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의 신호탄
"저 사바냥[1] 품종까지 테이스팅 했어요. 다음은 방 존[2]인가요?"
"네 방 존 드릴게요. 6년 3개월을 숙성해서... 그리고 사바냥 품종으로... 빈티지가... 저희 도멘의..."
오른쪽 손으로는 와인잔을 잡고 노란색 와인인 방 존을 받아 들고 있었고 왼쪽 손에는 이미 잔뜩 받은 와이너리들의 브로셔와 메모를 하고 있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와이너리들에 이력서를 보낸지도 며칠이 흘렀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었고 마침 비뉴롱 엉데빵당[3] 행사가 열려 머리나 식힐 겸 트람[4]을 타고 북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보르도 전시관에 와있었다. 그 어떤 화이트 와인보다도 노란색을 띠는 액체를 입에 털어 넣는 순간 핸드폰 진동이 맹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돌려 번호를 보는데 저장되어 있지 않은, 06으로 시작하는 번호[5]였다. 순간 심장이 툭 하고 떨어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아플 정도로 뛰어대기 시작했다. 앞에서 와인을 따라주던 담당자는 신경도 쓰지 못한 채 짐들을 부여잡고 튀어나갔다. 무슨 전화인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이 시끄러운 곳에서 벗어나 받아야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전시홀 옆쪽에 난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더니 다행히 정문과도 거리가 있어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다니엘 맞나요? 저는 파비오라고 해요. 얼마 전에 이력서 보냈죠? 잘 받았어요. 아직 일 구하고 있으면 만나서 얘기를 좀 나눠볼 수 있을까요?"
맹렬한 기세로 거칠게 뛰던 심장은 멈출 줄을 몰랐고 더욱 커지는 박동소리는 핸드폰으로 넘어오는 목소리까지도 지울 뻔했지만 간신히 진정하고 통화를 이어갔다. 파비오라고 소개한 낯선 남자가 입에서 단어들을 뱉어낼 때마다 간신히 알아듣고서는 터져 나오는 환희를 겨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네 안녕하세요. 제가 보냈어요. 얘기를 나누자는 건 저를 뽑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네 맞아요. 직접 보고 얘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아서요. 가능한가요?"
"아 사실 저는 지금 보르도에 살고 있어요."
"보르도면 멀리 있네요. 여기로 오는 게 힘드신가요? 채용을 하려면 직접 보긴 해야 되는데요."
"혹시 조금 기다려주실 수 있으면 제가 곧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6]에 가게 되는데 행사 다음날에 가도 될까요?"
"그럼요, 그게 언제죠?"
"3월 17일 토요일이에요."
"아 토요일..."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아차, 토요일에 괜히 보자고 했나. 행사고 뭐고 일자리 구하는 게 먼저가 아닌가, 평일에 만나자고 할까라고 생각할 즈음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토요일에 잠깐 나갈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오전 10시 괜찮아요?"
"아 고마워요. 네 오전 10시까지 갈게요."
"어떻게 와요? 차 가져오죠?"
"아직 안 찾아봤는데 기차로 갈 수는 없나요?"
"여기가 기차역이 없는 곳이라..."
"렌트를 해서라도 갈게요."
"쉬뻬르(Super)! 좋아요 그럼 3월 17일 토요일에 보는 걸로 해요. 잘 지내요. 안녕."
"네. 좋은 하루 보내요. 안녕."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온몸의 긴장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뻔했다. 그동안 몇 개 이메일 답변을 받았지만 모두 퇴짜 이메일이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일이 안 구해질 줄은 몰랐다. 3월쯤에 메일을 보냈지만 대부분 와이너리는 이미 팀이 다 구해져있어서 새로운 사람을 안구하고 있다는 답변이었다. 내가 너무 늦게 온 건가? 취업도 한국에서 전부 결정짓고 왔어야 했나? 조금 일찍 보낸다고 상황이 달라졌을까? 자책하며 낮에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었고 잠시 머리를 식히다가 저녁에는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덥혀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간신히 달래고 있었다.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에 가는 것도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이 들지 않아 도피성으로 선택했었다. 그런데 구세주 같은 인물이 등장해 시궁창에 있는 내게 손을 뻗어준 것이었다. 기다려준다고 하니 시기도 딱 들어맞게 되었다. 금요일까지 행사에 참석한 뒤에 토요일에 차를 빌려 가면 될 일이었다. 5분도 안되는 통화를 막 끝낸 참이었지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채용이 되면 샴페인까지 이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분명 약속은 미리 잡아두었지만 며칠 전 루 뒤몽[7]으로 갈 때의 상황이 벌어질까 불안감이 엄습해 엔터프라이즈[8] 사무실로 가는 내내 예약 확인을 했다. 이번에는 안 되면 정말 답이 없었다. 차를 빌려 본에서 떠나 샴페인 지역으로 가 면접을 본 뒤 파리에 반납을 하고 다시 보르도로 돌아가는 일정으로 떼제베[9]까지 전부 예약을 해두었다. 며칠 전의 악몽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한번 봤다고 익숙한 젊은 청년과 인사를 나누고 오늘은 예약이 되었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예약에는 문제가 없었고 그는 사무실 앞으로 빼둔 차량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도 오토가 아닌 스틱이었지만 며칠 전 경험 덕분이었는지 그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서류에 사인을 하고 키를 받아들고 시동을 걸었다. 여유가 있어서인지 클러치 엑셀 전환도 매끄러웠고 차량은 부드럽게 차도로 굴러갔다. 톨비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 몰라 고속도로가 걱정이었지만 다행히도 와이너리가 있는 곳까지 일반 도로로 가게 되었다. 본 시내에서 벗어나 2차선 왕복 도로로 주행하며 양쪽으로는 푸른색 초원들과 초목들로 가득 차고 앞뒤로 다니는 차량이 없어 여유를 가질 때쯤 라디오를 틀었다.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듣지도 못하며 그저 노래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샴페인으로 향했다.
프랑스 겨울철의 고통스러운 비는 이날도 나를 괴롭혔다. 비가 갑자기 쏟아져내려 운전도 쉽지 않았다. 와이너리에 어찌저찌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뚫고 30분 정도 일찍 도착했을 때 본격적으로 하늘에 구멍 뚫린 듯 퍼붓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우산을 캐리어에 깊숙이 구겨 넣은 채 트렁크에 넣어버려 꺼내 쓸 수도 없었다. 와이너리 사무실 문으로 보이는 곳까지 그리 멀어 보이진 않아 비를 다 맞아가며 뛰어갔다. 온몸이 홀딱 젖은 채로 몇 번씩이나 문을 두들겨봤지만 안쪽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너무 빨리 와서 그런가 생각하며 문 앞에서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 여유로웠던 마음은 점차 어두워지더니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차량으로 다시금 뛰어들어가 핸드폰을 열어 확인해 봐도 제날짜, 제시간에 도착해있었다. 혹시나 날짜를 잘못 말했나 해서 다시 메일 내역을 찾아봤지만 그날 통화한 게 전부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오늘 인터뷰라는 것을 담당자가 잊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기다려봐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이곳에 며칠을 더 있을 수는 없었다. 보르도에 지낼 에어비엔비 숙소에 이미 결제까지 끝낸 상황이다. 전화번호를 찾아내 전화를 몇 통씩이나 해봤지만 응답은 없었다. 망연자실했다. 처음 보르도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샴페인으로 어떻게 이사 하지라며 온갖 설레발은 다 쳤지만 결국 이런 결말이다. 그럼 그렇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절대적인 그분의 농간에 놀아나며 칼날이 춤추는 지하 18층까지 한순간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상실감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차 위로 후두두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다 생각을 하고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정문 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뛰어가더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혹시라도 문이 닫히며 잠길까 봐서 차에서 뛰쳐나와 사무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와요."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 보기로 했던 다니엘이라고 해요."
"알아요. 제가 좀 늦었죠. 전화했었던 파비오라고 해요. 사무실 문을 열어 놓을 테니 여기 잠시만 앉아있을래요? 잠시 준비를 하고 와야 해서."
파비오는 덩치가 큰 곰 같은 사내였다. 줄로 연결된 안경을 목에 걸고 서류를 볼 때는 썼다가 서류를 볼 필요 없이 나와 대화할 때는 머리에 멋스럽게 꽂아두며 피곤하다는 듯 연신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큰 덩치를 움직일 때마다 움찔하며 괜스레 겁을 먹어 목소리는 기어들어갔지만 알아듣지 못해 "빠흐동(pardon)[10]"이라고 할 때마다 더 쉬운 단어를 찾아 속도를 75% 정도로 늦춰 차근차근 설명해 줬다.
"여기 오게 되면 많이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아직 포도밭이랑 양조장 경험이 없다고 했죠? 우리는 어차피 다 해야 돼요. 포도밭에서 일도 하다가 수확 시기가 오면 양조장에서 일도 해야 하고. 그래서 계산을 해봤는데 우리가 다니엘 당신에게 제안할 수 있는 건 이거예요. 급여는 스믹[11]으로 하는데 그렇게 많지는 않은 돈이죠. 그런데 어차피 우리 와이너리가 일도 많고 하다 보니 매일 1시간씩 초과근무를 하면 이 금액 정도가 나올 거 같아요. 그리고 여름에 이렇게 휴가를 다녀오고 언제까지 일할 수 있다고 했죠? 1월 중순까지요? 좋아요. 연말까지 일하게 되면 이 정도를 받게 될 거예요. 어때요?"
약간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면접이라길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평가해 보고 뽑을지 말지 결정하는, 그래서 내 취업상태는 여전히 불안정한 그런 상황인 줄 알았더니 파비오는 근무를 한다는 가정으로 오히려 이런 조건이 괜찮은지 물어봐왔다. 나는 물론 좋다고 대답했다. 급여가 적은 부분도 매일 한 시간씩 초과근무가 해결해 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포도밭과 양조장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기회였다.
"저야 당연히 좋죠. 그런데 하나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요. 전화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지금 보르도에 살고 있어요. 여기로 오면 숙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 숙소.. 여기 와이너리는 누가 살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아니라서 방을 제공해 주거나 할 수는 없어요. 여기 2층이 창고로 쓰이고 있긴 한데 원한다면 거기에 매트릭스랑 미니 냉장고, 전자레인지는 구해줄 수 있어요."
"그렇다면 주방이 없고 전자레인지로만 먹어야 되는 건가요?"
"여기가 주거 시설이 아니다 보니... 다른 방법은 샴페인 지역으로 와서 집을 구할 수만 있으면 좋죠. 아무래도 큰 도시가 좋을 텐데 이 근처에는 트로아[12]라고 있어요. 직원들이랑 같이 출근을 하거나 아니면 제 상사한테 차를 하나 구하는 걸 얘기해 볼 수도 있구요."
문제는 일자리 자체보다는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다.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한 문제였다. 프랑스에서 집 구하기는 비상식적으로 까다로웠다. 이제 조금 보르도에서 익숙해졌고 룸메를 구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구할까 말까 한 상황에서 다시 샴페인으로 와서 생활 기반을 잡는다는 게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가장 좋은 건 와이너리에서 제공하는 숙소에 있는 것이었는데 우선 숙소가 아니었다. 창고로 쓰던 공간을 깨끗하게 정리를 해준다고는 하지만 이러다 염전 노예 꼴 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고 프랑스 생활 내내 전자레인지 음식만을 먹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 그리도 원하는 와이너리에서의 일자리였지만 쉽게 하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차량까지 구해준다면 집만 구할 수 있으면 주말에 여행도 쉽게 다닐 수 있지만 보르도에서 해오던 것들을 이곳으로 와서 다시 시작해야 된다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우선 그럼 와이너리에서 주방을 설치할 수 있는지 얘기해 보고 답변 줄게요. 그리고 만약 샴페인에서 집을 구한다고 했을 때 작은 차량이 렌트가 되는지도. 숙소 문제만 해결되면 여기에서 일하는 건 문제가 없는 거죠?"
"네네 숙소만 문제니까요. 저도 트로아 쪽에 조금 알아볼게요."
"그래요. 빠른 시일 내에 연락 주는 걸로 할게요."
"감사합니다."
"오늘 뒤에 일정 있어요?"
"이제 파리에 차 반납하고 보르도로 가야죠. 왜요?"
"오늘 면접 때문에 나오는 김에 손님들 방문을 잡았는데 시간만 괜찮으면 와이너리 투어 하는 거 같이 보고 가요. 도움 많이 될 거예요."
"정말 그래도 돼요? 고마워요."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단단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하는 파비오의 제안으로 영국인들과 함께 와이너리 투어를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퀴퀴한 곰팡이와 음습한 비의 축축한 냄새가 뒤엉켜 나는, 빛이 거의 없는 어두운 셀러에서 그나마 한줄기 빛마저 등지고 서 더욱 곰같이 보이는 그는 아주 빠르게, 뻣뻣한 억양의 영어로 자부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설명을 해나갔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셀러 공간을 가로지르다가 한쪽에 놓인 네모난 기계가 눈을 끌었다. 기계식 퓌피트르[13]라고 설명하며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던 파비오는 기계로 다가가 버튼을 꾹 누르자 별안간 붉은 경고등과 함께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고 몇 초 있다가 90도 회전을 했고 신문물을 본 영국인들은 박수를 보냈다. 길지 않은 설명이 끝난 뒤 모두의 반짝이는 눈들을 별로 바꾸어 입에 넣어주기 위해 1층으로 올라와 샴페인을 펑 하고 따기 시작했다. 모리즈의 샴페인 5종을 테이스팅 한 뒤 조금 전 지하에서 말하지 않은 이 지역만의 독특한 와인이 있다고 하고 파비오는 잠시 뒤에서 와인 하나를 꺼내왔다. 로제 데 히쎄[14]라고 적혀있는 와인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다른가 했는데 병마개 부분이 홀쭉했다. 다른 샴페인들은 버섯 코르크로 압력을 가두고 있느라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병 마개가 특징이지만 이 와인은 기포가 없는 로제 와인이었다. 우리가 보통 먹게 되는 프로방스 로제에 비해서 훨씬 거친 느낌이지만 그런 야생적인 면이 또 매력으로 느껴졌다. 투어 내내 나를 유심히 보던 파비오는 내가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더니 뒤로 나를 따로 부르더니 로제 데 히쎄 한 병을 선물이라며 챙겨줬다. 손사래를 치고 거절했지만 면접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선물로 주는 거니 보르도에 돌아가 친구들과 함께 마시라며 쇼핑백에까지 넣어 주었다.
파리를 거쳐 보르도로 오는 길, 검게 변했던 마음은 그 무게를 덜고 다시금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지만 머리는 여전히 복잡했다. 돌아오는 내내 다시 생각해 봐도 여전히 어려운 문제였다.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 그동안 부정적인 답변만 받다 보니 목숨이라도 구해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나를 뽑을 수도 있겠구나. 그 정도로 우선은 됐다고 생각되었다. 여전히 집도 없고 직장도 없는 상황이지만 어제보다 훨씬 여유로운 마음이 깃들었다. 어스름이 질 무렵 보르도 쌩-장 역[15]에 도착했다. 처음 보르도에 왔을 때 묵었던 쌩-미셸[16] 동네에 숙소를 잡았다. 바로 앞으로 갸론 강[17]이 흘러 저녁에 부른 배를 쥐고 나와 산책하기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3개월 정도 끌어온 프랑스에서의 이 첫 막은 곧 끝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2막이 샴페인 지역에서 시작될지, 단막으로 끝나 한국으로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1막의 끝자락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짐을 두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나오자 근처 펍에서 브라스 밴드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성 패트릭의 날[18]이었다. 빈속에 맥주 하나를 시켜들고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 갔다.
[1] 사바냥(savagnin) : 쥐라 지역의 토착 품종. 화이트 와인을 만들어내는 품종이다.
[2] 방 존(vin jaune) : 쥐라 지역에서 만드는 와인으로 가장 값비싼 귀한 명주이다. 방은 프랑스어로 와인, 존은 노란색을 의미한다.
[3] 비뉴롱 엉데빵당(vigneron indépendant) : 프랑스어로 ‘독립적인(소규모) 와이너리’라는 뜻으로 여러 와이너리를 소유한 것이 아닌, 작은 소규모 생산자들이 서로 도와 판매를 늘리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이 단체에 속한 와이너리들은 프랑스 전국을 돌아다니며 1년에 한 번씩 시음 및 판매 행사를 진행한다. 이때가 가장 저렴하기 때문에 프랑스인들, 특히 노인들은 1년 치 양식을 이곳에서 구해가느라 사람 키보다 높게 와인 박스를 쌓고 옮기는 장면이 장관인 행사이다.
[4] 트람(tram 혹은 tramway) : 유럽의 지상 교통편. 경전철.
[5] 06으로 시작하는 번호 : 프랑스의 핸드폰 번호는 06과 07로 시작한다.
[6]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Grands Jours de Bourgogne) : 부르고뉴에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가장 큰 시음 행사. “5일간 쏟아지는 부르고뉴의 별들” 참고
[7] 루 뒤몽(Lou Dumont) : 한국의 박재화 사장님과 일본의 코지 나카타 상이 운영하는 부르고뉴 와이너리. “부르고뉴 와이너리 투어”에서 방문했던 와이너리.
[8] 엔터프라이즈 : 글로벌 렌터카 회사
[9] 떼제베(TGV) : 프랑스 고속철
[10] 빠흐동 : 잘 못 알아들을 때 주로 하는 말
[11] 스믹(SMIC) : 프랑스의 최저임금제도
[12] 트로아(Troyes) : 히쎄 근처에서 가장 큰 도시
[13] 퓌피트르(Pupitre) : 샴페인의 병 숙성 동안 병을 꽂아두는 판으로 전통적으로는 나무 판을 사용했지만 최근에는 기계가 개발되어 자동화되어 인건비를 아낄 수 있게 되었다.
[14] 로제 데 히쎄(Rosé des Rices) : 히쎄 지역의 로제 와인이라는 의미로 샴페인의 다른 지역에는 없는, 히쎄 지역에서만 나오는 와인이다.
[15] 보르도 쌩-장 역(Gare de Bordeaux-Saint-Jean) : 보르도 역의 공식 명칭.
[16] 쌩-미셸(Saint-Michel) : 보르도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깽꽁스(Quinconces)에서 아래쪽으로 위치해있는 구역
[17] 갸론 강(Fleuve La Garonne) : 스페인 카탈루냐에서부터 보르도까지 흐르는 강으로 보르도 와인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롱드 강으로 이어진다.
[18] 성 패트릭의 날(St. Patrick’s Day) : 패트릭 성인을 기리기 위한 날로 아이리시 펍에서 맥주를 마시며 기념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