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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를 나와 향한 곳은 한림민속오일장이었다. 온화해진 날씨 탓인지 과일 생각이 간절했고 며칠 전 도민과 함께 시장에 간 일이 생각났다. 검색해 보니 마침 오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시장에 들어서자 화려한 뽕짝 리듬과 함께 나훈아의 테스형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이 노래를 기억하는 이유는 몇 년 전 명절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친척들과 함께 이름도 거창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라는 방송을 보았기 때문이다. 테스형은 그때 발표한 신곡이었다. 하얀 수염에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선 가수는 애절하게 테스형을 연거푸 외쳤고 그때마다 소크라테스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가사 중에 천국인지 천사인지 하는 대목에서는 하얀색 천사복을 입은 몇몇 젊은 여성이 와이어에 매달린 채 공중에서 천사의 날갯짓을 흉내 내어 콧방귀를 뀌었었다. 뭐 저런 일차원적인 무대가 다 있나. 하찮게 생각했던 나와 달리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는 매우 집중하고 있었고, 그때 나는 넘을 수 없는 세대의 벽을 느꼈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이 방송은 역대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 곡은 세간의 화제가 되며 역시 나훈아, 라는 칭송을 받았다.
아! 테스형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화려한 리듬에 맞춰 경쾌하게 시장을 걸었다. 가사의 깊이를 헤아리니 자꾸만 웃음이 났다. 외국인 관광객을 코스프레하듯 생전 안 먹는 호떡을 입에 물고 시장을 둘러보았다. 비좁은 골목에 매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서울의 재래시장과 달리 제주의 민속시장은 확 트인 공간에 상인도 손님도 어딘지 느긋해 보였다. 서울에서의 속도로 움직이면 왠지 다가와 천천히 합서양 할 것 같은 제주 특유의 바이브라고나 할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나오는 뽕짝도 이곳의 환한 분위기를 더하는 듯했다.
아! 테스형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맞아, 사는 게 힘들지. 사랑은 어렵고. 노래는 진즉에 끝났지만 나는 속으로 테스형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뭐 하세요?
숙소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핸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방바닥에 앉아 바늘로 발바닥에 잡힌 물집을 빼고 있었다.
오랜만에 걸었더니 바로 물집이 잡히네요. 안 빼주면 내일 못 걷거든요.
어떡해요.
이렇게 찌르면 빠져요. 거의 다 빠졌어요.
바늘은 사신 거예요?
혹시 몰라서 가져왔는데 첫날부터 이럴 줄은 몰랐네요.
저렇게까지 걸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심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검은 봉다리를 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장에서 사 왔어요.
바닥에 앉아 나는 한라봉 꽁다리를 땄고 거사를 마친 여자는 오메기떡을 입에 물었다. 오늘 뭐 했는지 물어보니 여자는 올레길을 걷고 이 동네 목욕탕에 다녀왔다고 했다.
세신해주는 아줌마가 진짜 잘하시더라고요.
여자는 엄지를 치켜세우면서 한 번 가보라고 권했다. 그러더니 혼자 큭, 하고 웃었다.
아니, 나를 단골로 꼬실라고 엄청 잘해주는 거예요. 여기 사람으로 생각했나 봐요. 목욕탕까지 오는 여행객은 없으니까. 여기 안 산다는 말은 못 하고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죠, 뭐. 팁 더 드리고 왔어요. 근데, 너무 잘해.
여자는 다시 한번 엄지를 쳐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핸드폰에서는 알지 못하는 밴드의 클래식컬한 음악이 끝나고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여자의 말보다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거 뭐예요?
뭐가요?
지금 나오는 곡이요.
아~ 빛과 소금이요.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처음 들어요.
유명한 노래인데 몰라요?
제가 가요를 잘 몰라요.
90년대 노래인데 이소라가 다시 불러서 유명해졌죠.
그렇구나. 빛 뭐라고요?
빛과 소금.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어느덧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한 번 다시 들으면 안 돼요?
여자는 대답 대신 한 손을 옮겨 핸드폰을 짚었다. 노래가 다시 재생되는 동안 여자도 나도 말없이 음악을 들었다. 테스형도 그렇고 가사가 왜 이러지 꼭 내 마음 같았다.
나약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봐.
그대가 내게 전부였었는데.
제발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그대 없는 밤은 너무 싫어.
우, 돌이킬 수 없는 그대 마음
우, 이제 와서 다시 어쩌려나.
그날 이후 b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