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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26. 2016

좌절은 나의 힘

음악 에세이 9 - "도망치지 말고 나가서 넘어져라."


그대로 멈췄다.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17번 ‘템페스트’의 1악장을 연주하던 중이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연주곡목으로 선택할 때부터 크게 부담을 느꼈던 터였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작품보다도 연주전에 암기에서의 문제는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었다. 귀로도, 몸으로도, 머리로도 완전히 습득된 상태였다. 그랬는데 멈췄다. 물론 연주 중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순간적으로 정지하거나 헤매기는 하더라도 연주 중에 피아노에서 손을 떼게 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연주자들이 무대에서 느끼는 가장 큰 공포심 중의 하나는 암기 실수일 것이다. 나 역시 연주 중에 악보가 생각 안 나는 꿈을 잊을 만하면 다시 꿀 정도로 압박감을 많이 느껴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이어야만 했다. 일어나서 “아, 꿈이라서 다행이다”라고 안도할 수 있는. 그리고 단 한 번도 실제로는 무대에서 발생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래서 무대에 설 때마다 그 두려움은 단지 두려움일 뿐이라고, 그동안도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으로 위안 삼아 왔다.


그것이 깨졌다. 깨어진 조각들을 도저히 맞출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멈추기 전에 어떤 조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헤매다가 멈춘 것도 아니었다. 한 발에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게다가 음악학회에서 주관하는 캠프에서의 연주라 소위 일반 청중들은 아무도 없었다. 청중 전부 전공한 선생님들과 선후배, 그리고 동기였다.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나만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연주회장은 강력한 침묵에 휩싸였다. 나는 무릎 위에 손을 얹어 놓고 생각에 잠겼다. 멈춘 지점조차 찾아낼 수 없는데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명확하게 새롭게 시작되는 앞부분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실제로 내게 일어나는 일일까? 그 순간에도 도저히 내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막상 그 일이 발생하고 나니 내가 받아들일 수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받아들일만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발생하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 시간을 겪고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나는 그 순간에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마음을 간절하게 모아주는 이들이 있었다. 최후의 방어막까지 허물어진 지점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도 무대와 객석과의 거리를 가깝게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음까지 쳐야지만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을 괴로운 와중에도 분명히 인식했다. 다시 친 연주는 다행히 무사히 끝까지 갔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절망스러웠다. 연주를 마치고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사실 슬프지도, 화나지도, 자책의 기분도 안 들었기 때문에 더 당황스러웠다. 무슨 상황인지, 어떤 기분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새벽 4시경에 잠에서 깨었다. 잠을 더 잘 수 없어서 일어나 전날 연주했던 강당으로 향했다. 산 속에 자리 잡은 캠프장이어서 주위는 완전한 암흑과 정적이었다. 나는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서서히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결국 일어나야만 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완벽하게 넘어졌다. 불현듯 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언젠가 인생의 가장 큰 도전 앞에서 마지막 순간에 물러서려는 내게 오빠가 한 말이었다.


“도망치지 말고 나가서 넘어져라. 넘어질까 두려워 나가지도 않는 것은 비겁해. 확실하게 넘어져야 다시 제대로 일어설 수도 있지.”


그랬다. 그때는 그 말에 힘입어 상황을 극복했는데, 이제는 넘어져보니 알았다. 완전히 넘어지면 오직 일어날 일 밖에 없다는 것을. 오히려 문제는 비틀비틀 거리면서도 간신히 넘어지지 않았던 지난 긴 시간들이었다. 제대로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이 나와 내 삶을 서서히 좀먹고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실패를 안 한 것이 아니라 좌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토벤 역시 그러했으리라. 그는 순수한 좌절을 경험했다. 작곡가인 그의 귀가 멀어버리는 것이었다. 피아노 소나타 ‘템페스트’를 완성한 1802년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가 쓰여진 해이기도 하다.


“바라마지 않던 희망,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회복되리라 지금까지 지녀왔던 이 희망을 나는 이제 완전히 포기해야겠다.”


그는 유서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죽음에 이르는 절망은 그러나 새로운 삶에의 의지로 이어졌다.

   

진정한 좌절은 상황과 본질을 직시하게 한다. 그리고 두려워하던 일이 실제 일어나면 실상 그토록 두려워 할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더 이상 두려움이 생의 발목을 잡도록 방치할 수는 없다. 연주가 끝나고 며칠 이어진 캠프 기간 동안 내 연주를 들었던 이들과 함께 했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다가와서 위로해 주었다. 내가 마지막 음을 쳤을 때 마음으로부터 박수를 치고 싶었다고, 나처럼 무대에서 최악의 상황에 닥쳐도 차분하게 다시 풀어 가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고... 그리고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실패한다면 너처럼 하고 싶다.”


나의 좌절을 고스란히 목격한 이들은 그 좌절을 통해 힘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됐다. 진정한 좌절에는 딛고 일어설 수밖에 없는 힘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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