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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르도농부 Sep 18. 2022

5월, 세조니에, 제레미, 그리고 프랑스식 정찬

제레미를 처음 만난 날

 긴 주말을 보낸 후 목요일에 다시 출근했을 때 꽤나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세조니에[1]들이었다.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수개월 동안 계약을 맺고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고 프랑스인들도 꽤나 많았다. 대부분 차를 타고 왔고 개중에는 시끄럽게 땍땍거리는 구형 오토바이도 보였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이들이 몸으로 돈을 벌기 위해 오기도 했기에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의 차를 타고 오기도 했다. 브레이크가 갑자기 말을 안 들어 내달리다가 결국 가로수를 들이받고 내려앉은 범퍼와 깨져있는 전조등 커버, 청테이프로 칭칭 감겨있는 부서져 있는 사이드미러, 타이어는 이미 전부 맨들맨들해져 홈이라고는 없는, 언제 미끄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인 구식 르노 차량 내부는 재떨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담배꽁초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을 옮겨주는 역할만 하는, 돈을 벌게 해주는 곳까지 이동만 가능한 그런 상태의 차량이었다. 세조니에 중에는 어린 학생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방학 등을 이용해 잠시간 용돈을 벌 목적으로 오는 이들로 비교적 깔끔하게 관리한 클리오 오떵틱을 끌고 왔다. 뒤쪽 유리창에는 A자 스티커[2]를 붙이고서 출퇴근할 때는 좁은 뒷자리까지 빼곡하게 친구들을 구겨서 실어서 오갔다. 서로가 낯선 이방인을 보듯 하는 시선 사이에서 기다리다 보니 아메드와 산드린이 다가왔다.


"봉주르 다니엘,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어요. 오늘 사람이 많네요?"

"오늘부터 세조니에들이랑 일하기 시작할 거에요. 여기 잠깐 기다려요."

"네"


"자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팀을 나눠서 움직일거에요. 저 아메드와 산드린, 디디에 이렇게 총 3개 팀으로 나누겠습니다. 이름 부르면 손들어주세요. 먼저 프레데릭, 세바스티앙, 니꼴라, 도미니크, 필립, 피에르, 루이즈, 미셸. 네 저랑 같이 가면 되요 자 다들 차 끌고 저기 보이는 흰색 작은 차량 있죠? 그 차 따라오시면 됩니다."

"자 다음 산드린 팀 이름 부를게요. 파블로, 미겔, 로라, 로라 오랜만이네. 동...관... 오. 아 다니엘? 너 이름이 동관이야?"

"아뇨 동환이에요"

"뭐 어쨌든, 다음! 루이, 클레어, 까미유 여기까지가 산드린 팀이에요. 우리는 차 잠시 두고 옆쪽 밭부터 시작할게요."


 프랑스에서는 H를 발음하지 않는 탓에 내 이름은 어느새 동관이 되어버렸다. 당분간 함께하게 된 팀에는 스페인 삼총사 파블로, 미겔, 로라와 프랑스인 루이, 클레어, 까미유와 함께하게 되었다. 로라는 벌써 삼 년째 라베고스로 포도밭 일을 하러 오고 있어서 그런지 산드린을 포함해 다른 직원들과도 안면이 있었다. 다소 작은 키에 풍만한 스타일의 로라는 활기가 넘쳤고 붙임성이 좋았다. 파블로와 미겔과 열심히 스페인어로 떠들며 일하다가도 루이, 클레어, 까미유가 옆에 있으면 서스름없이 프랑스어로 말을 붙였다. 일 잘하는 에이스로 남자들은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스피드와 체력을 갖고 있었다. 팀에서 내 작업속도가 가장 느렸는데 로라가 한 줄을 다 끝낼 때까지 반도 못하고 있으면 슬쩍 내 쪽으로 와서 반대편에서 밭일하며 도와주곤 했다. 파블로는 키가 아주 컸고 호탕한 성격이었지만 항상 입을 벌리고 다녀 약간은 바보스럽게 보였다. 손이 컸지만 섬세한 작업도 잘해서 로라와는 항상 작업량 1, 2위를 다퉜다. 프랑스어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하는 편이었지만 잘하는 편은 아닌데다가 영어는 못해 나와는 거의 대화를 하진 못했다. 삼총사의 막내 같은 미겔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왜소한 체형을 가졌다. 키도 작은 편이었고 굉장히 마른 편으로 항상 캡 모자를 쓰고 와서 까불거리며 막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일도 곧잘 했지만,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못 해 항상 로라가 팀장들이 하는 이야기를 전달해줬다.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아 안쓰러우면서도 그래도 내가 낫지 하는 안도감과 로라의 존재가 부러운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이 셋은 항상 함께 팀 배정이 되었고 같이 다녔는데 담배를 그렇게 피워댔다. 평소에 보던 곽에 들어있는 담배가 아닌, 한 손으로 잡기 어려운 크기의 틴케이스 안에 잔뜩 들어있는 담뱃잎들을 한 웅큼 쥐어 조금 전에 열심히 침을 발라놓은 흰색 담배용 포장지에 넣은 뒤에 필터를 끼워 돌돌 말아 불을 붙여 피웠다. 특히 미겔이 많이 폈는데 그래도 손이 빨랐던 미겔은 포도밭의 반대편에 도착해 조금만 쉬는 것 같다 싶으면 바로 담배를 꺼내 능숙하게 말아서 피웠다. 한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큰 박스가 가방도 없는 몸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우리 팀을 포함해 세조니에들이 못 해도 30명은 모인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인 이유는 85헥타르나 되는 넓은 포도밭을 일일이 손으로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헥타르가 축구장 잔디 면적보다 크니 85헥타르면 축구장 140개 정도의 엄청난 크기였다. 와이너리의 차고 옆에 있는 작은 포도밭 앞으로 다들 모였을 때 산드린은 우리를 줄 세워두고 잘 보라는 손짓을 했다.


"자 오늘부터 할 일은 데두블라주[3]라는 작업이야. 두블르[4]가 뭐야. 자 이렇게 포도나무에 순이 하나만 자라야 하는데 두 개 이상이 동시에 자란걸 두블르라고 해. 이걸 손으로 없애주는 작업이 데두블라주야. 이걸 왜 해줘? 자 여기서 하나만 나와서 가지가 자라야 거기에 포도가 달리고 그 포도가 건강하겠지. 근데 이렇게 두 개씩 달리면 어때? 두 개의 가지에서 자란 포도 모두 품질이 떨어져. 그리고 이렇게 어릴 때 따줘야 쉽게 손으로만 딸 수 있어. 우리가 꾸물거려서 시간이 지나서 이걸 없애준다고 하면 이미 어느 정도 자라서 손으로 꺾기 어렵고 이미 한쪽에서 영양분을 다 먹어버려서 품질이 안 좋을 거야. 자 다 알아들었지? 이렇게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다 없애주면 돼. 그리고 명심해야 할 점이 있어. 포도나무가 뻗어나가는 방향으로 자란 순은 내버려 두고 반대 방향으로 자란 순을 꺾어줘야 해. 다 알아들었지? 자 각자 한 열[5]씩 맡아서 옆으로 서! 항상 자신의 오른쪽 나무만을 하는 거야. 갈 때는 오른쪽 올 때는 왼쪽. 준비됐어? 자 출발!"


 다들 출발 신호와 함께 무릎 높이도 안되는 포도나무로 쪼그린 채 손을 뻗어 데두블라주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꾸물거리는 날씨에 작열하는 햇볕은 없었지만 금세 땀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작업은 고되었다. 나무 한 그루당 가지가 8-10개 정도 열리고 많을 경우 모든 가지에서 두블르가 자라기도 한다. 속도를 내겠다고 마구잡이로 뜯어내다 보면 그해에 자라야할 멀쩡한 가지 순마저 없애버릴 수 있기에 어느 정도 신중함은 필요하다. 그렇게 나무 하나를 끝내고 앞을 바라보면 아직도 내가 서 있는 열에 40그루 정도가 남아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찌저찌 한 열의 끝까지 작업을 끝내고 나면 바로 작업하지 않은 옆 열로 이동한다. 한 구획에 많게는 수백 개의 열이 있기도 하다. 라베고스의 경우 1헥타르에 12,000그루 정도가 심겨있고 그런 밭이 85헥타르가 있으니 나무가 백만 그루가 넘는데 그걸 고작 30~40명이 매일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40명이 한다면 한 명당 25,000그루를 처리해야 하고 25영업일 기준으로 하루 1,000그루, 일 7시간 근무 시간 기준으로는 시간당 140그루, 1분에 2.3그루, 26초에 1그루씩 작업을 해야 한 달 내로 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조금 전 40그루 한 개의 열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25분은 걸린 것 같다. 한 개 열을 작업하는데 17분 남짓 걸려야 하는 것에 비해 더뎠다. 속도가 너무 느리자 산드린은 옆에서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낮은 자세로 일하는 것 또한 엄청난 고역이었는데 쭈그려 앉아 작업을 하자니 금세 다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고 다리가 아파 선 채로 허리를 구부려 일하면 또 그대로 허리가 아팠다. 한국에서 밭에서 어머니들이 사용하는 쿠션 의자 같은 걸 사볼까 했지만 깔고 앉았다 일어나는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릴 것 같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똑같이 힘들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내 바람일 뿐이었다. 스페인 삼총사는 진작에 앞서 나갔고 그나마 20살도 안된 어린 클레어와 까미유도 어느 순간 나를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열 한 개의 작업을 끝내고 몸을 피려고 일어나보면 모두의 시선이 내게 따갑게 꽂혀있었다. 산드린의 지시에 따라 다음 열로 이동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조금 전에 했던 그 지겹고 고된 작업을 다시 해야 하는 것이었다.


 열 시즈음, 작업 두 시간 정도가 경과하고 나서 꿀 같은 휴식 시간이 왔다. "커피 휴식"이라고 부르는 시간으로 포도밭 노동이라서 있는 건 아닌, 프랑스 특유의 문화였다.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그야말로 커피와 간식을 먹는 휴식 시간이었다. 이런 문화는 전혀 몰랐던 나는 첫 1주일 동안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그저 정규직 팀원들이 가져온 커피와 간식을 나눠 먹었었다. 그 뒤부터는 마트에 가서 이런저런 간식들을 준비해갔는데 가끔은 팀원 중 한 명이 쇼콜라틴[6]을 20개씩 사 와서 하나씩 나누어 먹곤 했다.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빵은 무언가. 크로아상 아닌가. 하지만 이렇듯 하루종일 몸을 쓰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크로아상은 사치였다. 같은 페이스트리이지만 당을 채워줄 수 있는 쇼콜라가 들어간 쇼콜라틴이야말로 포도밭 "커피 휴식"에 가장 어울리는 간식이 아닐까. 각자가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커피와 간식을 먹으며 충전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에 담배로 충전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저런 간식을 권해도 단 것은 별로 당기지 않는지 끝까지 거절하고 그저 포도밭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이들도 있었다. 몸을 쓰는 업무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이러한 휴식 시간 존재 자체도 도움이 됐지만 어쨌든 이런저런 간식을 몸에다 밀어 넣어 당을 충전시켜주어 점심시간까지 다시 버틸 힘을 주는 것이 이 커피 휴식을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였다. 그렇게 15분간의 짧은 휴식 시간이 지나고 또다시 지루한 업무를 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 일과를 하면 4시 퇴근 시간이 금세 다가왔다.




 세조니에들과 일한 지 며칠이 지났을까, 그날도 아침에 모였던 곳으로 까미용을 타고 도착해 퇴근하며 짐을 챙겨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뒤쪽에서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가 들리더니 스르륵하고 옆쪽으로 자전거를 탄 제레미가 나타났다.


"안녕, 이름이 동관이었지?"

"안녕하세요, 동환이에요. 근데 다니엘이라고 불러도 돼요."

"아 다니엘. 반가워. 나는 제레미라고 해. 혹시 잠깐 시간 돼? 버스 시간 늦거나 하지 않았어?"

"20분 정도 기다려야 해서 아직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같이 일하는데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잠깐 걸으면서 얘기할 수 있어? 영어로 할까?"

"오 제발요. 영어 할 줄 알아요?"

"응 조금. 그래 영어로 하자. 와이너리에서 동양인은 처음 봐서 신기했어. 프랑스에 어떡하다 오게 된 거야?"

"아 저는 원래 와인 기자이고 와인 수입사에서 일하다가 프랑스어도 배우고 싶고 와인 양조도 배우고 싶어서 워킹 홀리데이로 1년 왔어요."

"오 멋지네! 나는 겨울부터 라베고스에서 일하고 있어. 저기 라베고스 사무실 있지? 거기 옆에 숙소에서 지내고 있고. 너는 어디 살아?"

"저는 보르도 시내에 살아요. 버스 타고 트람 두 번 타고 두 시간 넘게 걸려요. 근데 사무실 옆에 숙소가 있어요?"

"응 근데 파비앙이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럼 방이 꽉 찼나 보다. 나중에 한 번 물어봐."

"네네 물어봐야겠네요."

"오케이! 뭔가 궁금했어서 말 걸어봤어. 종종 영어로 얘기하자 나도 연습하게. 잘 가고 내일 봐!"

"좋아요! 영어로! 내일 봐요!"


 다시 훌쩍 자전거를 타고 사무실 쪽으로 멀어져가는 제레미를 보며 살짝 질투심이 느껴졌다. 왜 내게는 숙소 얘기를 해주지 않은 것인지. 면접 때 분명 숙소가 있으면 돈을 내고서라도 들어오겠다고 했었지만 마르졸렌에게 무시당했던 터였다. 그렇게 약간은 우울해진 채로 버스에 타려는데 이번에는 기사가 보자마자 반갑게 시비를 걸어왔다.


"어이, 탈 거면 손을 들어라."

"무슨 소리에요 저 방금 손짓했잖아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냐 탈 거면 손을 들어서 확실힌 싸인을 보내야지."

"방금 손짓..."


 귀찮다는 듯 뒤로 가라는 손짓을 하고선 그대로 출발해버리는 기사였다. 영어로 대화할 친구를 얻은 날이자 힘든 출퇴근길에 다시금 기분이 우울해진 상태에서 인종 차별인 것인지 그냥 성격이 괴팍한 노인네인지 때문에 분노까지 생겨버린 하루였다. 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자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들리겠지 하며 틀어놓은 프랑스 뉴스가 흘러나왔다. 날씨는 분위기를 맞추지 못하고 쨍쨍하게 햇볕을 내리쬐고 있었다.




 머나먼 출퇴근 길에 육체노동으로 고통받으며 빠른 듯 느리게 일주일이 또 지났고 늦잠이 허용되는 토요일이 밝았다. 오늘은 며칠 전부터 장-아르노가 얘기하던 '가족 점심'이 있는 날이었다. 처음엔 가족들끼리 점심을 먹느라 주방을 사용할 것이다 정도로 얘기를 해주었지만 세 들어 살고 있는 동양인에게 측은지심을 갖고 잘해주던 선한 영혼을 지닌 산드린이 다니엘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는 게 어떠냐는 말에 얼떨결에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장-아르노는 성인이 된 두 아들이 가끔씩 집으로 찾아오고 있었고 산드린은 중학생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들은 연인으로 매일같이 산드린이 장-아르노의 집으로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헤어져 각자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외국에서 지내본 경험이 많이 없던 내게 지긋이 나이 든 서로가 아름답게 사랑하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멋지게 느껴졌다.


 장-아르노의 두 아들 중 장남인 장-밥티스트만이 전날인 금요일에 와서 잠을 자고서 아침부터 분주히 주방에서 아버지를 도와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아르노는 다소 독특한 식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처음 이 집에 발을 들여놓는 날, 주방을 소개해주며 자신은 주방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니 마음껏 사용하라고 내게 말했었다. 그리고선 큼지막한 냉장고를 열어 보이며 본인은 한 칸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며 똑같은 색깔의 박스들이 잔뜩 쌓여있는 칸을 보여주었다. 조금 더 뒤에 안 사실이었지만 장-아르노는 식사때마다 항상 박스에 포장된 음식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바게트를 조금 손으로 떼어 함께 먹는 것으로 식사를 끝냈다. 먹는 것에 관심이 없는가 했는데 그렇다기엔 가끔씩 라 튀피나[7]라던가 모엘루즈 에 페르시에[8]와 같은 솜씨 좋은 곳들을 가보았냐며 황홀해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또 며칠 전에는 주방에 들어와 분주하게 계란과 해바라기씨유를 꺼내고 핸드믹서기를 조립하더니 신기한 걸 보여주겠다며 순식간에 마요네즈를 만들어냈다. 손가락에 핸드믹서기에서 묻은 마요네즈를 묻혀 입술로 가져가 빨아 먹으며 황홀해하는 그 모습이란! 먹을 것에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효율적으로 식사를 하는 노인이었다.


 장-밥티스트는 감자를 웨지로 깎고 오븐 판에 호일을 깔고 올려 올리브 오일과 소금 후추 간을 하고서는 그대로 오븐에 구워 간단하게 사이드를 완성했다. 장-아르노는 별다른 요리를 하지 않았는데 그저 깊고 길쭉한 오븐용 그릇에 정육점에서 사 온 소고기를 담아 소금과 후추를 뿌려 오븐에 돌리는 게 끝이었다.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간 프랑스인들과 함께 식사하며 느낀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3코스는 어느 정도 지킨다는 것이었다. 시내에 나가서 식사한다면 당연히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이 나라의 문화가 그러하니. 다만 도시락에까지 그러한 모습들이 드러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도시락을 싸 오는 모든 라베고스 정직원들은 본식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동안 자리에 앉아 간단한 샐러드라던가 하는 음식을 애피타이저로 먹는다. 그 뒤 전자레인지에서 음식을 꺼내 메인을 먹은 뒤 들고 다니던 아이스박스에서 차갑게 보관한 과일, 요플레, 초콜릿 등 디저트를 챙겨 먹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었다. '가족 점심'을 먹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과일 몇 가지를 넣어 뚝딱 만든 과일샐러드를 테이블 중앙에 붉은 장미 한 송이가 꽂혀있는 화병 옆에 두며 식사 시간이 시작되었다. 테이블 위에는 리오하[9] 와인 한 병이 놓여있었다. 프랑스까지 와서 스페인 와인이라니. 장-아르노는 레버도 없는 T자 코르크 스크류를 가져와 능숙하게 캡슐을 제거하고 코르크에 박아 넣더니 순식간에 퐁 하고 땄다. 각자 잔에 어느 정도 채우는데 성인이 된 장-아르노는 물론 산드린의 중학생 아들에게도 따랐다. 리오하의 레세르바[10] 등급의 와인이었지만 생산자가 그리 좋지는 않은지 그리 매력적인 와인은 아니었다. 금세 과일샐러드를 끝내고서는 주방에서 장-아르노가 통 고기를 썰어왔다. 전통적으로 많이 먹는다는 프리뜨 메종[11]을 곁들인 호띠 드 뵈프[12]였다. 물론 얼마 전에 만들어 여전히 신선한 마요네즈도 옆에 곁들여졌다. 바스크 지방 출신인 장-아르노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했는데 고기와 함께 내온 치피스테[13] 소스도 바스크 지방에서 주로 고기에 끼얹어 먹는 특산품이었다.


 그 유명한 주말의 프랑스 점심은 예상만큼 오랜 시간을 소비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아지니 금세 흥미를 잃었다. 두 연인은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갔는데 그래도 역시나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장-밥티스트는 파리에서 건축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인 장-아르노는 건축일을 하진 않았지만, 전기 엔지니어로 일했고 워낙 건축에 관심이 많아 그 피를 이어받은 것 같다. 이 집을 소개해줄 때도 뼈대 빼고는 본인이 전부 바꾼 거라고 몇 번을 자랑했었다. 우리가 밥을 먹고 있는 이 테라스와 주방 공간은 완전히 새로 만든 것이고 원래 거실도 아래에 있었지만, 차고와 창고가 필요했던 장-아르노는 거실을 한층 높여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여전히 재밌다는 듯 자신의 고향 비아리츠[14]에 별장을 구입하여 거의 매주 내려가 공사를 하고 있었다. 장-밥티스트는 파리에 있으면서 사실 2~3시간이면 오가는 짧은 거리이긴 했지만, 보르도에 그리 자주 내려오지는 않았다. 산드린의 어린 아들은 왜소한 체구로 수줍음이 많았다. 대화에 거의 참여하는 법 없이 고갯짓으로 거의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영화에 관심이 많아 학교에서도 영화 관련 수업을 듣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곤 했다. 그래도 한 달 가까이 지낸 장-아르노와 산드린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겠지만 두 아들은 나를 신기하게 여겼다. 호띠 드 뵈프를 썰어 먹으며 한국에서 프랑스로 오게 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디저트를 먹을 시간이었다. 가족 점심에 초대받은 데 대한 답례로 디저트는 내가 준비하고 싶다며 며칠 전에 우연히 들른 아시아 마켓에서 구입한 호떡을 구워왔다. 커피에 각설탕을 3~4개씩이나 넣어 먹는, 달콤한 걸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에게 딱 맞는 디저트였다. 디저트와 함께 식사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갑자기 장-아르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제대로 된 프랑스의 점심을 보여주겠다며 주방 옆 장롱으로 따라오라고 했다. 장을 여니 일흔 넘는 평생 모아온 각종 크리스탈 잔들이 가득 차 있었고 약간의 식재료와 디제스티프[15]들이 있었다. 그중 상자에 고이 모셔둔 술을 집어 들고선 마개를 퐁 하고 땄다. 아르마냑[16]이었다. 아르마냑을 제대로 즐기려면 우선 향을 즐겨야 한다며 마개를 딴 아르마냑 병목 위로 손등에 아르마냑 향을 묻히고서 코로 음미했다. 알코올의 거친 향이 찌를 듯이 느껴질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은은한 나무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잔 두 개를 가져와 기예망[17]의 1964년 아르마냑을 따라 마시는데 입안에서 느껴지는 복합미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40%의 높은 알코올의 강건함도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주는 부드러운 질감과 함께 한없이 깊게 내려가는 깊이감이 오랜 세월을 증명해 보였다. 천천히 아르마냑을 즐기고 있었는데 프랑스 점심의 마무리를 알리는 커피를 가져왔다. 프렌치 프레스로 내린 따뜻한 커피로 조금 시큼한 커피였다. 커피를 따르며 이렇게 전식, 본식, 후식을 먹고 디제스티프에 커피까지 마시면 완벽한 프랑스식 점심 정찬이 완성된다며 흐뭇해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장-아르노는 배를 몇 번 두들기더니 산드린과 함께 잠시 바다를 다녀온다며 떠났고 벨사의 사뿐거리는 기척만 들리는 집안에서 못다 잔 잠을 더 청하려고 침대로 향했다. 오랜만인 건지, 처음인 건지, 별다른 근심·걱정 없이 점심을 즐기고선 당장 기사를 손봐야 했지만 '오늘은 괜찮아'라고 자위하며 침대에 몸을 뉘며 잠을 청한다.


[1] 세조니에(Saisonnier): 계절직 근로자로 와이너리에서 일이 많아지는 시기인 5월~10월 사이에 한정적으로 고용하는 인력. 단기 아르바이트 인력이라고 볼 수 있다.

[2] A자 스티커: 프랑스에서는 운전면허를 딴지 1년 미만이 경과한 운전자들은 초보 운전자를 나타내는 A자 스티커를 붙이도록 강제하고 있다.

[3] 데두블라주(Dédoublage): 중복으로 자란 순을 제거해 하나의 가지만 자라게 만드는 작업.

[4] 두블르(Double): 영어로 더블, 중복으로 자란 순을 의미한다.

[5] 열(Rang): 포도밭이 심어진 한 줄을 부르는 단위로 밭에서 이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6] 쇼콜라틴(Chocolatine): 뺑 오 쇼코라(Pain au Chocolat)를 남프랑스 지방에서 부르는 말.

[7] 라 튀피나(La Tupina): 보르도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해산물과 육류를 사용해 정통 프렌치 음식을 만들어내는 명성 높은 레스토랑.

[8] 모엘 루주 에 페르시에(Moelleuses et Persillées): 보르도 샤르트롱에 위치한 숙성 스테이크 전문점.

[9] 리오하(Rioja): 스페인 와인 생산지역으로 보르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와인 생산지역이다.

[10] 레세르바(Reserva): 스페인에 존재하는 특별한 숙성 등급으로 오크통에 최소 3년 숙성을 거쳤을 때 받을 수 있는 등급이다.

[11] 프리뜨 메종(Frites maison): 수제 감자튀김.

[12] 호띠 드 뵈프(Rôtie de Boeuf): 오븐에 구운 통 쇠고기 요리

[13] 치피스테(Xipister): 비네거, 올리브 오일, 바스크 특산 에스플레뜨 후추, 마늘과 각종 허브가 들어간 소스로 바스크 지방에서 플랑차 음식에 빠지면 안 되는 필수 소스이다.

[14] 비아리츠(Biarritz): 바스크 지방 중 프랑스에 해당하는 곳. 휴양지로 유명하다.

[15] 디제스티프(Digestif): 소화를 돕는 술로 주로 꼬냑이나 아르마냑, 마르세이유의 파스티스를 꼽는다.

[16] 아르마냑(Armagnac): 꼬냑과 동일한 포도 품종을 증류해 만드는 브랜디의 한 종류로 보르도의 아래에 위치한 아르마냑 지방에서 나오는 증류주를 의미한다.

[17] 기예망(Guilleman): Domaine de Guilleman, Véritable Eau de Vie de Bas-Armagnac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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