 내게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을 섞어 빠르게 내뱉고는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말라갔다. 결국 1주일 동안 아무 성과 없이 보르도에서의 시간이 지났고 앙제 여행을 떠나기 전 언어 교환 모임을 나가게 되었다.
모임 장소에 늦지 않게 시간을 맞춰 갔더니 이제 막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하기 전이라 어색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프랑스어에서 해방되니 심적으로 너무 편해졌다. 얼추 사람들이 모여 6명씩 조를 짜기 시작했는데 같은 조에 왜소한 체구의 동양인이 들어왔다. 안 그래도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간단하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알게 된 사실로는 이름은 테페이이고 일본에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보르도에는 와인을 공부하기 위해 와있다고 했다. 너무나 반가웠다. 보르도에서 친구를 한 명이라도 만들 수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보르도에서 딱 한 번 와인을 마셨고 2년에 한 번씩 그 비싼 부르고뉴 와인들이 잔뜩 나오는 행사가 있다는 소식에 함께 가자고 꼬셔 오랜만에 보게 된 것이었다.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터라 서로 안부를 묻고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갈색[1]으로 변해버린 보졸레 지역의 레드 와인을 나눠마셨다.
오래된 빈티지의 와인을 마실 때는 마음가짐이 조금은 달라진다. 와인병안에 들어가 지내온 그 오랜 세월로부터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특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생명과 놀랍도록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균형감이 아직 완전히 잡히지 않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가지면 차분해지며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고 가장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고는 더 세월이 흐르며 힘은 약해지고 생동감은 떨어지지만 노년의 중후함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인생의 피크가 모두에게 다가오는 시기가 다르듯 와인들도 모든 와인들이 각각의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때가 다르다. 알 수 있는 방법은 직접 경험해 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쯤 괜찮을 것 같아서 땄는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수도 있고 이미 시음 적기가 지나서 형편없을 때도 있다. 그럴 땐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하고 넘기게 된다. 여러 가지 위험이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받는 이유는 기대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보졸레 지역에서는 갸메라는 포도로 레드 와인을 만드는데 훌륭한 와인의 경우 오래 숙성하여 마셨을 때 피노 누아로 만드는 부르고뉴의 레드 와인의 느낌을 준다고 들었다. 테페이와 나눠 마신 와인은 잘 만드는 생산자도 아니었고 등급 자체도 낮아 이렇게 오래 숙성해서 먹게끔 만든 와인은 아니었지만 3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꽤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것도 고작 8유로에!
다음날 아침으로 간단히 빵과 커피를 먹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셔틀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 참석하는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는 5일 동안 부르고뉴의 모든 지역 와인들을 시음할 수 있는, 업계 종사자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행사다. 부르고뉴라는 이름에는 묘한 힘이 담겨있다. 언뜻 보면 쉽게 보인다. 딱 두 가지 포도,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샤르도네와 레드 와인을 만드는 피노 누아만을 재배한다. 보르도처럼 여러 품종을 섞어가면서 맛의 변화를 주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왜 어려운가? 어색하지만 그래도 들어봤음직한 마을 이름들이 뭐가 그리 다양한지, 마을 이름뿐만이 아니다. 유명한 마을이 뭐가 있는지 알고 나면 요사스러운 뜻도 알 수 없는 포도밭의 이름들이 따라붙는다. 도대체가 무슨 뜻인가 궁금해서 물어봐도 "그건 그냥 포도밭 이름일 뿐이야. 네가 다니엘인데 그 이름에 뜻이 있니?"라는 식의 답변만 돌아오니 영 찝찝한 게 아니다. 그렇게 마을과 포도밭까지 들어본 이름을 선택했다고 쳐보자, 거기가 끝이 아니다. 똑같은 이름의 와인을 만드는 이들이 여럿이 되고 그 와인들이 모두 맛이 다르다. 같은 밭에서도 포도나무마다 자라는 토양이 조금 다를 수 있고 그늘이 지고 해가 드는 방향이 다르기도 하고 언제 수확을 했는지, 양조장에서 어떤 오크 통을 쓰는지 사람의 손길을 타며 다른 맛을 나타내기도 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농작물이다 보니 매해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이런 모습에 압도되어 선뜻 다가가긴 어렵지만 한번 빠져들면 무서울 정도로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졌으며 알면 알수록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만드는 그러한 힘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지역과 포도밭에서 난 와인을 마셔볼 기회는 당연하게도 많지 않았고 와인 값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기회를 놓칠 수 없어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본이라는 부르고뉴의 중심 마을 근처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빌려 각 마을별로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와인을 고객들에게 선보이는 행사였다.
작은 셔틀에서 내려 행사장으로 들어가니 이른 오전인데도 와인을 테이스팅 하러 전 세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 차 벌써부터 공기는 후끈거렸다. 가장 처음으로 갔던 곳은 꼬르똥(Corton)이라는 지역의 와인들이 있는 곳이었다. 어느 정도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곳이지만 이 꼬르똥이라는 곳의 와인은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그랑 크뤼[2] 와인들로 유명한 지역이다. 확실히 동굴에서 열린 라 디브 부떼이[3]와는 퍽이나 다른 모습의 시음회였다. 정장을 입은 이들이 가득했고 여유롭게 와인 한 잔을 받아들고 오랜만에 만난 업계인들과 얘기를 하는 이들, 양손에 카메라와 핸드폰, 노트와 펜을 들고 열심히 사진을 찍고 와이너리 관계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한 잔을 테이스팅 할 때마다 분주하게 펜을 움직이는 학생과 기자들, 자신들이 거래하는 와이너리에 가서 친근한 인사를 나누고 자신들이 팔아야 하는 와인을 진지하게 맛보는 소믈리에들, 그리고 시끄러운 미국인들이 있었다.
첫날의 행사 중에서 푹 빠졌던 곳은 단연코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한 뫽소(Meursault) 지역이었다. 지난 앙제 여행에서 반했던 슈낭 블랑 품종의 영향일까,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샤르도네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 레드 와인보다 더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뫽소라는 마을은 화이트 와인들로 유명한 꼬뜨 드 본(Côte de Beaune)이라는 지역에 있는 곳이다. 구글맵에 정체불명의 발음인 뮤흑소로 써있는 이곳의 언덕으로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면 그렇게 마음이 편해질 수가 없다. 이곳의 와인들은 매력이 넘치는데 이웃한 몽라쉐 형제 마을[4]과는 다르게 값비싼 그랑 크뤼 밭은 없다. 하지만 라벨에 이 마을의 이름만 쓰여있으면 자연스레 침이 고이며 마치 깨를 볶은 것 같은 향이 느껴진다. 처음 한 모금을 입에 머금으면 겉치장을 잔뜩 한 화려한 배우 같은 느낌에 깜짝 놀라지만 두 번째 모금에서는 끝도 없이 깊이 잠수하는 블루홀 같은 깊이감을 느끼고 세 번째 모금에서는 턱관절 뒤쪽에서 아주 약한 전기 충격을 주는 것 같이 찌릿찌릿한 산도가 느껴지며 그제서야 제대로 된 뫽소 와인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행사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자로 쭉 뻗은 홀에 와이너리 담당자들이 줄지어 서있었고 노란빛의 명주를 마시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졌는지 모든 것들이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그렇게 좁은 공간을 가로질러 통로의 문을 지나면 좀 더 널찍한 홀이 나타난다. 그곳에서도 벽을 따라 와이너리 관계자들이 멋들어진 정장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 시음회나 그 모습은 비슷했다. 다만 주인공인 와인만이 달랐을 뿐 약간의 지친 표정의 생산자들과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고객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이라도 최대한 많은 것을 느껴보겠다고 입안에서 호로록 거리며 와인을 입에 물고 있다가 검은색 통에 뱉어버리는 모습은 어딜 가나 똑같았다. 이곳에서는 모든 이들이 똑같은 포도로 똑같은 마을에서 만든 와인을 선보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한 와이너리 안에서도 등급이 다른 와인들을 만들어 처음 시음을 시작했을 때보다 뒤로 갈수록 사람들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곤 했다. 부르고뉴 와인을 이야기할 때 또 빠질 수 없는 게 작황에 대한 이야기이다. 해가 얼마나 떴고 온도가 몇 도까지 올라갔으며 비가 얼마나 왔고 우박이나 밤사이 서리로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번에 마시는 와인들이야 2015년과 2016년으로 둘 다 좋았던 해로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찡그리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작년 얘기를 꺼내자마자 생산자들은 근심 가득 찬 얼굴로 변하며 피곤한 듯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작년은 정말 힘들었어요. 서리 예보가 있을 때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포도밭에 나가 불을 때워야하고 그렇게 해봤자 예상보다 더 심각한 서리가 닥치면 그냥 멍하니 포도나무가 얼어붙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어요."
부르고뉴는 황금의 언덕이라고 하여 꼬뜨 도르(Côte d'Or)라고 불린다. 이 언덕이 황금색이 아닌 붉은빛으로 뒤덮일 때가 있는데 사진으로 보면 그 광경이 숨이 멎게 예뻐 보이지만 생산자들에게는 속이 썩어가는 장면이다. 서리 피해로부터 포도를 보호하고자 그 넓은 포도밭에 불을 피워 찬 공기를 조금이라도 막으려는 것이다. 어떤 영화에서는 과거에 생산자들이 불을 피우는 대신 철제 구조물에 천을 붙여 날개를 만들고 그걸 팔과 등에 매고 포도밭을 다니며 푸드덕하고 날갯짓을 해 차가운 공기를 몰아내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2015년은 정말 좋았어요. 적어도 우리 와인은 말이죠. 2005나 2010이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죠. 너무 강하지도 않고 과일 표현력도 굉장히 좋지 않나요? 어떻게 생각해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남아있는 와인을 마저 입으로 털어 넣었다.
며칠 후, 마지막 행사 날이 밝았다. 역시 가장 중요한 행사는 가장 마지막으로 미루는 것일까, 이날은 가장 기대를 하게 만든 지역의 와인들이 나오는 날이었다. 끌로-부조(Clos Vougeot), 에쉐조(Échézeaux), 리쉬부르(Richebourg)[5] 등 이름만 들어도 황홀해지는 그랑 크뤼가 즐비한 본-로마네(Vosne-Romanée)[6] 마을의 와인을 테이스팅 할 수 있는 날이었다. 하지만 테페이와 나는 늦게 행사에 등록하는 바람에 입장 제한이 있던 이 행사 입장권은 발급받지 못했다. 요 며칠 전, 파리에서 함께 만났던 한국인 지인이 우선 다른 곳에 있다가 입장권을 구할 수 있으면 양도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래서 우선 다른 마을의 와인들을 테이스팅 하기 시작했다. 즈브레-샹베르땅(Gevrey-Chambertin) 마을의 와인들로 시작하여 뉘-생-조르주(Nuits-St-Georges), 그리고 샹볼-뮈지니(Chambolle-Musigny)[7] 마을까지 돌아다니며 이미 혀는 황홀감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확실히 하이라이트 행사였던 만큼 다른 날들은 모두 스킵 해도 이날만큼은 참석한 이들까지 더해져 행사장에서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오후 3시 정도가 되었고 본-로마네 마을 테이스팅의 입장 마감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거의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바로 셔틀에 몸을 싣고 행사장으로 향했는데 도착하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왔다. 1000년 전쯤 시토 수도회에서 건립한 수도원[8]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몸체보다 지붕이 높게 솟은 다소 독특하게 생긴 모양새였지만 그 오랜 세월을 겪고도 여전히 늠름한 자태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보여주고 들어간 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자마자 건물과 건물 사이로 난 마당에 시토회 수도승이 포도를 잔뜩 따 허리에 맨 바구니에 짊어진 채 움직이고 있는 조각상이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도 모르게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테페이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향긋한 바이올렛 꽃향기가 코 끝을 찔러댔다. 안쪽에는 우리가 마지막 입장이었던 만큼 이미 사람들이 많이 빠져있는 상태였다. 그만큼 많은 와이너리에서 준비한 와인들도 동나서 어떤 와이너리에서는 1가지 와인만, 그것도 담당자는 이미 퇴근하고 병만 홀로 남아 외롭게 부스를 지키고 있었고 거나하게 취한 손님들의 손에 휘둘려 아무렇게나 와인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입구에서부터 샤또 드 라 뚜르(Château de la Tour), 안느 그로(Anne Gros), 꽁뜨 리제 벨레르(Comte Liger-Belair), 메오 까뮈제(Meo Camuzet), 페로 미노(Perrot Minot), 조르주 노엘라(Georges Noëllat), 비조(Bizot), 프랑수아 라마르슈(François Lamarche), 장 그리보(Jean Grivot) 등의 이름만 들어도 떨리는 와이너리들의 담당자들이 자신의 와인을 선보이고 있었다. 이곳 행사장을 떠나던 이들이 왜 다 하나같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얼큰하게 취해서 나갔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와인들은 도저히 뱉기 아까운 와인들이었다. 이번 투어의 마지막 행사였기도 했고 오늘이 아니면 언제 맛을 보겠냐는 심정으로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와인을 테이스팅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20개 정도의 생산자들이 참여한 작은 규모였기에 다행히 시간 내에 전부 마셔볼 수 있었다.
다섯시, 행사 종료 멘트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는데 조금 전까지 좋았던 날씨는 어디 가고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그야말로 비가 퍼붓고 있었다. 행사가 일시에 끝나는 바람에 사람들은 밀고 나오는데 우리를 실어 나르는 버스는 20인용 미니버스라 자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4번째로 도착한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이미 오래 기다리다 겨우 버스에 타서 지친 탓인지 모두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덕분에 감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어떻게 보면 무리한 결정이었다. 이번 열흘 정도의 여행으로 한 달 정도의 체류 기간이 줄어든 것일 수도 있다. 왔다 갔다 이동 교통비, 와이너리까지의 렌터카 비용, 기분 낸다고 나가서 사 먹은 외식비, 여기저기 와이너리와 와인샵에서 구입한 와인값, 서점에서 산 와인 서적들까지,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 대한 대가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에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여행이 큰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평소에 접하기 쉽지 않은 와인들을 다양하게 경험하며 어느 정도 부르고뉴라는 곳에 대한 느낌을 정립할 수 있었고, 악몽 같았던 수동 운전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와이너리 방문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테페이를 포함해 이번에 만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하지 않았나 되뇌게 된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을 가지며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다 보니 이내 본 마을에 도착했고 다행히 쏟아지던 소나기는 그쳤다. 숙소로 돌아가 테페이와 한잔하며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했던 나는 미리 작별 인사를 하고 잠에 들었다. 별들과 함께 했던 며칠간의 행사의 여운인 건지 쉽게 잠이 들지 않았지만 이내 별을 쫓는 꿈을 꾸며 부르고뉴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었다.
[1] 갈색 : 레드 와인은 처음 붉은빛을 보이면서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갈색으로 변화해간다. 테페이와 함께 마신 와인은 1983년 와인으로 벌써 35년이 지난 와인이었기에 이런 갈색을 띠는 것이었다.
[2] 그랑 크뤼 : 부르고뉴 최고 등급의 와인
[3] 라 디브 부떼이(La Dive Bouteille) : 루아르 소뮈르 지역에서 열리는 내추럴 와인 행사
[4] 몽라쉐 형제 마을 : 샤사뉴-몽라쉐(Chassagne-Montrachet)와 쀨리니-몽라쉐(Puligny-Montrachet). 뫽소와 마찬가지로 화이트 와인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5] 최고급 그랑 크뤼 포도밭 이름
[6] 5번의 와인들이 나오는 부르고뉴의 핵심 마을
[7] 세 곳 모두 부르고뉴의 마을 이름들
[8] 샤또 뒤 끌로 드 부조(Château du Clos de Vougeot)
[9] 모두 본-로마네 마을의 명 생산자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