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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Jul 29. 2023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

이제 제주기억을 유튜브에서도 만나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1rGb8M2FQI


해안 도로를 따라 이번엔 서쪽으로 향했다. 숙소에 곧장 갈 수도 있었지만 딱히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무작정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차량도 드물고 오른쪽으로 무쌍하게 변화하는 바다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달렸다. 확실히 동쪽과 분위기가 달랐다. 동부가 주요 명소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 집과 집 사이의 간격이 먼 조용한 시골 마을이라면, 서부는 해안가를 따라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든 한적한 휴양지 분위기였다. 미국으로 치면 동부가 후드티와 청바지 차림에 대학생들이 있는 보스톤을 연상케 한다면, 서부는 웃통을 벗어젖히고 팔에 서핑보드를 끼고 돌아다니는 LA쯤 될까?

숙소는 협재에 있었다. 협재라... 제주의 이름은 뭔가 특별했다. 대개 지역의 특징을 반영한 중립적인 이름이 그곳의 지명이 되는데 제주의 이름은 어떤 심상을 동반하는 운치가 있었다. 예컨대 협재挾才 하면 차분하면서 듬직한 사내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재주가 있다는 의미였지만 사실 한자는 붙이기 나름이었다. 협재의 옛 이름은 섭재로 섶나무가 많아 섭재로 불렀다가 나중에 협재가 되었다. 섭섭할 뻔했는데 아주 근사한 사내의 이름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지난번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꽤 신경을 써서 숙소를 골랐다. 리뷰와 사진도 꼼꼼히 챙겨보고 침대 커버가 흰색인지도 확인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한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였다. 여성전용이라는 단어는 젠더 프리가 유행하는 요즘 세상에서 한물간 표현처럼 들렸지만 안전함과 쾌적함을 보장한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혼자 잘 있는 나에게도 호텔은 심심했다. 사람들의 목소리와 활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숙소 주인은 숙소 사용 시 유의 사항을 카톡으로 전달했을 뿐 더 이상의 연락도 없었다. 장문의 지시문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 도어락 문을 열었다. 현관에 신발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내가 첫 숙박객인 듯했다. 캐리어를 밀고 현관 안으로 들어자 아담한 실내와 유리 창 너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놓인 나무 평상과 같은 톤의 협탁이 깔끔하면서도 멋스러웠고 곳곳에 배치된 돌고래와 감귤 뜨개물이 귀여움을 더했다.

뭐야, 뭐 이렇게 예뻐.

캐리어를 현관에 둔 채 실내를 오가며 사진을 찍다. 세면대가 화장실이 아닌 거실에 있어 화장실이 붐빌 것을 대비했고, 화장실과 샤워실이 구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변기에는 무려 비데가 있었다. 여러 모로 신경 써서 만든 공간이었다. 방문을 열자 2개의 이층 침대와 가운데 4개의 간이 옷장이 있었다. 그중 바다가 보이는 창 쪽 1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침구도 깨끗하고 침대별로 놓인 갈색 나무 수납함에는 흰색 수건 두 장과 런던후르츠 과일차 티백과 일회용 어메니티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너무 좋아.

과 방을 전전해 온 나는 딱 이런 곳에 살고 싶었다. 크지도 좁지도 않고 딱 있어야 하는 세간 살림만 구비된 조촐하면서도 깔끔하면서 예쁜 집. 완전 내 스타일. 나의 취향을 확실히 알았다. 나는 숙소가 중요한 사람이다. 앞으로 숙소는 무조건 여성전용 게스트하우스다.




숙소에 대한 감탄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유리창을 통해 보았을 때 해수욕장과 숙소가 연결되어 있을 것만 같아 숙소 입구 반대쪽으로 나와 개구멍을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옆 건물과의 담장 사이로 좁은 사잇길이 있었고 그곳을 통과하크고 날카로운 검은 돌바위 나타났다. 그리고 멀리 뽀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갈 수 있겠는데.

울퉁불퉁한 검은 암석을 밟아가며 바다를 향해 걸었다. 입구로 갔다면 이십분 혹은 그 이상이 걸렸겠지만 이렇게 가니 백사장까지 십분이면 되었다. 모래사장에 도달해서는 홀린 듯 신발을 벗어 양손에 들고 바다를 향해 뛰어갔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아름다운 바다가 나를 사로잡았다.

아이 차.

튀김 반죽 같이 보드라운 모래알이 발가락 사이에 척 달라붙었다. 제주에 와 처음으로 바다에 발을 담가보는 거였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상쾌해졌다. 덩달아 기분도 유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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