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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30. 2016

관객1의 입장

음악 에세이 12 - 관객은 무대를 위한 볼모가 아니다.


한 음악캠프에서의 일이다. 일주일간 모든 참가자들의 리허설과 연주를 지켜보시던 한 선생님께서 마지막 날, “관객1 역할 하기 정말 힘들다!”라고 장난스럽게 푸념하셨다. 옆에 계시던 또 다른 선생님께서 거드셨다. “앞으로는 관객들에게 돈을 주고 연주하도록 할까?” 다시 처음의 선생님께서 덧붙이셨다. “템포를 빠르게 당겨서 하는 연주 환영! 연주 내용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겠음!” 옆에서 가만히 웃고 있었지만, 기실 나 역시 관객2의 역할이 힘든 참이었다. 연주자1이었을 때는 들을 수 없던 관객들의 속내였다.

   

연주자들에게 무대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장소이다. 오랜 기간 무대는 나에게 심판대와 같았다. 나는 죄를 짓고 고해성사를 하듯 연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 직전에 화장실 안에서 정신없이 떨다가 한 가지 물음에 사로잡혔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듣는 사람들은 편하게 즐기다니... 결국 다른 사람들만 좋은 것 아니야?’ 끌려가듯 무대에 올라가면서 물음은 확신으로 변했다. 뭔가 혼자만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글쎄, 그러한 내 연주를 듣는 이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사실 클래식을 즐기는 이들조차 유명 연주자가 아닌 아는 연주자의 연주회에 가기를 망설이는 모습을 흔히 본다. 전공을 하지 않았지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할 만큼 음악을 좋아하는 한 후배가 아는 사람의 연주회에 갔다 왔단다. 친구와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연주회에 참석했는데, 첫 곡 연주를 들으며 어떻게 연주회의 끝까지 견딜 것인지 답답했다고 한다.

   

연주회가 끝난 후에 옆의 친구는 ‘클래식 음악은 고상하지만 고루한 것’이라는 편견을 더욱 확고히 했다. 그 후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연주자가 얼마나 연습했는지 확인하러 음악회 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연주회 또 안 가고 싶어요.” 연주자가 관객들의 심정을 일일이 헤아릴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선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무미건조한 연주회를 들은 한 후배의 말을 통해 새삼스레 느꼈다. 흔히 행복하려면 남의 시선과 높은 기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을 행복하게 하려면 문제는 달라진다.

   

세계인의 축제라고 불리는 올림픽을 생각해보자. 올림픽의 무엇이 전세계인들의 시선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일까? 2008년 베이징 대회의 개막식은 사상 최다의 인구가 함께 본 사건으로 기록됐다고 한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이것은 올림픽의 슬로건이다. 어쩌면 이 안에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육체를 통한 정신의 승리, 정신에 의한 육체의 승리를 목격하려는 소망 같은 것 말이다.

   

선수들은 각 국가를 대표하지만 그들은 또한 인류의 대표이기도 하다. 달리기, 높이뛰기, 역도 등 특정한 능력이 극대화된 한 인간의 모습을 그들은 보여주는 것이다. 세계 신기록이 새롭게 갱신되는 순간, 그것은 개인의 성취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성취이기도 하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만 올림픽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도전과 성취가 극적으로 나타나는 감동적인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보기 위해 전 세계가 4년마다 한 번씩 밤잠을 설치며 들썩인다.

   

그런데 기대감에 들뜨는 관중들과 달리 무엇인가를 보여줘야 하는 선수들은 압박감에 시달린다. 고통스러운 훈련을 견딘 후에 비장한 모습으로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그들에게 ‘왜 훈련을 즐기지 못하는가, 왜 경기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가?’라고 탓할 수는 없다. 극심한 경쟁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끝없이 뛰어넘는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 좋아하지 않는 수많은 일들을 감당한다. 일상의 즐거움과 안락함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남다른 시선을 받는 특권에는 특별히 높은 기준이 요구된다.

   

얼마 전에 모교의 화장실에 갔다가 벽에 붙어 있는 글귀를 봤다.


“난 너희들이 너무 부럽다. 열심히 공부해라. 우리가 열심히 청소해줄 테니까. 미화원 일동”


연주 직전 화장실 안에서 나만 힘든 것 같다고 철없이 불평하던 20대 초반의 내가 떠올랐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대중목욕탕에서 일하는 분들을 부러워했던 과거까지 내게는 있다. 휴식 시간에 바닥에 누워 TV를 보는 모습이 연습에 시달리던 꼬마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편안한 직업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제는 예전의 부러움이 부끄럽다.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작곡가들이 자기 인생이 고달프다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자기 관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회계원에게 물어보라. 그는 자기 인생과 직업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할 것이다. 직업 때문에 신세를 망쳤다. 일이 너무 지루하고 무미건조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회계원은 작가가 되려고 했지만 인생 때문에 회계원이 된 것이다.

   

그런데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주장에 따르면 작곡가의 경우는 이와 좀 다르다. 작가치고 자기는 회계원이 되려 했는데 인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곡가가 되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직업은 원래 그런 것이다. 이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 일이 너무 힘들거든 회계원이나 건물 관리인이 되면 된다. 걱정할 것 없다. 아무도 작곡이라는 힘든 일을 계속하라고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많은 이들의 부러움 속에서 하는 음악가들은 세상에서 이미 큰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을 하는 것과 음악가로서의 삶이 힘들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고되다. 음악을 하지 않는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음악회장에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빈 좌석을 채운다. 그들이 음악을 듣는 목적도, 좋아하는 이유도 다 다르다. 그렇지만 음악을 통해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받기 원하는 마음은 한결같을 것이다. 연주가 모든 관객을 다 만족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환호가 연주의 유일한 목적이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러나 나만 좋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남만 좋으면 불행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남도 좋아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연주자와 관객 모두가 원하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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