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여행의 시작은 국립제주박물관이었다. 방금 전 일도 금방 까먹는 나로서 대한민국의 유구한 역사를 달달 외워야 하는 국사는 기피 1호 과목이었다. 머리가 희끗한 선생님이 흰 분필로 칠판을빼곡히 채울 때면 어김없이 딴생각을 했고 일어난 사건의 순서를 정렬하는 문항에서 연필을 굴렸다. 문과 대신 이과를 선택한 것도 국사를 비롯한 암기과목 때문이었다. 그것이 내 인생최대의그릇된 선택임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였다. 아무리 보아도 문과적 인간형인 내가 이과에 감으로써 학업에 대한 흥미를 잃었고 시골에 사는 부모는 자식의 진로에 영향을 줄 만큼 배경 지식이 없었다.
공부에 젬병인 줄 알았던 내가 실은 학구열이 대단히 높고 언어에 그나마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대학을 졸업하고 떠난 미국 어학연수 때였다. 영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온 한국인 친구들이 한국인 친구와 어울리며 한국말을 할 때 나는 전자사전을 들고 박물관, 미술관, 수족관, 도서관 등 온갖 관(館)을 찾아다녔다.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 있기좋아했던 나는 그런 식으로 영어를 학습했고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학습 욕구가 높은 탐구형 인간이며, 특히 역사와 문화, 심리 같이 인간을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분야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돌이키기엔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어쨌거나 그때 터득한 방식은 지금까지도 내가 지식을 얻는 방법이 되었다. 사찰이나 유적지에 방문하면 설명이 담긴 안내판을 빼놓지 않고 읽고, 기억하고 싶은 내용은 노트에 적거나 사진으로 남겼다.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그렇게 얻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박물관은 일종의 디폴트 같은 거였다. 어디에 갈지 정하지 못했을 때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라고 할까.
박물관 입구에는 구멍이 숭숭 난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큰 조형물이 있었다. 언뜻 하르방인 줄 알았는데 민머리에 가슴에 뭔가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자석인 듯했다. 제주에서는 밭이나 오름에 마련된 무덤 앞에 이런 동자석을 세워 무덤을 지키고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게 하였다. 검은 석상 아래 돌 받침대에는 혼저옵서예라는 글씨가 박혀 있었다.
제주의 초가지붕을 형상화했다는 돔 지붕의 베이지색 벽돌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높다란 천장이 나왔다. 밖에서 볼 때는 높지 않았는데 단층으로 이루어져 굉장히 높아 보였다. 무료 관람권을 받아 들고 맨 처음 향한 곳은 바로 왼쪽에 있는 어린이 박물관이었다.부모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은 하나같이 뭔가를 누르거나 들거나 벽에 붙어 체험을 하는 중이었다.
이곳은 박물관인가 놀이체험관인가.
나 어릴 적만 해도 박물관은 머리하고 다리만 아픈 곳이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재밌는 곳이 되었지. 허리춤에 오는 아이들과 섞여 종이배를 만들어 화면에 띄워 보내고, 순번을 기다려 물구덕을 등에 지고, 맷돌을 돌려가며 녹두전을 부쳤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체험하는 장면을 카메라로 담으며 흐뭇하게 지켜볼 뿐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다. 어린이 박물관에서 즐기고 있는 어른은 나뿐이었다. 귀여운 나의 조카와 함께 왔다면 나도 저렇게 카메라를 들고 있었겠지.
종이컵을 귀에 대고 치마폭에 흙을 담아 한라산을 만들었다는 설문대 할망의 설화를 듣고 있는데 웅성웅성 소리가 들리더니 부모들이 아이들을 하나 둘 데리고 나갔다. 순식간에 아이들이 사라졌다.
뭐지?
종이컵을 슬며시 내려놓고 피리 부는 사나이를 쫓아간 아이들처럼 사람들을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지하에 있는 실감영상실이었다. 그냥 영상실도 아니고, 시청각실도 아니고, 실감영상실이라니. 대체 무얼 상영하기에.
중간 즈음에서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곧 문이 닫히고 영상실 내부는 깜깜해졌다. 마치 연극이 시작되기 전 조명이 꺼진 극장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시원한 파도소리와 함께 바닥을 포함한 영상실 전체가 파도치는 바다 한가운데로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탄성과 환호의 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라산을 비롯해 제주의 명소들이 공간 가득 구현되는데 교차되는 화면에 따라 시공간을 순간이동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공간을 채우려면 대체 몇 해상도로 촬영해야 할까. 왜 실감영상실인지 알 수 있었다. 한때 유행하던 명화를 소재로 한 미디어아트에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제주의 자연환경을 담은 영상이 끝나고 또 하나의 영상이 어어졌다. [표해, 바다 너머의 꿈]이라는 타이틀이 나오고 장한철이 쓴 표해록(1771)의 내용을 재구성해 만들었다는 내용의 자막이 나왔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장한철은 스물일곱의 나이에 향시에 수석 합격 후 대과(문과)를 치르기 위해 배에 몸을 싣는다. 나고 자란 섬을 떠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지만 한라산과 산방산 정상을 오를 만큼 의기가 장했던 그는 28명의 일행과 함께 호기롭게 출항한다. 그러나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고 사경을 헤매다 어느 무인도에 도착한다. 풀과 나무가 우거진 낙원 같은 곳에 안도하지만 해적의 습격을 받게 되고, 안남(베트남)의 상고선에 구조되었다 다시 표류하고 가까스로 육지에 도착했을 때는 8명만이 살아남았다. 장한철은 그 후 서울에 올라가 과거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고 고향에 돌아와 당시 표류 상황을 담은 해양 문학을 탄생시킨다.
그가 도착했다는 환상의 섬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처럼 바닥을 쓸며 팔딱거렸다. 한 여자 아이는 양손을 머리 뒤에 대고 모델 같은 포즈를 취했다.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새파란 바닥을 돌아다닐 때는 여기저기서 잡아잡아, 하며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하나뿐인 나의 귀여운 조카가 보고 싶어졌다. 아직 말이 어눌한 조카가 이곳에 함께 있었다면 분명 아이 조타아아아아, 외치며 뛰어다녔을 것이다.좋은 곳에 오면 나누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조카와 꼭 한번 같이 오고 싶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