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주기억을 bxd 유튜브에서도 만나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Resj2hnvDhw
카페에서 일을 마치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 하루동안 열일한 태양도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석양을 보기 위해 얼른 짐만 내려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낮에 카레집도 그렇고 숙소도 그렇고 차도만 건너면 바로 바다였다. 구멍이 숭숭 난 검은 바위를 따라 내려가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바다가 출렁였고 간혹 아저씨들은 겁도 없이 바위 아래까지 내려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은 애월읍이었다. 제주에 와 새로 생긴 습관 하나가 언어의 이미지화였다. 생경한 단어나 이름, 제주 방언 같은 낯선 표현을 접했을 때 그 의미를 알아보기 이전에 그것이 주는 주관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 아침 떠나온 협재의 경우 키가 크고 마른 창백한 지식인이 떠올랐다. 그리고 애월은... 무조건 여자 아이의 이름이었다. 밭일을 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애월아~ 하고 부르면 아부지~ 하며 달려올 것 같은 맑은 얼굴의 소녀. 애월涯月은 물가의 달이라는 뜻이었다. 누가 처음 이 이름을 생각했는지 몰라도 최고의 작명이다.
검고 어두운 바위에 걸터앉았다. 태양의 퇴근길,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거대한 구름 띠가 형성되었으며 그 아래로 마치 운석이 떨어지듯 영롱하게 빛나는 태양이 바다로 곤두박질치려 하고 있었다. 사진으로 담아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제주에 있으며 거의 매일 바다를 보았지만 바다는 언제 보아도 감탄스러운 얼굴로,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말없는 하소연과 멍든 마음을 담담히 받아주었다. 지구가 생겨난 이래로 수많은 바다생물 종과 인류와 지구를 지켜준 이 마음씨 깊은 바다에게도 큰 위협이 닦쳤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방류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로 인해 지구와 인류는 영영 고통받게 될 수도 있다.
일주일 뒤면 제주를 떠난다. 오늘 아침 제주를 떠나는 비행기를 보고 티켓을 끊었다. 시작과 마찬가지로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마음은 가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신호를 주었다. 내일 차를 반납하는 길에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번 라산을 보고 싶었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 라산은 나를 마냥 웃게 할 것 같았다. 매일 같이 가라앉는 저 태양처럼 시도 때도 없이 침전하는 나를 끌어올려줄 것 같았다. 라산을 만나야 했다.
태양이 사라진 후에도 노을은 한참을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또 하루가 이렇게 저물고 있었다. 몇 시쯤 되었을까.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켰다. 메시지가 와있었다.
네가 싫어졌다.
b였다. 그날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6일만이었다. 그 사이 맥락 없이 b가 떠오르긴 했지만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었다. 오래 생각했고 서울에 올라가면 이 지난한 관계를 정리할 것이다.
싫어해 그럼.
짧게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바다를 응시했다. 카톡 알림이 울렸다.
넌 나하고 안 맞아.
다시 간단하게 답장을 보냈다.
마음대로 해.
다시 알림음이 울렸다.
우린 인연이 다 된 것 같아. 서로 건강하고 행복하자.
마지막 메시지에 갑자기 짜증이 났다.
인연이 다 된 지 오래됐지. 끝난 인연을 오래도 끌었지.
나의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b는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거기서 소녀 감정 그만 떨어. 대부분 서울의 탁한 공기 속에서 살아가. 그런 네 모습 별로 보기 안 좋아. 제주살이 하는 애들. 오히려 영혼이 비어 보여.
b는 원래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보단 가만히 듣는 쪽이었고, 지난 5년간 언성을 높이거나 크게 싸운 적도 없다. 간혹 정말 화가 나면 가쁘게 숨을 몰아쉬거나 혼자 조용히 분을 삭이고 돌아왔다. 불 같이 화를 내고 돌아서는 건 언제나 내 쪽이었다. 그런 b로서는 칼을 간 말투였다.
쫓겨났거나 쫓겨나고 싶은 사람들. 여기 한통속에 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비겁한 이들. 멋진 척은.
멋진 척이라니. 내가 그럴 사람이야?
sns에 글 올리고 그런 거 안 멋져.
내 인스타나 보기나 한 거야?
안 봐. 그런 거.
보고나 얘기하셔.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지 말고.
메시지는 거기서 그쳤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울에 가면 어른스럽게 이별을 고하고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려고 했는데 애도 아니고 또 유치하게 굴었다. 어른이 되어도 연애는 미성숙했다. 속내를 몰라주는 상대에게 투정 부리고 쏘아붙이고 후회하고. 가만 보면 연애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밑바닥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과정 같았다.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얼마나 미숙한지 다시 한번 깨달으면서도 또다시 같은 수렁에 빠졌다. 어른이 되어도 연애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고 그만큼 더 애틋하고 더 매달리게 되었다.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나도. 그리고 b도. 달라진 b의 태도가 의아했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어차피 이제 다 끝났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뒤를 돌았다.
휘영청 밝은 달이 훤히 물가를 비추고 있었다.
감추고 싶은 뭔가를 들킨 것 마냥 부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