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잘 지내? 클로에 기억나? 다음 주 일요일에 송별회하기로 했는데 올래?'
엘리에게 문자가 왔다. 엘리, 그녀는 내가 보르도에서 만나 가장 많은 걸 함께한 중국 친구였다. 켓지[1]에서 와인 무역을 전공하던 테페이의 반 친구로 그동안 엘리를 내게 소개해주고 싶어 했지만 만날 기회가 없다가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2] 행사에 다 같이 모이게 되어 그날 처음 인사를 나눴다. 아침 안개가 잔뜩 낀 꼬르똥[3] 와인 테이스팅 자리에서 처음 본 그녀는 작은 키에 안경을 쓰고 뻗치는 생머리를 하고 있었고 손에는 와인잔과 핸드폰 외에 다른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없었다. 엘리는 시원한 성격만큼이나 호탕했다.
"테페이!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응 잘 지냈지. 너도 잘 지냈어? 너한테 소개해주고 싶은 친구가 있어. 여기는 다니엘. 한국인이고 얼마 전에 보르도에 왔어. 와이너리에 일자리를 구한다고 하고 한국에선 와인 기자래."
"안녕 다니엘. 반가워. 엘리라고 해."
"아 응. 반가워."
"둘 다 내일 저녁에 뭐 해? 나랑 클로에랑 황웨이랑 같은 숙소인데 와인 파티하러 안 올래?"
"오 좋아! 다니엘 괜찮지? 엘리, 올드 빈티지만 파는 와인 샵 가봤어? 거기서 와인 사서 모이면 되겠다."
"그런 데가 있어? 어딘지 알려줘! 가보게. 그럼 내일 모이는 걸로."
첫 만남부터 이것저것 재지 않고 우선 만나보자며 대뜸 초대부터하는 엘리였다. 부르고뉴에서의 이틀째 저녁, 루이 자도 와이너리 방문이 끝나고 이곳저곳 와인 샵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할 즈음 테페이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테페이와 함께 묵는 숙소와는 마을 반대편에 있는, 기차역 근처의 에어비앤비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준비가 한창이었다. 거창하게 준비랄 것도 없는, 그저 근처 카지노[4]에서 사 온 잠봉과 올리브, 쏘씨쏭[5], 치즈, 그리고 피자와 몇 가지 전자레인지 음식이 깔려있었다. 음식보다는 와인에 집중하기에,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얘기 나누기에 더없이 좋았다. 엘리가 우리 와인들을 받아서 들고 90년대 와인에 놀라워하며 미리 준비해둔 와인 세 병 옆으로 가져갔다. 그 사이 셋 중 가장 큰 여자가 다가와 자신을 황웨이라고 소개했다. 165 정도는 돼 보이는 적당한 키에 항상 안경을 쓰고 다녔으며 코 옆으로 작은 점이 있었고 긴 생머리가 잘 어울렸다. 프랑스에 오기 전 영국에 살다 와서 그런지 억양이 묻어있었다. 셋 중 가장 차분하면서도 활동적이었다. 다른 한 명은 상을 차리느라 정신이 없어 인사만 하고선 자리에 앉고 나서야 클로에라고 소개했다. 처음 엘리를 만났을 때 옆에서 같이 와인 테이스팅을 하던 친구였다. 클로에는 엘리보다 조금 더 작았고 희고 고운 피부를 가졌다. 눈에 항상 웃음기가 흐르고 있었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애교가 많아 어리게 보였다. 셋 중 가장 늦게 보르도로 온 클로에는 얼마 전 켓지 교육과정을 끝내고 프랑스에 조금 더 머무르는 중이었다.
"아시아 3국이 다 모였네"
"에이요"
"자 다들 부르고뉴에서 이렇게 모여서 반갑고 모두의 프랑스 생활을 위해 건배하자"
"건배!"
여장부 엘리의 지휘 아래 술잔을 부딪치고 목뒤로 꿀꺽꿀꺽 넘기기 시작했다. 테이블에는 비레 클레쎄 2015년과 마꽁 1990년의 화이트 와인을 시작으로 쌩-또방, 뽀마르 2015년을 거쳐 하이라이트인 1997년 빈티지의 볼네[6] 와인까지 순식간에 비워져 올려졌다. 오늘의 주인공인 두 가지 90년대 와인은 테페이가 부르고뉴 도착 첫날부터 매일 가고 있던 올드 빈티지 전문 샵에서 가져온 와인이었다. 그곳은 꺄브 데 오스피스라고 쓰인 간판 아래로 작은 글씨로 올드 빈티지라는 이름이 적혀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와인바라는 글씨가 적혀있었지만, 계산대로 쓰는 높은 탁자에 바 의자 몇 개를 가져다 둔 것에 불과했다. 와인 샵 내부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여기저기 찣겨있고 먼지가 내려앉은 라벨을 입은 오래된 빈티지의 와인들이 안쪽까지 이어진 꽤 큰 공간에 놓인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어린 로마네 꽁띠 2005년부터 1976년의 꼬스 데스 뚜르넬[7], 먹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오래된 멈[8] 1955년 빈티지에 이어 1945년의 리브잘트[9]까지, 눈이 돌아가는 와인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곳은 말 그대로 천국 같은 곳이었지만 그 어떤 것도 가져 나올 수 없어 보였다. 쉽게 고르지 못하고 애꿎은 와인들만 집었다 놓았다 하는 사이에 점원이 다가와 추천해준 와인이 바로 97년 빈티지의 볼네였다. 큰 감동은 없었지만 20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신선한 풍미를 잃지 않은, 약간은 의심이 될 정도로 신선한 그런 와인이었다. 최근에 와이너리 건물의 한쪽 구석에서 발견한 와인들이라며 품질은 의심할 필요 없다는 말에 구입해온 와인이었다. 우리는 5병의 와인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아침부터 계속된 테이스팅, 게다가 뱉기 아까워 자꾸만 삼키다 보니 이미 어느 정도 취했던 터라 금세 더욱 취기가 올랐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다음 날 일정을 위해 보르도에서 다시 한번 뭉치자는 약속을 하며 각자 숙소로 흩어졌다.
부르고뉴에서 돌아온 뒤 취업한다고, 집 구한다고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 연락도 못 하고 있다가 클로에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송별회 자리에서야 겨우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보르도 대성당 앞, 쉐프의 콘서트라는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가격은 조금 있었지만 질 좋은 재료만 받아 음식을 하는 홍콩 전통 음식점이었다. 그 자리에는 클로에와 엘리가 있었고 처음 보는 친구가 있었다. 키는 작고 왜소했으며 진한 눈썹과 수염이 눈에 띄는, 코미디언 유병재를 닮은, 조니라는 친구였다. 조금 늦게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누룽지탕, 홍소육, 그리고 매콤하면서도 사프란을 넣었는지 노란색을 띠는 국물의 생선 탕이 탁자를 가득 채웠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두 달 전이었고 포도밭에 나간 지 한 달 만에 보던 터라 엘리와 클로에는 잘 못 알아봤는지 한참을 뚫어져라 봤고 살이 많이 빠지고 햇볕에 타 까매졌다며 신기해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뒤에는 엘리네 집으로 향했다. 2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낮술 송별회였다.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술은 테이블에 올라왔고 사케로 시작해 쌍세르[10]와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 보르도의 라랑드 드 뽀므롤, 쌩떼밀리옹, 쌩떼스테프[11]의 레드 와인들과 론 지역의 꼬뜨-로띠[12] 와인이 있었고 1985년에 만들어진 달콤한 뱅 두 나뛰렐[13]과 마데이라[14], 포트 와인까지, 클로에가 중국으로 다시 가져갈 일 없는 와인들을 함께 나눴다. 보르도 와인들을 맛본 뒤 클로에가 수줍게 블라인드로 가져왔다며 천에 싸인 와인을 따라주며 맞춰보라 했다. 와인은 중간 정도 깊이의 루비색을 보였고 향이나 맛이나 블랙커런트 같은 풍미를 보여 보르도 와인처럼 느껴졌다. 조니와 엘리도 보르도라고 추측하긴 했지만 딱히 어디 마을인지는 모르겠다는 의견이었다. 클로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천을 벗기고 와인을 보여줬다. 포도 열매의 가지가 라벨에 보이고 마젤란[15]이라는 글자 아래에 전혀 기대하지 못한 한자가 인쇄되어있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와인이었다. 보르도 어느 와인 샵을 지나는데 익숙한 글자가 씌어있어 궁금해서 사봤다고 했다. 가격은 프랑스로 수출된 와인이라 그런지 80유로는 주고 샀다고 크게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클로에는 큰 계획 없이 보르도로 와인 공부를 하러 왔고 이제 모든 과정이 종료된 만큼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계획 없이 오긴 했지만, 공부를 하다보니, 그리고 엘리 같은 친구들을 만나다 보니 뭔가 더 도전해보고 싶어 몇 달 정도 더 남아있었지만, 일거리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떠나는 것이었다. 넷이 마시기엔 너무 많은 와인 때문이었을까 분위기가 한창 후끈 무르익고 있었지만 내 마음 한켠에서는 다급하고 불편함이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요일이었고 내일은 또다시 네시 반쯤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엘리가 먼저 일찍 출근하지 않냐며 운을 뗐다. 그 말에 바로 일어나 클로에와 잘 살라는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인간의 욕심이 끊임이 없는 탓인가 그토록 원하던 지낼 곳과 일할 곳을 구하고 나니 퇴근하고, 주말에 마음 편히 먹고 마시기 힘들다고 속으로 불평이었다. 그렇다고 밭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노예 같은 피폐한 삶은 살고 있지는 않았다. 문화의 나라 프랑스답게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열려 시간이 허락하는 한은 최대한 다녔다. 한국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행사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3일간 보르도 대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음악제가 "대성당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공연 한 시간 전부터 평소 미사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나이롱 신자들이 몰려들어 줄을 길게 섰고 행사 준비가 끝나고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그 넓은 공간이 순식간에 다 차버렸다. 전통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거대한 규모의 대성당에서 어둡고 습한 공기를 마시며 그 넓은 공간을 촘촘히 메우는 음악을 듣는 일이란! 쉽게 듣기 어려운 파이프 오르간을 듣다 보면 화려하게 귓전을 울려대지만, 마음 속은 물결 하나 없이 잔잔한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고요해졌다. 출퇴근과 출근 해서의 노동의 힘듦을 말 그대로 치유하는 느낌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바깥으로 나와 차가운 건물을 화려한 색으로 밝히는 것을 바라보며 30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집에 들어가며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녁에만 진행되는 또 다른 매력적인 축제가 있었는데 "미술관의 밤"이라는 행사였다. 토요일 하루 동안 보르도 열세 개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무료로 개방하는 날이었다. 라 시떼 뒤 방은 보르도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 와인 박물관이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음악과 와인이라는 주제로 저녁 전시를 시작했다. 무료 행사인 만큼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줄을 서서 들어갔고 기다리는 동안 그리스 시대 복장을 한 직원들이 나타났다. 와인 두 병은 족히 들어갈 것 같은 거대한 와인잔에 레드 와인으로 반을 채우고 홀짝홀짝 마시기도 하고 싱잉 볼을 치며 공명하는 소리에 몸을 맡겨 흐느적거리기도 했다. 그리곤 보자르 미술관, 장식 예술 및 디자인 미술관, 아키텐 박물관[16]까지 발걸음을 옮겨갔다. 저물어 가는 낙조가 퍼지고 색색깔의 화려한 조명이 건물에 내린 어둠을 걷어내었고 낮과는 또 달리 아름다운 모습을 하는 미술관 내부를 관람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와인의 도시인 만큼 많은 와인 시음회가 있었다. 라 시떼 뒤 방에서 진행한 '수도원의 와인'이라는 테마의 세미나로 전국의 프랑스에서 포도를 재배해 판매하고 있는 와인 시음회라던가 가장 애정하는 샵인 끌로 데 밀레짐이라는 샵에서 진행하는 정기 시음회, 가끔씩 유기농이나 비오디나미[17], 내추럴 와인을 주제로 전문 와인 샵에서 진행하는 특별 시음회 등을 쫓아다녔다. 기자라는 신분이 전문 행사에도 들락날락하게 도와줬다. 쌩떼스테프 와인 시음회라던가 보르도 그랑 크뤼 클라쎄[18] 와인들의 엉 프리뫼 행사라든가에도 다니며 평소에 잘 사 마시지 못하는 와인들을 충분히 충전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뽀앙 후즈[19]라는 바에서 진행하는 꼬냑 마스터 클래스에 참석하기도 했다. 와인은 어느 정도 공부해왔지만, 증류주 공부는 소홀했던 탓에 아는 바가 많이 없었다. 어렵사리 자리가 마련되었고 쌩-미셸에서도 갸론 강을 따라 한참을 내려와야 있는 약간은 외진 곳에 바가 있었다. 묵직한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온통 새빨간 빛 투성이었다. 붉은색 쿠션을 뒤집어쓴 소파부터 그 위를 넓게 밝히고 있는 붉은 조명, 붉은 양초가 가득했고 한쪽 벽에 가득 찬 각종 술이 멋스러움을 완성해주었다. 30가지도 더 되는 꼬냑을 잔으로 팔고 있는 독특하면서도 보르도에서는 유명한 바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곧 시작되었지만 처음 듣는 용어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프랑스어로 진행되어 전부 알아듣긴 어려웠지만, 대략적인 지식은 유추할 수 있었고 종류별로 시음할 기회가 있었다. 먼저 작은 용기에 담긴 테이스팅 목적의 꼬냑이었는데 각각 5, 10, 15년 숙성한 원액을 시음할 수 있었다. 숙성 2년차부터 판매할 수 있고 4년 차에는 VSOP, 6년 차에는 나폴레옹, 10년 차에는 XO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선 지역별 테이스팅도 했는데 팡 보아, 보르드리, 쁘띠뜨 샹빠뉴, 그랑드 샹빠뉴[20] 4가지의 꼬냑을 테이스팅했다. 그동안 와인 정도만 지역을 구분해서 마셔봤지, 증류주를 이렇게 구분해본 것은 처음이라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꼬냑을 활용한 칵테일을 한 잔씩 만들어주며 세미나는 마무리가 되었다[21]. 그나마 이런 문화생활을 하며 힘든 몸과 마음을 달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쭈그려 앉아 일하는 포도밭 업무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오히려 강도가 더 높아졌는데 데두블라주 작업을 시작한 지 2주 정도가 지나니 아직 작업은 반도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겨운 두블르 말고도 나무가 몸통에 자라는 작은 싹들에 양분을 주며 키워내고 있었다. 두블르와 마찬가지로 이런 것들도 미리 제거하지 않으면 질 좋은 포도를 생산하는 데 방해가 되므로 전부 없애줘야 했다. 문제는 손으로 대충 떼어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떼어내기 어려운 굴곡진 몸통에 자라고 있어 작은 도끼처럼 생긴 도구로 싹을 완전히 제거해야 했다. 가뜩이나 데두블라주 작업 자체도 오래 걸리던 나였는데 이 에빰프라주[22]라는 작업까지 더하니 시간은 배로 걸렸다. 다른 세조니에들도 속도가 느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나보다는 빨랐다. 지겨운 작업은 끝날 줄 몰랐고 다른 세조니에들과 팀장의 힐난하는 눈빛을 받는 유쾌하지 않은 시간은 더디게만 흘러갔다. 분명 지금 내가 하는 작업이 와인의 품질을 더 개선하고 있었겠지만 크게 와닿지 않으니 성취감도 없었다. 거기에 한 달이 돼가는데도 익숙해지지 않는 출퇴근길, 그리고 방값과 한 달 동안 먹을 도시락 재룟값을 내고 나면 쥐꼬리만큼 남는 봉급은 나를 한층 더 힘들게 만들었다. 이제 날씨는 더욱 더워졌고 워낙 일찍 나오는 바람에 일교차는 여전히 컸다. 와이너리에 도착할 때까지도 어둡고 추워 집에서 나올 때는 두꺼운 후드 티셔츠 위로 패딩을 입고 출근을 했다. 이 후드 안에는 항상 반팔을 받쳐 입었는데 사실 출근할 때마다 반팔을 안챙길까봐 걱정됐었다.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후드와 패딩을 둘러 입고 출근했는데 2시간이 지나고 열기가 포도밭을 달궈 습관적으로 후드를 집어서 벗으려고 했지만, 평소보다 시원한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후드 안으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두꺼운 후드를 입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나마 얇은 우의를 맨몸에 걸치고 다시 포도밭으로 나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습기를 안팎으로 튕겨내는 재질은 안에서 나는 땀 배출을 전혀 못 하고 열기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억지로 버티며 그렇게 시체처럼 몸을 이끌고 다닐 즈음 앙투안이 괜찮냐며 안색이 좋지 않다고 말을 걸어왔다. 그는 일주일 전부터 합류한 팀원으로 큰 키에 항상 반팔 반바지를 입고 다니며 분위기를 주도하던 친구였다. 반팔을 깜빡하고 가져오지 않아 살짝 더운 게 끝이라며 가볍게 얘기했다. 그 말을 듣고선 흔쾌히 반팔을 빌려주겠다고 하더니 점심시간에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서 살짝 작은 사이즈의 흰색 티셔츠를 던져주고선 고맙다는 말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깨를 가볍게 툭 하고 치고 갔다. 약간은 부담스럽게 몸매가 드러내는 티셔츠였지만 그 덕분에 땀을 뻘뻘 흘리다 쓰러져 실려 갈 일은 없어졌다.
이때쯤 제레미와 같은 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엔가 아직도 출퇴근 다섯시간씩 하냐고 물어보더니 다른 팀원들에게 어디 사냐고 마구잡이로 묻기 시작했다. 그때 루이가 하브지 광장 근처에 산다고 했다. 제레미가 출퇴근 때 태워서 같이 다닐 수 있냐고 거리낌 없이 말을 뱉었고 별일 아니라는 듯 쿨하게 태워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하브지 광장에서 라베고스까지는 차로 30분이면 가는 거리였다. 트람을 두 번 타고 하브지 광장까지 가야 하는 건 변함이 없었지만 1시간 버스 거리에서 30분으로 줄어드는 데다가 조금 늦게 일어나 고작 1~2분 차이로 버스를 놓칠 일도 없어 나로서는 더없이 좋을 일이었다. 더군다나 퇴근 시간에 항상 마주치게 되는 그 인종차별주의 버스 기사를 안 봐도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안심이었다. 오후 일과가 끝나는 4시쯤, 산드린은 전부 와보라며 세조니에들을 모으더니 오늘부터 추가로 1시간씩 작업을 해야 하고 희망자들만 작업하고 나머지는 퇴근해도 된다고 했다. 초과 근로에 대해서는 120%가 나왔으므로 당연히 더 하고 싶었지만, 혹시 루이가 일찍 가버리면 어쩌지라는 걱정도 잠시 루이도 추가 작업을 하고 들어가겠다고 했다. 한 시간 추가 작업마저 끝이 나고 루이가 끌고 온 클리오 오떵틱에 올라탔다. 돌아가는 시간 내내 어색함 그 자체였다. 30분이었지만 3시간 정도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하던 루이 덕분에 프랑스어로만 대화해야 했고 딱히 큰 공통 관심사도 찾지 못한 채 대화가 중간중간 뚝뚝 끊기며 집으로 향했다. 덕분에 집에 돌아오니 6시 정도로 평소 4시에 퇴근하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한 것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다. 출퇴근 거리만 짧아져도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말이 새삼 와닿았다. 다음날부터 아침에 조금 더 늦잠을 자고 출근했고 퇴근하면 시간이 조금은 더 여유롭게 쓸 수 있는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신세를 지고 사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프랑스어가 막히니 출퇴근 동안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고 루이에게 나는 귀찮은 짐짝 같은 존재였는지 출근 때 가끔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고 문자에도 답장이 없어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그런 생활마저도 오래가진 않았는데 5월 한 달간 잠시 짬이 나서 알바했던 루이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 날이 되서야 관심 분야가 맞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포도밭에서 일하긴 하지만 와인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른다고 하는 루이는 치즈는 기가 막히게 좋아한다고 했다. 와인 좋아하는 이들이 프랑스에 오면 와이너리 투어를 하듯, 치즈 페르미에[23]에 가서 투어와 테이스팅을 하고 여러 가지 치즈를 사 오기도 한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원래도 치즈를 좋아하긴 했지만, 앙제[24]에서 쉐브르 치즈[25]에 맛을 들인 후로 매주 주말이 올 때마다 와인에 곁들일 치즈를 구입해오고 있던 터라 관심이 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해 말이 터진 나를 보며 루이가 당황해하는 동안 차는 어느새 하브지 광장에 도착했다. 도로 한쪽에 차를 세우고선 마지막인 만큼 차에서 내려 악수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봉 꾸하주[26] 다니엘."
5월이 저물었다.
[1] 켓지(KEDGE): 보르도 와인 대학교 중 하나.
[2] 그랑 주르 드 부르고뉴(Grands Jours de Bourgogne): 부르고뉴에서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가장 큰 시음 행사. “5일간 쏟아지는 부르고뉴의 별들” 참고
[3] 꼬르똥(Corton): 부르고뉴 와인 생산지역 중 하나로 그랑 크뤼의 높은 등급을 생산한다.
[4] 카지노(Casino): 프랑스 마트 중 하나.
[5] 쏘씨쏭(Saucisson): 건조시킨 소시지.
[6] 비레-클레쎄(Viré-Clessé), 마꽁(Mâcon), 쌩-또방(Saint-Aubin), 뽀마르(Pommard), 볼네(Volnay): 모두 부르고뉴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마을 이름.
[7] 꼬스 데스 뚜르넬: 보르도 쌩떼스테프 지역에 위치한 그랑 크뤼 클라쎄 2등급 와이너리 샤또 꼬스 데스 뚜르넬(Château Cos d’Estournel)
[8] 멈(Mumm): 샴페인 브랜드
[9] 리브잘트(Rivesaltes): 남부 루씨용 지역의 와인으로 주정 강화 와인이다.
[10] 쌍세르(Sancerre): 루아르 지역에서 소비뇽 블랑 품종으로 화이트 와인을 만들어내기로 유명한 마을.
[11] 뽀므롤(Pomerol), 쌩떼밀리옹(Saint-Émilion), 쌩떼스테프(Saint-Éstephe): 보르도 와인 생산 지역
[12] 꼬뜨-로띠(Côte-Rôtie): 론 북부 지방에 있는 와인 생산지역으로 시라를 주 품종으로 한 레드 와인을 만들어낸다.
[13] 뱅 두 나뛰렐(Vin Doux Naturel): 자연적인 방법으로 달콤하게 만든 와인.
[14] 마데이라(Madeira): 포르투갈령 섬으로 주정 강화 와인을 만들어낸다.
[15] 마젤란(Marselan): 포도 품종
[16] 보자르 미술관, 장식 예술 및 디자인 미술관, 아키텐 박물관: 보르도에 있는 박물관
[17] 비오디나미(Biodynamie): 월력을 따르는 바이오다이나믹 농법.
[18] 그랑 크뤼 클라쎄(Grand Cru Classé): 보르도 메독 지방을 중심으로 1855년에 만들어진 등급.
[19] 뽀앙 후즈(Point Rouge): 보르도 유명 바
[20] 팡 보아(Fin Bois), 보르드리(Borderies), 쁘띠뜨 샹빠뉴(Petite Champagne), 그랑드 샹빠뉴(Grande Champagne): 꼬냑의 세부 지역
[21] 세미나 상세 기사 와인21닷컴 “꼬냑 완전 정복하기” https://www.wine21.com/11_news/news_view.html?Idx=16946
[22] 에빰프라주(Épamprge): (포도나무의) 잎[가지]을 제거하기
[23] 페르미에(Fermier): 치즈를 생산하는 곳
[24] 앙제(Angers): 루아르에 위치한 소도시
[25] 쉐브르(Chèvre):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
[26] 봉 꾸하주(Bon courage): 화이팅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