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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르도농부 Sep 09. 2022

와이너리 첫 출근, 5시간의 출퇴근길

 요란한 알람소리와 함께 깊은 어둠을 열어젖혔다. 긴장되는 출근 첫날이었다. 일어나긴 했다만 여전히 얼떨떨하고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게 면접을 보고서 곧 연락해주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2주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 파비앙에게 다시금 전화했더니 그제야 회사 사장이 직접 면접을 진행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2차 면접을 보게 되었지만 이미 나의 모든 카드를 들어낸 채 들어간 면접장에서는 키가 크고 눈은 조금 쳐졌지만 온몸에서 까칠한 오라를 풍겨내는 사장, 마르졸렌에게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저는 당신에게 스믹[1] 이상은 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몸 쓰는 일은 자신 있어요? 누구나 말은 자신 있다고 하지만 얼마 안 되서 그냥 도망쳐버리더라구요. 확실히 할 수 있는 거에요? 몸쓰는 일을 해 본 적은 있나요? 지금 어디 산다고 했죠? 보르도 시내요? 어떻게 왔다 갔다 해요? 기차로? 하! 잘해봐요"


 숙소가 있다면 돈을 내서라도 머물고 싶다는 말은 보기 좋게 묵살당했고 그렇다면 이곳까지 오는 기차의 월 정기권을 살만큼 월급을 올려달라는 말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방적인 면접이 끝남과 동시에 쫓겨나다시피 나오고서도 일주일을 더 기다린 후에야 오늘 아침이 밝은 것이다. 뭐 말을 더 정확히 하자면 아직 아침이 '밝진' 않았다. 시계가 새벽 4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르도 시내 북쪽에 있는 하브지 광장[2]에서 마고[3] 마을을 지나 뽀이약[4] 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문제는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하브지 광장에서 와이너리 바로 앞 정류장까지 1시간은 소요되었다. 그리고 첫차를 놓치면 다음 차는 한 시간 뒤에나 있었다. 라베고스[5] 와이너리의 출근 시간은 8시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는 펠레그랑 병원[6] 근처에서 하브지 광장까지는 A 선을 타고 부르고뉴의 문[7] 역까지 가서 C 선으로 갈아타 올라가야 하는데 40분이 넘게 걸렸다. 몸 쓰는 일을 하며 12시까지 배고픔을 견뎌야 했기에 출발 전에 뭐라도 입에 구겨 넣어야 했다. 종합해보면 8시 전에 와이너리에 출근하기 위해서는 4시 45분에 일어나 간단한 세안을 하고 아침을 챙겨 먹고 5시 30분엔 나와야 6시 35분에 출발하는 705번 버스를 탈 수 있어 7시 40분쯤 와이너리에 도착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버스에는 어디서 쏟아졌는지 모를 초,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친구들 사이에 껴서 실려 오다 무사히 와이너리 앞 정류장에 내려 첫날 도착하여 면접 본 사무실로 가서 문을 두드리니 파비앙이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사무실 건물에서 크게 한 바퀴를 돌아 반대쪽으로 붙어있는 건물로 향했다. 큰 차고 같은 곳과 창고 같은 곳이 함께 있는 공간으로 차고에는 한 번도 본적 없는 거대한 트랙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창고 같은 곳의 문을 여니 의자와 탁자들이 놓여있었는데 이곳이 점심을 먹을 공간이라고 한다. 세련된 공간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피크닉 테이블 몇 개 가져다 놓고 밥을 먹으라니 너무 열악한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바로 옆쪽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주방이라고 소개해주었다. '주방'이라고 불리는 그곳에는 사람 키 반만 한 크기의 냉장고 하나와 그 옆으로 붉은 꽃이 장식된 촌스러운 천으로 뒤덮인 테이블에 2층으로 쌓인 전자레인지 4개, 그리고 90년대에나 볼 수 있을 법한 새빨간 커피포트, 그리고 벽 쪽으로 붙어있는 개수대 2개가 전부였다. 


"자, 여기까지 알아야 할 건 다 알려줬고... 오 마침 다들 모였나보네요 트랙터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자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다들 잠깐 이쪽으로 모여보세요! 여기는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하기로 한 다니엘이라고 해요. 다니엘은 한국에서 왔고 와인 기자로 활동하면서 와인을 수입하던 일을 했다고 해요. 앞으로 계속 보게 될 사이니까 잘 대해줘요. 다니엘, 여기 있는 사람들은 트랙터 팀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앞으로 함께 일할 사람들이에요. 팀장인 아메드와 디디에, 그리고 부팀장인 산드린, 팀원인 플로랑스, 노에미, 프레데릭이에요. 아메드, 이번 주는 당신 팀에서 함께 일하면 돼요. 다니엘이 프랑스어를 하긴 하지만 모국어가 아니라 이해를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다른 조금 더 쉬운 단어를 찾아서 이해시켜줘요. 자 그럼 힘내고, 모두 수고해요!"


 생산 팀의 총 대장 격인 파비앙은 포도밭에서 실제 일을 하진 않았고 주로 사무 업무가 많았기에 바로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반가워요 다니엘, 나는 팀장 아메드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안녕 나는 산드린이야"

"네 안녕하세요"

"자 다들 인사는 이쯤하고 준비하고 까미용에 탑시다!"


 까미용이 무슨 소리인가 어리바리하고 있을 때 아메드가 고갯짓으로 따라오라는 신호를 줬다. 까미용은 직원들이 포도밭으로 나가 일할 때 타고 나가는 봉고 차량 같은 것이었다. 까미용을 타고 포도밭 쪽으로 난 좁은 도로를 따라 돌더니 도착한 곳은 사무실과 샤또[8]라고 부르는 작은 성의 옆쪽 밭이었다. 말이 밭이었지 파릇파릇한 식물의 색은 온데간데없고 보기만 해도 하늘에서부터 이어지는 우울해지는 칙칙한 회색의 토양들로 뒤덮여있는 곳이었다.


"다니엘, 이쪽으로 와볼래요? 자 이게 메를로[9] 품종이에요. 이걸 이제 구멍 나 있는 곳들에 심어줄 건데 먼저 이 파종 삽으로 나무 말뚝 앞쪽을 깊게 파주면 되요."

"이.. 이게 생각보다 안 들어가는데요?"

"가끔 땅이 단단한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발을 이용해서 깊게 파면 돼요. 명심해요 이 메를로 묘목이 2/3 정도 묻힐 수 있는 정도면 좋아요."

"네 알겠어요. 해볼게요."

"그다음에 이 묘목을 보면 빨간 부분이 있고 반대편에는 뿌리가 있죠? 여기를 전지용 가위로 정리를 좀 해줘야 해요. 이 빨간 부분은 왜 이런지 알아요?"

"네 필록세라[10] 때문에 접목한 거 아닌가요?"

"맞아요. 어쨌든 이렇게 뿌리를 정리한 다음에 아까 파낸 땅에 심으면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게 뿌리는 무조건 아래를 향해야 해요. 조금 길게 정리된 뿌리가 있다고 했을 때 땅이 덜 파여서 이런 뿌리들이 위를 향하면 안 돼요. 무조건 아래로. 이해했죠? 그리고 깊이는 어느정도 하냐면 이 빨간 왁스 부분 있죠? 여기의 끝부분이 지표면 정도에 위치하는 깊이로 해야 해요. 너무 깊게 심으면 나무가 쉽게 자라지 못해요. 그리고나서 주변의 흙을 나무 주위로 모아서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해주는 역할을 해주게 해야해요. 꼭 기억해야 할 점은 너무 강하게 압력을 주면 안 된다는 거에요. 왜 그런지 알아요? 여기를 너무 강하게 눌러버리면 토양이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에 좋지 않아요. 명심해요 발로 절대 누르지 말고 손으로 나무가 고정될 만큼만 눌러야 한다는 점을! 그리고 이제 마지막 단계인데 이렇게 나무 말뚝 앞으로 심은 메를로 묘목이 꺾이지 않고 똑바로 말뚝을 타고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고정을 해줘야 해요. 말뚝에 보면 이미 묶여있는 이런 끈 같은 게 보일 거에요 이 끈을 둘러서 말뚝과 메를로 나무가 같이 묶이게 해주면 돼요. 여기까지 다 이해했어요?"


 혹시라도 잘 못 알아들을까 봐 아메드는 친절하게 쉬운 단어들로 설명해주었고 그리 어려운 업무는 아니라 나와 다른 직원 마튜가 함께 포도밭 2개 구획에 메를로 묘목을 심기 시작했다. 비슷한 경험이 없던 나는 모든 게 신기했지만 한 시간 정도 되니 계속된 반복 작업은 금세 지루해졌고 게다가 땅은 내 상상과는 다르게 너무도 딱딱해 파종 삽 위로 올라가 콩콩이를 뛰어도 땅으로 박혀 들어가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발바닥은 물론 손바닥까지 저려올 때쯤 아메드가 돌아왔다. 작업 진척도를 보고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며 자신을 따라오라며 옆 밭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는 중간에 듬성듬성 박혀있는 큰 나무 말뚝에 못을 박아주는 작업을 해주면 된다고 했다. 딱히 큰 설명이 필요 없는 작업이었고 망치와 못을 잔뜩 남겨주고서는 또다시 떠나버렸다. 나와 남은 마튜는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갔다. 나무 말뚝의 가장 위에서 망치를 걸쳐 놓고 손잡이 끝 위치에 비스듬하게 못대가리가 하늘로 향하게 양쪽으로 못질하면 끝나는 작업이었다. 르바주[11] 작업을 위한 거라는데 뭔지는 모르지만 조금 전까지 부서질 것 같은 발바닥과 손바닥이 한결 편해져 작업 속도는 빨라졌다. 어느새 11시가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날씨는 갑자기 변해 우중충한 회색 구름은 물러가고 주변에 피할 곳 어디도 없이 그대로 내리쬐는 햇빛을 받기 시작했다. 오전에 일할 때 입던 후드티는 포도밭 가운데 벗어 던져버린 채 반팔 차림으로 일하는데도 여름마냥 더워지기 시작했다. 넓디넓은 밭을 3/4 정도 끝냈을 때 다시금 아메드가 운전하는 까미용이 다가왔다. 점심시간이었다.  


 열두시부터 점심시간이었고 정확히 한 시간을 쉬고 오후 작업에 들어가므로 어디에 있든 11시 50분, 늦어도 11시 55분에는 모든 작업을 정리하고 차에 몸을 실어 아침에 파비앙이 나에게 소개한 '주방'으로 모였다. 전자레인지용 음식을 사 온 나는 아침에 넣어둔 냉장고에서 토마토 펜네 면을 꺼내 멀쩡하게 돌아가는 전자레인지에 넣고 전자식도 아닌 다이얼을 돌려 2분에 맞췄다. 다이얼이 돌아가는 동안 오전에 봤던 많은 이들이 주방으로 몰려들었다. 대부분 도시락을 싸 왔고 전자레인지로 데워 먹으며 점심을 때우곤 했다.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전자레인지만 뚫어져라 보는 사이 내 보잘것없는 음식이 완성되었고 자리로 가져와 미리 준비한 작은 감자 칩을 뜯고 남아있던 바게트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파스타를 전자레인지에 데워먹을 줄이야, 헛웃음을 지으며 주린 배를 쥐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첫 주 동안 포도밭 설치 팀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포도밭을 조성하기 위한 업무들을 배우고서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포도밭 보수 팀에서 일하게 되었다. 팀장인 디디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자 이번 주는 나와 일하게 될 거야. 반가워 디디에라고 해."

"네 반갑습니다."

"트럭 앞으로 타. 자 문 닫아"

"네? 그럼 프레데릭은요?"

"아 쟤는 트럭 뒤에 탈 거야. 그걸 더 좋아해."


 자리가 있는데도 굳이 짐칸으로 훌쩍 뛰어 오르는 걸 보고 문을 닫았다. 덜컹거리며 도착한 외딴곳에 있는 포도밭은 어두운 날씨에 놓여 습하고 어딘가 음침해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 트럭에서 문을 열고 내려 첫발을 내딛는 순간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찰박'하는 소리가 났다. 디디에와 프레데릭은 태연스럽게도 장화를 신고 있었다. 개인 구비를 해야 하는 장화였지만 어디서 파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그냥 출근한 게 화근이었다. 다행히 와이너리에서 지급된 안전화에 물이 들어오진 않아 작업을 이어갔다. 지난주와 다르게 디디에가 있는 팀은 기존의 포도밭들에 문제가 생긴 곳의 보수를 하는 업무를 했다. 필 드 쁠리우르[12]라고 부르는, 포도밭을 가로지르는 가장 아래쪽에 설치돼 있는 선이 끊겨있는 부분을 새로 이어서 팽팽하게 만드는 것이 오늘의 업무였다. 한두 번 시범을 보여주고서는 작업을 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더니 그 둘은 어디론가 훌쩍 가버렸다. 그리 어려운 업무는 아니었고 지난주보다 구름이 많아 그늘이 드리워 시원하고 편하긴 했지만, 글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포도밭의 규모는 다시 봐도 엄청났다. 한참을 걸어 다니며 한 시간 정도 작업을 했지만 해야 하는 작업량의 10%도 못한 것 같았다. 그때쯤이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신발 안쪽에서 들리던 것이. 그래도 잘 버틴다 생각했던 안전화 안쪽으로 물이 차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 차기 시작한 물은 거침없이 발을 물로 덮어버렸고 작업 속도는 더욱더 느려졌다. 밭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갔다가 양말과 신발을 벗어 물을 짜내고 다시 신어봤지만 찝찝함은 멀리 가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더 고생했을 때 디디에와 프레데릭이 돌아왔다. 한 손에 나를 위한 장화를 가져왔다면 훈훈한 얘기였겠지만 어디까지나 지극히 한국적인 전개였을 것이다. 왜 아직 여기까지밖에 못했냐는 말에 신발에 물이 차 힘들다고 답해주는 수밖에 없었고 디디에 또한 딱히 해결책은 없어 그저 미소 짓고 넘길 뿐이었다. 셋이서 달라붙어 보수작업을 하니 점심시간인 열두 시 전에 한 구획을 끝낼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주방으로 모인 직원들을 뒤로하고 나는 밥이고 뭐고 이 찝찝한 발의 상태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샤워실로 달려갔다. 밥 안 먹고 어딜 가냐는 다른 직원의 외침을 무시하고 들어가자마자 병적으로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따뜻한 물에 발을 씻어냈다. 4월의 프랑스, 특히 비 내린 다음 날은 꽤나 추웠다. 어느 정도 발을 따뜻하게 만들고서는 신발과 양말을 물로 행군 뒤 양말에서 한 방울의 물도 남기지 않겠다는 기세로 몇 번을 짜댔고 맨발 차림으로 주방으로 가 레토르트 식품을 꺼내 전자레인지를 돌려먹었다. 그사이 벌써 디저트로 넘어가 과일이며 요플레며 먹는 '정규직' 직원들은 내게 무슨 일 있냐고 물어왔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장화가 없는데 발이 온통 젖어서 저기 말려놓고 있어요."라고 덤덤한 척 얘기하고 마저 식사를 끝냈다. 일 7시간 업무의 프랑스 규정과 8시부터 시작하는 라베고스 와이너리의 정책 덕분에 일과는 네 시면 끝이 났다. 돌아가는데도 오는 만큼 걸려 집에 도착하면 6시 20분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샵이 닫기까지 1시간은 더 시간이 남아 디디에에게 물어봤던 장화 파는 곳을 찾아서 바로 집을 나섰다. 철물점이 있으면 좋으련만 어디 있는지, 어떻게 검색해야 하는지도 몰랐기에 디디에가 말해준 자르디나주[13] 검색하여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갔다. 이름처럼 정원을 가꾸기 위한 물품들을 파는 곳이었고 저렴한 가격의 장화가 보여서 냉큼 집었고 싸구려 우의와 농부 모자가 있어 가져왔다.


 새로 산 아이템으로 무장한 채 포도밭에서 또 1주일이 지났다. 4월은 계약이 짧아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 긴 주말을 보내며 쉴 수 있었다. 지난 2주 동안 장-아르노에게 거주 증명서와 전기료 납부 증명서 등 여러 가지 서류를 요청해서 받을 수 있었고 와이너리 계약서를 들고 통장을 만들 수 있었다. 만들긴 했지만 쉽진 않았다. 집에서 가까웠던 소시에떼 제네랄[14]은 헝데부[15]를 잡고 창구에 가서 통장을 만들겠다고 했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며 일자리와 머무는 집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러더니 귀찮다는 듯 '우리 은행은 당신에게 계좌를 만들어줄 수 없으니 다른 곳을 알아보세요.'라고 매정하게 나를 내쫓았다. 오기가 생겨 성공할 때까지 돌아다녀 봐야겠다 다짐하고 근처를 걷다 발견한 크레디 아그리꼴[16]에 헝데부를 요청하자 다행히 인간애로 똘똘 뭉쳐있어 친절했던 직원은 필요한 서류들을 전부 메모해주며 날짜를 잡고 통장을 만들어주었다. 이 나라의 여러 부분이 이해가 안 갔지만 그중 최고는 통장을 만들더라도 체크 카드 발급이 현장에서 되지 않고 일주일 이후에 우편으로 오고 그편에 내가 사용할 비밀번호가 정해져서 온다는 점이다. 자유의 나라에서 비밀번호를 정할 자유는 없단 말인가. 어쨌든 이제 프랑스에서 살 수 있는 모든 환경이 갖춰진 것이다. 몸을 뉠 집이 생겼고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통장까지 생겼다. 자축하기 위해 시내에 있는 와인샵에 가 사 온 와인을 땄다. 라벨에 에비뎅시아[17]라는 이름이 적힌 화이트 와인이었다. 여전히 앙제 여행에 빠져있던 나는 화이트 와인을 찾았고 보르도 근처에 쥐랑송[18]이라는 지역의 와인을 추천받아 가져왔다. 손질된 도미 살 위로 빵가루를 올려 오븐에 구워내는 보르도식 생선 요리[19]를,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흉내 정도나 겨우 내서 함께 곁들여 먹으며 새삼 프랑스에서의 2막이 열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1] 스믹(SMIC): 프랑스의 최저임금. 2018년 당시 월 1,200유로였다.

[2] 하브지 광장(Place Ravezies): 보르도 시내의 북부, 르 부스까에 있는 곳으로 마고 마을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기착지이다.

[3] 마고(Margaux): 마고 아펠라씨옹 와인을 만드는 포도가 재배되는 마을로 보르도 와인 중 가장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4] 뽀이약(Pauillac): 뽀이약 아펠라씨옹 와인을 만드는 포도가 재배되는 마을로 보르도 와인 중 가장 묵직하고 탄닌이 강한 와인을 만들기로 유명하다.

[5] 라베고스(Labégorce): 마고 마을에 위치한 와이너리로 크뤼 부르주아 등급의 와인을 만드는 가성비가 뛰어난 와이너리이다.

[6] 펠레그랑 병원(Hôpital Pellegrin): 보르도 시내 왼편, 쌩 오귀스트 트람 역 근처에 위치한 종합병원.

[7] 부르고뉴의 문(Porte de Bourgogne): 트람 C 선과 A 선의 환승역

[8] 샤또(Château): 프랑스어로 '작은 성'을 의미하는 단어로 보르도에서는 과거부터 작은 성 모양의 건물을 짓고 포도밭을 관리하던 것에서 유래해 오늘날 보르도의 와이너리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9] 메를로(Merlot): 보르도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포도 품종으로 레드 와인을 만든다.

[10] 필록세라(Phylloxera): 뿌리 진드기로 한때 유럽 포도밭의 2/3를 황폐화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줬다. 이후 필록세라에 면역이 있는 미국 종 대목을 접목하여 심는 것이 일반적이다.

[11] 르바주(Levage): 포도나무가 일자로 자랄 수 있게 끈 같은 것으로 포도나무 높이에 맞게 모양을 잡아주는 작업.

[12] 필 드 쁠리우르(File de Plieur): 포도밭의 각 이랑에 설치된 3개의 끈 중 가장 아래에 위치한 끈으로 포도나무 생장기 초기인 4-5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13] 자르디나주(Jardinage): 정원 가꾸는데 필요한 용품들을 판매하는 곳.

[14] 소시에떼 제네랄(Société Générale): 프랑스 국적의 글로벌 금융회사

[15] 헝데부(Rendez-Vous): 프랑스어로 예약을 의미한다.

[16] 크레디 아그리꼴(Crédit-Agricole): 세계 최대 농업계 은행이자 세계 6대 금융그룹.

[17] 에비뎅시아(Evidéncia): 끌로 라뻬이르 와이너리에서 2014년에 처음 출시한 와인 이름

[18] 쥐랑송(Jurançon):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 있는 와인 산지. 스위트 와인으로 유명하지만, 최근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도 많이 만들어낸다.

[19] 보르도식 생선 요리(Poisson Bordelaise): 생선 덩어리 위로 빵가루를 올려 오븐에 구운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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