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주기억을 bxd 유튜브에서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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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예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다시 잠을 청할 수도 있었지만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밤기운을 간직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며 정신이 맑아졌다. 여행 체질인가. 서울이라면 분명 자고 있을 시간에 깨어있다니. 스스로가 대견했다. 게으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부지런함을 발휘할 대상이 없던 거였다. 이 참에 더 알차게 시간을 보내야겠다 싶어 차에 캐리어를 싣고 책을 꺼내 들었다. 어제 석양을 보았던 자리로 가 돌바위에 걸터앉았다.
잔잔한 음악 같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책을 꺼내 들었다. 여러 작가들이 어떻게 일상을 보내는지에 관한 이야기집이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이야기 너머에 있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곤 하는데, 그들이 어떤 식으로 하루를 보내고 어떻게 영감을 얻는지 궁금해 고른 책이었다. 매일 원고지 20매를 쓰고 한시간씩 달리는 하루키를 통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작가의 루틴은 단조롭다 못해 애처로웠다. 대부분 척추 질환과 터널 증후군을 앓고 있었고, 생존을 위해 매일 걷기와 스쿼트를 수행해야 했으며, 그 외 시간은 주로 읽거나 썼다. 흡사 수도원의 구도자 같은 청렴하고 금욕적인 생활이었다. 무한한 상상력의 원천이 절제와 극기라는 사실이 아이러니였지만,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어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경건한 수행의 결과로 낳은 문장들은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렸다.
문학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타인을 향한 애틋함을 잃지 않기 위함인데, 문장으로만 그것을 가장하고 현실에서 망각한다면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큰 불행이 된다는 것, 나는 이제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조해진, 삶은 작은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 중에서
수행하는 마음으로 작가의 문장을 따라 읽었다. 파도 소리가 배경음악이 되었고 곡에 심취해 노래하는 가수처럼 작가라도 된 듯 취해 소리 내어 문장을 읽어나갔다. 영상으로 녹음된 내 목소리는 나 같지 않았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 오늘 묵을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주유를 하고 차를 반납해야 한다. 오늘부터 다시 뚜벅이다.
뚜벅이의 조건 하나, 가방이 없어야 한다.
한동안 노트북의 무게를 잊고 있었다.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계속 메고 다녔다간 껍질의 무게에 깔릴 것만 같았다. 일단 숙소 근처 카페로 가서 일을 마치고 숙소에 가방을 맡기고 나올 생각이다. 애월읍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카페를 검색하고 있는데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사진에는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가 맞닿아 있었고 여기저기 점박이 같이 실내조명이 반짝이고 있었다. 도민이었다.
하귀 카페. 일할 거면 일루 와.
내일 볼 텐데 뭘 또 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I 성향이 강한 나는 사람과의 만남이 피곤했다. 여럿이 모이는 자리는 가급적 피했고, 연락을 하는 사람도 손에 꼽았다. 그때그때 어울리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 시기를 지나면 자연스레 멀어졌고, 프리랜서가 된 후로 이제는 누군가와 만나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린 듯했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되어 편했지만 외로웠다. 너무나 외로웠지만 막상 사람을 만나면 힘들었다. 집단이 중심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 매번 적응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기도 많이 했다. 왜 너만 그러니. 왜 유독 너만...
MBTI가 없었다면 거북이 등껍질 같은 자책감과 자괴감을 지고 살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나의 성향이 그렇기 때문이라고 인정해 버린다. 여전히 외롭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싶지는 않다. 외로워도 나답고 싶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가방 셔틀이나 시켜야겠다 싶어 버스에서 내렸다. 마침 맞은편에서 버스가 오고 있어 급하게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에 올라탔다. 지도상으로 카페는 왔던 길을 몇 정거장만 되돌아가면 되었다. 그런데 웬걸... 버스가 우측으로 꺾어 들어갔다. 어, 안 되는데.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정류장으로 도로 걸어왔다. 이번엔 노선을 제대로 확인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세 정거장쯤 지나 좌측으로 카페가 보였다. 하차벨을 눌렀다. 그러나 버스는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한 다음에야 정차했다. 뭐야... 다시 지도를 확인하니 30여 분을 더 걸어야 했다. 카페가 포구 쪽에 있어 정류장이 가까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걸었다. 거북이 등껍질을 메고.. 짜증이 몰려왔다. 그늘 한 점 없는 도로 한복판에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왜 오라가라야. 무거워 죽겠는데.
한참을 걸어 제주도의 스벅이라는 커피숍에 도착했다. 카페에 도달해서도 매장 입구를 못 찾아 빙 둘러 갔다. 2층으로 올라가니 창밖으로 사진 속 바다와 하늘이 보였고, 도민은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으로 작업 중이었다. 그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철퍼덕 의자에 앉았다. 그가 토끼눈을 뜨고 어? 했다. 내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뭐야, 괜히 왔네...
조해진, 삶은 작은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