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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29. 2016

그리움만 아는 이

음악 에세이 11 - 교양은 유연하게 훈련된 정신의 상태이다.

그분과 나는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였다. 항상 ‘김기사’를 대동하고 다니시는 그분은 한 눈에 봐도 ‘사모님’이셨다. 어느 날 그분이 나를 보자고 하시며 클래식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 차이코프스키의 ‘그리움을 아는 이’라는 곡을 아세요?” “네. 차이코프스키의 가곡이요... 제가 참 좋아하는 노래예요.” “아! 그게 가곡인가요? 얼마 전에 아이작 스턴이 연주하는 걸 들었어요. 너무 좋더라고...” 나는 이 정도 선에서 대화가 가볍게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어색한 관계에서 음악 얘기는 좋은 대화의 소재인 것이다.

  

“... 그런데 선생님, 그 노래를 내가 들었던 음반으로 구할 수 있을까?” “네? 만약 음반으로 만들었다면 가능하겠죠...” “그럼 아이작스턴이 연주한 거랑 또 원곡이 가곡이라고 하니까 가곡 음반으로도 해서 사다 줘요. 음반 사 오면 내가 페이는 할게.” 70이 다되신 사모님께서 너무나 세련되게 명령을 하시는 바람에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자리를 떠났다. 내가 나가는 문으로 그 사모님의 친구분이 들어오셨다. “어! 어서 와. 방금 그 음반 사 오라고 시켰어.” 앉아계시던 사모님께서 친구분에게 하는 인사말이 등 뒤에 꽂혔다.  

   

당황스러웠다. 이것이 우리의 첫인사와 대화였던 것이다. 자리를 나와 그분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분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분은 큰 기업의 회장님의 사모님이신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회사의 직원같이 대하신다고 하셨다. 내 경우는 그래도 괜찮은 경우에 속한다고 했다. 모임에 오면 차 심부름은 기본이고, 모임 장소의 꽃에 물을 주라는 명령까지 하신단다. 물론 그분의 연세가 워낙 많으시기 때문에 그분이 아랫사람으로 대하시는 것에는 불만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분과 나는 엄연히 상하관계는 아닌 것이다. 누구보다도 교양이 있어 보이는 분이셨지만 그분의 태도에 오히려 내가 민망했다.

   

사실 이런 일은 자주 있지는 않지만 종종 경험한다. 얼마 전에는 한 연주회에 가서 친구와 함께 연주를 기다리며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리 옆으로 나이가 지긋하신 신사분이 다가오시더니 음악을 좋아하냐고 물어보셨다. 음악회장에서 음악 얘기만큼 쉽게 말문을 틀 수 있는 소재도 없다. 친구와 함께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우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보아하니 혼자 오신 것 같아 친구와 함께 말동무나 잠시 해드리자고 눈빛을 교환했다. 그분을 배려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신사분은 자신이 음악계에서 아주 유명한 평론가라고 소개하셨다. 음악 기획사나 연주자들도 자신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며, 국내의 모든 연주회의 초대 리스트의 첫 번째에는 자신의 이름이 있다고 하셨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동안 받은 초대권들을 친히 꺼내서 직접 보여주시는 것으로 봐서는 아주 빈말은 아닌 듯도 했다. 게다가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한 연주자와의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 앞에서 직접 전화를 하시며 통화를 하시는 수고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한참을 음악 얘기만 빼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던 중에 새삼스럽게 큰 호응 없이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던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셨다.


“그런데 자네들은 뭐하는 사람들인가?” 둘 다 음악을 전공했고 지금도 음악 활동을 하는 우리는 난감해졌다. 서로 불편해지기 싫었다. 상황 대처가 빠른 친구가 얼른 대답했다. “저희는요, 그냥 음악 애호가들이에요...” “아!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우리 이따가 연주회 휴식 시간에 다시 여기에서 만납시다.” “아, 네... 알겠습니다.” 연주회장으로 들어서며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그렇게 좋은 음악을 그렇게 많이 누리시면서 저렇게 교양이 없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날 우리는 끝내 그분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은 어려운 말을 구사하는 능력과 아무 관계도 없다. 교양은 문화사의 기본적인 특징을 파악하고 미술, 음악, 문학의 대표작을 이해하는 것이다. 교양은 유연하게 훈련된 정신의 상태이며, 모든 것을 한 번 알았다가 다시 잊었을 때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교양은 문화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어색하게 남의 눈에 튀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교양은 직업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전문가의 양성과는 반대로 보편적인 인격 형성을 핵심이념으로 한다.”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교양’이라는 책을 저술한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말이다.


교양은 어떤 것에 대해 아는 척, 잘난 척 하는 교만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문화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유연한 소통을 돕는다. 그리움만 알아도 상대편을 난처하게 하며 유명한 음악회와 연주자들만 줄줄이 읊어도 곤란하게 만든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세련되고 세심한 배려로 관계에서 어색함과 불편함을 해소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차이코프스키의 가곡,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직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 나의 괴로움을 알리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움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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