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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르도농부 Oct 02. 2022

와이너리 지하 숙성고에서의 오페라 공연

"다니엘, 다음 주 토요일에 우리 와이너리에서 음악회 하는데 보러 올래?"


 엘리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동안 우리는 꽤나 친해졌고 와이너리에서 열리는 행사에 무료로 초대할 수 있는 자리가 있어서 조니와 나를 초대한다는 것이었다. 엘리가 일하는 곳도 궁금했었고 와인 테이스팅은 물론이고 음악회까지 볼 수 있다니 냉큼 좋다고 답했다. 포도밭에서의 일주일을 또 버텨내고선 토요일이 왔다. 하브지 광장 쪽에 살고 있던 엘리와 조니는 차를 타고 나를 태우기 위해 쌩-또귀스탕 트람역까지 왔다. 엘리가 일하는 샤또 피숑 바홍[1]은 뽀이약[2] 마을에 있었고 그곳까지 가는 길에 내가 일하던 샤또 마르키 달렘을 지나쳤다. 평소 버스로 고생해서 힘들게 가는 길을 차를 타고 가니 금세 지나게 되었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리니 뽀이약이라는 글자가 쓰인 간판이 보였고 사진으로만 보던 삐숑 바홍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보자마자 압도당하는 웅장한 정문을 지나쳐 뒤쪽 직원 주차장을 통해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공연은 저녁이었지만 엘리는 미리 준비해야 했고 일찍 오는 김에 조니와 나에게 와이너리 투어를 먼저 해주기로 했다. 친구들 앞에서 얘기하기가 쑥스러운지 엘리는 몸을 비비 꼬며 설명했고 조니는 그 모습을 열심히 놀려댔다. 와이너리는 17세기 말, 바롱 자크 피숑 드 롱그빌[3]이 설립했고 19세기 중반에 두 아들과 세 딸이 대립하며 두 개의 와이너리로 분할되었다고 한다. 세 딸이 가져간 부분은 피숑 꽁떼쓰[4]가 되었고 두 아들이 가져간 부분은 피숑 바홍이 되었다. 피숑 라울 바홍[5]은 꽁떼쓰보다 더 알아주는 와이너리를 만들길 원했고 샤또 팔머[6]를 지은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뽀이약 최고의 샤또 건물을 짓게 하였다. 1851년에 와이너리를 물려받고서 4년 뒤, 나폴레옹 3세의 지시로 만들어진 그랑 크뤼 클라쎄 등급[7]에서 당당히 2등급을 받게 되었다. 1987년에는 악사 밀레짐이 와이너리를 매입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명성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간단하게 브랜드 소개를 하더니 아래층의 양조와 숙성 공간으로 안내했다. 마르키 달렘보다 훨씬 커 보이는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들이 줄지어 놓여있었고 이곳에서 양조한 뒤 숙성까지 거치고 발효 공간인 지하 1층보다 아래층인 지하 2층에 거대한 콘크리트 통에 모든 와인을 넣어 블렌딩한 뒤 출시한다고 한다. 한 층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콘크리트 통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도무지 상상이 안 가 집요하게 질문을 하니 엘리도 직접 본 게 아니라 답변하기 곤란하다며 서둘러 숙성고로 이동했다. 프랑스로 와 네다섯 개 와이너리 정도밖에 못가봤지만 삐숑 바홍의 오크 배럴 숙성고는 그만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더욱더 점잖고 멋스러운 중년의 느낌이랄까. 수확한 첫해에 발효를 마친 후 오크 배럴에 와인이 들어가 반년 정도 있다가 2년 차 숙성고로 옮겨져 1년을 더 숙성한 뒤 출시한다고 한다. 얼마 전 1년 차 숙성고를 비웠고 그 공간에서 오늘 공연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2년 차 숙성고에 놓인 오크 배럴의 끝 쪽에는 하나같이 독특한 나무가 덧대어져 마감되어 있었다. 보통은 철로 된 띠를 둘러서 오크 배럴이 벌어지며 와인이 새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끝 쪽에 둘러진 나무 띠가 특이했다. 엘리는 요즘에는 그리 실용성이 없는 것 같지만 과거에는 벌레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알려줬다. 일부러 밤나무를 구해 띠를 만들어둠으로써 벌레들이 오크 나무보다 밤나무를 먼저 갉아 먹게 만들어 오크 나무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양조장과 숙성고를 거쳐 테이스팅 룸으로 올라가는 길에 쇠창살로 두껍게 만들어진 문 너머로 와인들이 줄을 맞춰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엘리도 접근할 수 없는, 와이너리의 중요한 손님들을 위해 보관해둔, 올드 빈티지들이었다. 창살과 창문 너머로 1977년, 1971년 빈티지도 보였고 더 오래된 1959년과 1955년, 그리고 85년이나 잠들어 있던 1943년 빈티지가 보였다. 와이너리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세월을 오롯이 담고 있는 이 와인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하며 테이스팅 룸으로 향했다. 아피 드 롱그빌, 피숑, 바볼리에[8] 가문의 결합을 의미하는 화려한 방패 문장을 양쪽에서 수호하는 전설 속의 동물 그리폰[9]이 라벨 전면을 차지하는 그랑 방[10], 샤또 피숑 바홍 2015년 빈티지부터 세컨드 와인인 레 그리퐁 드 피숑 바홍[11] 2015년, 마지막으로 피숑 바홍의 상징적인 두 개의 탑을 지닌 샤또 건물이 그려진 레 투렐 드 롱그빌[12] 2015년 빈티지를 차례로 테이스팅했다. 엘리가 자신들은 써드 와인까지 모두가 뽀이약 아펠라씨옹[13]의 와인만 생산한다며 등급을 낮춰 품질과 타협하지 않는다면서 자부심 넘치는 말투로 설명해주었다. 대부분 와이너리가 써드 와인은 등급이 낮은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랑 방은 물론이거니와 나머지 두 가지 와인 모두 흠잡을 곳이 없을 만큼 좋은 품질을 보였다. 1시간 정도 투어를 진행해준 엘리는 와인과 함께 우리를 테이스팅 룸에 남겨두며 더 마시고 싶으면 알아서 더 따라 마시라더니 행사 준비 때문에 일하러 가봐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행사 시작까지는 2시간 정도가 남은 상황이었고 잠시 주변 와이너리들이나 다녀올까 하고 조니와 함께 나왔다. 테이스팅 룸을 나오자마자 조금 전까지 지겹도록 들었던 유명한 샤또 건물이 웅장하게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정사각형의 인공 연못이 맑은 날씨 속 샤또 건물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와이너리 전경을 몇 장 카메라에 담고선 주차장으로 향하다 잠시 포도밭을 살펴봤다. 그래도 몇 달 동안 일했다고 조니에게 아는 척을 하며 포도밭 업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피숑 바홍 포도밭도 깨끗하게 잘 관리되었고 포도는 여전히 녹색을 띠고 있었다. 바로 근처인 샤또 라뚜르[14]를 향해 갔지만 입구는 잠겨있었고 그 유명한 탑을 멀리서 바라보고 사진 찍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선 또 다른 유명한 1등급 와이너리인 샤또 무똥 로칠드[15]로 향했다. 전통적인 느낌은 전혀 없이 현대적인 건물과 정원으로 꾸며진 모습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손님을 맞아 투어를 진행해주는 직원과 눈이 마주쳤는데 편하게 둘러보라는 말에 포도밭을 잠시 둘러보다 나왔다. 와이너리 건물이 있는 곳 근처 포도밭은 그저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는 곳이었는지 다른곳 보다 관리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흘르바주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채 자라는 대로 그냥 놔둔 모습이었다. 급작스러운 방문으로 테이스팅도 할 수 없었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날은 여전히 밝았지만, 어느덧 저녁 7시 정도가 되었다. 집에서 점심을 대충 먹었고 저녁 식사는 제공되지 않고 8시부터 공연이 시작되었기에 허기를 채우기 위해 근처 숲으로 차를 몰아 조니와 샌드위치를 나눠 먹었다. 이미 말할 거리가 소진되었는지 두 개로 찢어 나눠 가진 샌드위치만 서로 입에 물고서 어색함 속에서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샌드위치를 다 먹고 이곳저곳을 더 기웃거리다 다시 와이너리로 오니 그새 손님들이 도착해있었다. 조금 전 살펴본 1년 차 숙성고에 무대가 마련되어있었고 양쪽 벽 옆으로 비어있는 오크통이 가득 쌓여있었고 무대 앞쪽으로 좌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와이너리에서 무료로 초대한 직원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무대에서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지하 꺄브 특성상 소리가 잘 울려 괜찮았다. 글루크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16] 아리아 공연이었다. 무대는 장관이었다. 오크 배럴에 둘러싸여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이 뿜어내는 소리는 공간을 가득 메우고 반사해 웅장하게 들렸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조금 전까지 와인을 마시고 샌드위치를 꽤나 배부르게 먹은 탓에 몰려오는 졸음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반쯤 졸면서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고퀄리티 공연에 만족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로 마무리가 되어가던 무렵 샤또 삐숑 바홍의 사장이 단상에 올라 바깥쪽에 와인을 준비해두었다는 말을 전하자 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건물로 나가보니 긴 테이블 몇 개 위에 와인잔 수십 개에 와인이 따라져 있었다. 정장과 연미복, 이브닝드레스 등 한껏 꾸미고 온 보르들레[17]들은 서두르는 법 없이 우아하게 와인 잔을 하나씩 들더니 조금 전의 공연에 대한 평을 남기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면에는 낮에 봤던 그 웅장한 샤또 건물이 아래에서 밝힌 조명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양옆에는 언젠가 건물 디자인상에서 우승한 이들이 지은 건축물이 조명을 받고 서 있었다. 다소 저렴한 써드 와인뿐만 아니라 세컨드 와인과 그랑 방까지, 엘리를 포함한 삐숑 바홍 직원들은 손님이 달라는 대로 와인 잔을 채워주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너무나 낭만적으로 느껴졌고 그 순간 내가 처한 상황을 모두 잊게 만들어줬다. 조니와 둘이 붙어 다니며 깊은 얘기를 나눴는데 서로 고민이 많은 시기였다. 나는 나 나름대로 포도밭에서 육체적인 어려움, 그리고 워킹 홀리데이 이후의 거취가 걱정이었고 조니는 사진 전공으로 평생을 사진만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와인 쪽으로 커리어 전환을 하게 돼 아직까지 진로가 정확히 잡히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서로 이런저런 고민을 나누다 보니 와인을 나눠 마시던 손님들은 하나둘 자리를 떠났고 10시에 시작된 야외 와인 파티는 11시 반쯤 끝났다. 엘리를 도와 뒷정리를 하고선 자정이 되어서야 하늘에 수 놓인 은하수를 보며 와이너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고요했다. 마법과도 같았던 시간은 끝났고 현실로 돌아가는 길에 잡생각이 많아졌다.


[1] 샤또 피숑 바홍(Château Pichon Baron): 엘리가 일하던 와이너리. 보르도의 북부, 뽀이약 마을에 위치한 그랑 크뤼 클라쎄 2등급의 고품질 와이너리이다.

[2] 뽀이약(Pauillac): 보르도 북부에 위치한 와인 생산 마을로 보르도에서도 진한 스타일의 와인으로 유명한 곳이다.

[3] 바롱 자크 피숑 드 롱그빌(Baron Jacques Pichon de Longueville)

[4] 피숑 꽁떼쓰(Pichon Comtesse): 피숑 바롱과 분리된 와이너리로 정확한 와이너리 이름은 샤또 피숑 롱그빌 꽁떼쓰 드 라랑드(Château Pichon Longueville Comtesse de Lalande)이다.

[5] 피숑 라울 바홍(Pichon Rahoul Baron): 꽁떼쓰와 분리될 때 두 아들 중 한 명

[6] 샤또 팔머(Château Palmer): 마고 마을의 3등급 와이너리로 슈퍼 세컨드로 불리우며 그랑 크뤼 클라쎄 1등급과 품질을 겨루는 와이너리. 피숑 바홍과 비슷한 스타일의 건축물로 유명하다.

[7] 그랑 크뤼 클라쎄 등급(Grand Cru Classé): 1855년 나폴레옹 3세의 명으로 만국박람회를 위해 당시 거래 가격을 기준으로 메독 지역의 와인을 1등급에서 5등급으로 나눈 등급 체계이다.

[8] 아피 드 롱그빌(Affis de Longueville), 피숑(Pichon), 바볼리에(Bavolier): 각각 가문 이름이다.

[9] 그리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동물로 몸은 사자이고 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이며 귀는 말이고 볏은 물고기 지느러미를 지녔다.

[10] 그랑 방(Grand Vin): 특히 보르도 와이너리에서 만들어내는 간판 와인. 그보다 품질이 낮은 와인들은 세컨드 와인, 써드 와인으로 분류한다.

[11] 레 그리퐁 드 피숑 바홍(Les Griffons de Pichon Baron)

[12] 레 뚜렐 드 롱그빌(Les Tourelles de Longueville)

[13] 뽀이약 아펠라씨옹(Pauillac Appellation): 와인의 지역 등급을 의미하며 뽀이약 마을에서 재배된 포도로만 와인을 만들었을 때 이 등급을 받을 수 있다. 뽀이약 아펠라씨옹은 일반적으로 더 넓은 지역인 오-메독 아펠라씨옹이나 보르도 아펠라씨옹보다 더 좋은 등급이며 포도밭의 가격도 더 비싸다.

[14] 샤또 라뚜르(Château Latour): 보르도 그랑 크뤼 클라쎄 1등급에 해당하는 와이너리로 피숑 바홍에서 굉장히 가까이 있다.

[15] 샤또 무똥 로칠드(Château Mouton Rothscild): 보르도 그랑 크뤼 클라쎄 1등급에 해당하는 와이너리로 총 5개 1등급 와이너리 중 3개의 1등급 와이너리가 뽀이약 마을에 있다.

[16]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가 작곡한 3막의 오페라로 오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17] 보르들레(Bordelais): 파리에 사는 사람을 파리지앵이라고 하듯 보르도 사람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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