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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Aug 12. 2023

작가의 작업

이제 제주기억을 bxd 유튜브에서도 만나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rX4ITpehwOU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도 역시 여자는 걷기 위해 떠나고 없었다. 아무도 없는 숙소의 블라인드를 열어젖히니 소다색 바다가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두 밤을 자니 더욱 내 집이고 싶은 이곳에서 과일차를 우리고 상에 앉았다. 그리고 음악을 틀었다. 차를 홀짝이며 어제 여자를 통해 알게 된 곡을 반복해 들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 음악은 번번이 나를 찾아왔다. 카페에서, 라디오에서,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또는 어제처럼 낯선 이의 플레이리스트를 통해 돌연 나에게 와 내 마음을 일깨워주었다. 신통하게도 그런 경험이 자주 있었다. 음악이 없었더라면 삶은 더 불확실하고 나는 더 방황했을 것이다.

나약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봐
그대가 내게 전부였었는데, 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약한 내가.




주말 오후 커피숍은 사람들로 붐볐다. 마침 1인용 좌석이 비어 앉았지만 고동색 나무 의자는 딱딱했고 여행객들이 쉴 새 없이 떠드는 소음에 음악은 갈가리 찢겨 어떤 곡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른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가져온 여행 브로셔를 펼쳤다. 다녀온 곳과 다녀갈 곳을 헤아리며 새삼 제주가 큰 섬이라는 사실이 자각되었다. 여행 십이 일째였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간 거지. 슬슬 다음 달 카드 값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루에 십만원씩만 잡아도 백이십만원이네... 다 돌 수 있으려나. 혼자 하는 여행이 점차 재미가 없어지는 중이었다.

새로운 자리가 났을까 주변을 돌아보다 무심코 바로 옆 넓은 테이블 끝에 노트북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나와 같은 검은 단발에 체구가 작고 깡마른 여자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유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투박한 옷차림이 여행객 같지는 않았다. 여자 옆에는 4명의 일행이 마주 보고 앉아 시끄럽게 이야기 나누는 중이었다. 주말에 뭘 하는지 몰라도 바로 옆에서 저렇게 떠들면 집중이 안 될 텐데, 여기 사시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반대쪽 구석에 젊은 여성 둘이 일어날 채비를 했다. 앗싸. 자리를 놓칠 새라 부랴부랴 짐을 챙겨 이동하다 무심결에 여자의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여자는 글을 쓰고 있었다.

문단의 구분으로 보아 소설을 쓰고 있는 듯했다.

작가였다.

글을 쓰고 싶었다. 멋진 글, 매력적인 글, 철학이 있는 글, 따뜻한 시선이 담긴 글. 나의 글이 이 세상 누군가에게 살아갈 힘이 되기를 바랐다. 나의 글을 통해 나 역시 세상과 연결되고 싶었다. 촌스러운 이야기지만 글은 나의 전부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골방에 처박혀 있으면서도 글을 쓰고 있다는 도취감에 사로잡혀 구름 위를 나는 기분으로 살았던 적 있다. 전혜린, 최승자, 강석경.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좋은 글 한 편은 남길 수 있겠지. 허황되고 맹랑했다. 엄마는 언제까지 허송세월을 보낼 거냐며 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헤매는 것 같다고 했다. 늦은 아침 잠결에 전화를 받으면 내심 속상한 어조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지, 했다.

글쓰기를 그만두고 다시 일을 시작하고 통장에 돈이 들어오고 조카에게 줄 뽀로로 버스를 샀다. 한동안은 돈 버는 재미살았다. 늦은 만큼 열심히 벌어 큰 집으로 이사 가야지. 생전 처음 엄마와 간 해외여행에서 엄마는 내가 늦게 철이 든다고 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철이 드는 결과로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 둘 잃어갔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았고 일기조차 쓰지 않았으며 취향과 웃음도 점차 사라졌다. 사는 게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거지.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그러는 사이 나는 40대가 되었고 이제는 조금이나마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꿈이라는 단어는 어떤 상념에 젖어들게 했다. 작가의 작업은 지난한 나의 30대를 상기시켰다.

새 자리에 앉아 짐을 풀고 책을 보는 척하며 옆에서 작가를 훔쳐보았다. 작가님이라니... 작가란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람인데 바로 지금 자신이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 어수선한 이곳에서 작가만이 다른 세계에 동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작가는 아까부터 부동의 자세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 있었고 작가의 여윈 손은 자판 위에 멈추어 있었다. 저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는 중 듯 보였다. 그렇게 1분, 2분, 3분... 10분이 흐르고 겨우 몇 자를 치고는 이내 지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양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 깍지를 끼고 얼굴을 괸 채 모니터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어깨를 톡치며 땡을 해줘야 할 것 같이 얼음 상태로 굳어 있었다.  

작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색 가방에 노트북을 넣고 나갔다. 작가가 머문 자리는 곧 다른 관광객으로 채워졌다. 나는 노트를 꺼내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며 짧게 메모를 남겼다.

계속 글을 썼다면 나도 저모습이었을까.
글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 건 잘한 선택일까.

커피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내 자리도 누군가에게 내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이제 어디를 가지, 나도 올레길이나 걸어볼까, 아니면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도민이었다.

어디야?
커피숍인데요?
어디?
금능해수욕장 쪽이요.
나 근처인데. 한라산 소주 공장 투어 왔거든. 시간 되면 볼래?
그래요.
버스 타고 가면 30분 안 걸릴 거 같아.
응, 이따 봐요.

전화를 끊고 sns에 올린 여행 기록을 확인했다.

도민을 본 지 일주일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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