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은 팔에 찬 한라산이라고 적힌 띠지를 자랑처럼 보여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바탕 시음을 하고 와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술을 마시면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체기가 올라오는 나로서는 공감하지 못하는 즐거움이었다.
밥 먹었니? 밥 먹으러 갈까요? 오전에 간단하게 먹어서. 정말 맛있는 밀면집이 있는데, 수육도 맛있고. 거기 갈래? 줄 서서 먹는 데야. 좋아요. 여기서 좀 가야 돼. 차 없잖아요. 난 차 없지. 네가 운전해야지.
모닝한테 도민은 좀 버거워 보였다. 머리는 지붕에 닿을 것 같고 보조석을 최대로 밀고 등받이를 뒤로 젖혀도 좁아 보였다.
괜찮겠어요? 왜? 난 충분한데? 불편해 보여, 무릎이 앞에 닿을 거 같아. 난 괜찮아. 정말이죠? 응. 그럼 출발합니다. 저기 앞에서 우회전해서 쭉 직진하면 돼.
도민이 말한 곳부터 야트막한 경사의 넓은 도로가 펼쳐졌다. 차도 거의 없는 데다 시야를 가리는 높은 건물이 없어 4차선밖에 안 되는 일주서로가 훨씬 더 넓어 보였다. 드넓게 펼쳐진 지평선을 끼고 한참을 달렸다. 한낮의 태양빛이 지면에 닿아 반짝거렸고 드문드문 보이는 야자수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마치 플로리다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오프숄더 상의에 선글라스를 낀 금발 여성이 오픈카 지붕으로 상체를 내밀고 춤을 출 것 같은 날씨였다.
여기는 드라이브할 맛 나네. 그치. 항상 내가 운전하다 누가 운전해 주니까 좋다. 아주 좋겠어. 낮술도 한 잔 하시고 기사도 있고.
삼십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대정읍의 한 식당이었다. 도민은 이곳에 여러 번 왔지만 줄 안 서고 먹는 건 처음이라며 이 집 정말 맛있다고 한 번 더 강조했다. 맛있어 봐야 밀면이지. 먹는 것에 진심인 도민과 달리 나는 음식에 별 관심이 없었다. 매일 해결해야 하는 끼니는 생명유지의 수단 그 이상도 아니었다. 어릴 적 할머니댁에 놀러 가면 할머니는 늘 김을 꺼내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가 주로 드시는 배추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마늘장아찌는 하나같이 간이 셌고 냄새도 심하고 생김새도 불호였다. 다들 좋아서 먹는 삼겹살도 깨작깨작 비계 부분을 죄다 잘라먹었고 남들보다 적게 푼 밥도 남기거나 물에 말아먹었다. 성인이 된 지금 그때만큼 입이 짧지는 않지만 드래곤볼에 나오는 한 알만 먹어도 십일간 배 부르다는 선두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번 먹어봐.
음식이 나오고 도민은 자신이 만든 음식을 평가받는 듯한 얼굴로 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젓가락으로 면을 휘- 저은 후 한 점 건져 먹었다. 청량하면서 깔끔한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의 감각을 깨우며 정신이 들었다. 탱글탱글한 면발이 침샘을 자극하며 미끄러지듯 입안을 돌아다녔다.
어때?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내가 도민을 바라보자 도민은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이 수육을 한 번 먹어봐. 아니야. 난 이거 먹으면 돼. 넌 수육 안 먹니? 물에 빠진 고기 잘 안 먹어요. 비려서. 여기 하나도 안 비려. 다들 안 비린다고 해서 먹어보면 다 비리더라고요. 여기는 진짜, 정말 안 비려. 한 번 먹어봐.
먹지 않으면 도민이 식사를 시작하지 않을 것 같아 못 이기는 척 살코기가 많은 부위로 골랐다.
어때? 맛있네. 안 비려. 안 비리다고 했지?
도민은 이제야 안심한 듯 젓가락을 들고 후루룩 쩝쩝 먹기 시작했다. 나도 다시 한번 수육을 집어 붉은 양념장에 찍어 먹었다. 참기름을 바른 듯 부드럽고 말랑한 고기가 씹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쏙 목구멍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수육에서 잡내가 안 날 수 있지? 가게만 지나가도 특유의 돼지비린내 때문에 숨을 참곤 했는데... 요놈 참 맛있네. 내 입맛이 변한 건가 아니면 역시 미식가의 입맛은 다른 건가.다시 한번 고기를 집어 들었다.
도민과 함께 있으면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제주 이야기를 쓰며 음식 이야기는 한 번도 쓰지 않았는데요, 정말 맛있었던 기억이라 한 번 써보고 싶었답니다. 제주 남쪽에 가신다면 모슬포항 근처 산방식당을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