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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방에서 아기자기한 아이들이 반짝이는 눈망울로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카운터에는 앞치마를 한 젊은 여성이 앉아 실에 비즈를 꿰고 있었다. 여자는 어서 오세요, 짧게 인사했을 뿐 다시 작업에 열중했다. 3평 공간을 가득 채운 온갖 종류의 소품을 보고 또 보고 또 보느라 의외로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죄송한데, 몇 시까지 해요?
7시까지는 하는데 좀 늦어도 돼요. 천천히 둘러보세요.
죄송해요, 제가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아가지고.
괜찮아요.
위험한 곳에 들어와 버렸네요.
나의 진심을 여자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고개를 숙이며 풋 웃었다. 여행이 십 일째에 접어들며 짐도 하나둘 늘어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하나씩 모은 아이템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런데도 또 갖고 싶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평소 소비를 즐기는 타입이 아니다. 체형도 20년 전과 비슷해 대학교 때 입었던 옷이 아직도 옷장에 있었고, 엄마는 세상에 너 같은 사람만 있으면 옷장수들 죄다 굶어 죽었을 거라며 하나뿐인 딸이 꾸미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지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잠재되었던 물욕이 폭발하는 중이었다.
예쁜 게 너무 많아요. 직접 디자인하시는 거예요?
저랑 몇 명이 같이 해요. 저는 이쪽에 있는 비즈랑 자개 쪽을 주로 하고요.
여자가 가리킨 곳은 천장에 매달린 무지개 모양의 귀여운 모빌이었다. 들고 있던 드림캐처를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모빌 앞으로 갔다.
모빌 너무 예뻐요.
모빌 아니고 썬캐처예요.
드림캐처 같은 거예요?
비슷한데 빛이 들어오는 데 걸어두면 햇빛이 반사되면서 빛나거든요. 인디언들은 썬캐처로 집 안에 빛이 들어오면서 행운도 같이 들어온다고 믿었대요.
나는 어느새 썬캐처를 만지고 있었다.
저는 이런 게 어디서 떼오는 건 줄 알았어요. 아, 이거 말고 왜 많잖아요. 모자니, 볼펜이니, 어딜 가나 있는 비슷한 것들이요.
이쪽이 저작권 침해가 심해요. 공들여 디자인하면 그거 가져다가 베끼고 살짝 바꿔서 찍어내더라고요.
그래서 비슷한 게 많구나...
제 디자인도 많이 도용당했어요. 여기 볼펜도 제가 작년에 디자인한 건데 어느새 보니까 다 비슷하게 해서 팔더라고요.
여자는 카운터 앞에 놓인 감귤 꽁다리 실리콘 장볼펜을 가리켰다.
소비자들은 잘 모르잖아요. 창작자만 아는 건데, 그걸 입증하기가 되게 어려울 것 같아요.
처음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거의 체념했어요.
기준도 애매할 거 같아요. 어디까지가 창작인지, 어디부터 모방으로 볼 것인지, 재창작은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저희 같이 혼자 작업하는 사람들은 그냥 눈 뜨고 당하는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죠.
여자는 말하는 중간에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소비자가 현명해져야 하는데 사람들이 뭐 그런 거 생각하나요. 싸게 사면 그만이지. 싸게 사는 만큼 누군가 그만큼 착취당하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하면 불편하니까 생각 안 하죠... 속상하시겠어요.
여자는 입을 다문 채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그 질문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윤 추구라는 노골적인 목적이 정당화되는 사회에서 모두에게 정당한 대가가 보장된다고 믿는 것만큼 나이브한 생각도 없을 것이다. 한쪽 눈을 가린 채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구조를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다.
가게는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한 2년? 원래 서울에 있다가 남편이 제주 사람이거든요. 결혼하면서 내려와서 같이 하고 있어요.
우와, 좋겠다. 예쁘잖아요, 제주.
좋아요. 저는 작업하고 남편이 주로 가게에 있는데 오늘은 남편이 일이 있어 제가 나왔어요.
제가 운이 좋았네요. 작가님하고 이런 이야기도 하고.
저도 처음이에요.
장고 끝에 무지개 썬캐처 세 개와 동백꽃금목걸이와 엽서를 샀다. 여자는 많이 산 데 대한 답례로 선물을 줄 테니 골라보라고 했다. 다시 한참을 둘러보다 DIY 비즈 팔찌를 골랐더니 여자는 너무 싼 거를 골랐다며 팔찌 두 개를 더 챙겨줬다. 카드로 결제하자 이용한도 초과 승인 안내라는 문자가 날라 왔다. 플렉스 제대로 했다. 내가 갖고 싶은 게 이리 많은 사람인 줄 몰랐다.
명품보다 더 좋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숙소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이 공간을 혼자 쓰고 있으니 진짜 내 집 같았다. 음악을 틀고 컴퓨터로 일을 하고 여행의 기록을 sns에 옮겼다. 벌써 열한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상점에서 선물로 받은 비즈 팔지를 꺼내 우레탄 줄에 구슬을 끼워 넣고 있는데 삑삐비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여행객이었다.
화장기 없이 머리에 남색 비니를 눌러쓴 키가 큰 여성이 주섬주섬 들어오며 인사했다. 남색 바람막이를 입은 여자는 캐리어 없이 등산 가방을 메고 있었다. 숙소를 둘러보더니 맞은편 침대 1층에 자리를 잡고는 거실 유리창 앞에 앉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행객은 처음이었다. 여행일을 했다 이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쪽 일은 한다는 그녀는 주말 휴가를 내었고 이곳에 4일간 머물며 올레길을 걸을 거라고 했다.
생각이 많을 때 무작정 걸으면 생각이 정리가 되더라고요.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지 물으려다 말았다. 어느새 자정이었다. 여자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걸을 거라며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팔찌 세 개의 매듭을 엮고 한 시쯤 침대에 누웠다. 매트리스가 단단히 허리를 잡아주었다. 꿀잠을 잘 것 같은 흔들리지 않은 편안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